서재 서포터스 공지가 나온 뒤 시간이 흘러 이에 대한 몇몇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나 역시 이에 공감하는 바다. 대략 큰 범위 내에서. 서포터즈 1기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데, 그 이유는 이에 대한 우려 때문이 하나이요, 다른 하나는 부작용이 생겼을 때 - 예를 들면 신간서적에 추천이 왕창 찍혀있거나 특정인들의 리뷰만이 이주의 리뷰로 선정되는 사태 - 나도 이로부터 100%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정직하게 소신껏 추천을 눌러댔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관심갖는 분야가 인문/사회이기 때문에 이 분야를 벗어나서 관심 없는 책의 리뷰까지 읽어가며 막노동 하지도 않을테고, 그렇다고 인문/사회 분야에 오르는 온갖 리뷰들을 다 검토하면서 100% 공정하게 - 사실 100% 공정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누구나 자기주관에 따라 기준은 다르다 - 60개의 추천을 눌러댔다고 말 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몇몇 분들이 장문의 페이퍼를 통해서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후에 부작용을 보완하자, 라는 시각도 있다. 둘 다 끄덕끄덕. 하지만 결국 우리는 알라딘 운영자 측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충분히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우려는 나왔고, 운영자 측은 자신들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일깨워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나름 고민을 할 것이다. 고민 끝에 알라딘이 어떻게 결정하든 그것은 알라딘의 몫이다. 

  이또한 몇분의 페이퍼와 댓글을 통해서 드러났지만, 알라딘은 유독 다른 인터넷 서점과 달리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거주민들의 의견이 치열하게 오간다. 하나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한 생각들이 페이퍼와 댓글을 통해 오간다. 이런 흐름은 최근 더 두드러져 보이는데 - 어쩌면 전에도 그랬는데 내가 무신경했을수도 - 서포터즈라는 제도를  시행하느냐 마느냐, 는 사실 알라딘 운영상의 문제인데, 왜 많은 알라디너들(알라딘에 서재를 가지고 있으면 다 알라디너다)이 나서서 이런 저런 의견을 제시할까. 때로는 건의의 형태로, 때로는 강요의 성격으로, 때로는 자세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의견을 피력하는 글의 색깔도 각양각색이다. 

  알라딘 운영자 측은 이에 대해 불만이 있을수도 있겠다. 아니 왜 우리가 이렇게 운영하겠다는데,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아. 니들이 뭔데?! 버럭. 하고 싶지만, 차마 고객이기에 그러지 못하고, 네 고객님 이런 점은 이러이러합니다, 라고 애써 친절을 담아가며 말할 수도 있겠다. 진심이든 아니든. 좋은 의견을 주고 열심히 활동하는 이곳의 정착민들은 알라딘 운영자 측에선 골칫덩어리다. 정성들인 리뷰도 올리고, 진지하고 깊이있는 페이퍼도 작성하는 등 서재 전반의 질적상승을 불러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그들이 고맙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안을 내놓을 때마다 궁시렁궁시렁 말이 많은 이들 때문에 운영자 측의 권위(?)가 말이 아닐수도 있겠다. 나 이렇게 운영할거야, 안돼 그렇게 하지마, 말과 글이 오간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다. 사발면님의 서재에서 긴 댓글로 잠깐 언급했지만 2년반 정도 이곳에 몸담은 내가 느낀 바로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각각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독립된 개인으로서보다는 '알라딘 마을'(이 명칭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안의 주민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 마을의 환경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땡스투 제도로 불량리뷰어들이 판을 칠 때에도, 그들이 축적한 불량리뷰로 5000원을 챙겨먹을 때에도, 하이드님과 메피스토님을 비롯한 분들이 꾸준히 마을지기에게 가서 신고를 하고 차단했던 적도 있다. 환경이 나빠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쾌적환 환경을 조성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므로.

 서재 서포터즈에 대한 여러 의견도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쾌적한 환경을 바라오니,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부작용 때문에 마을환경이 또 다른 차원에서 훼손되는 것을 볼 수 없다. 고로 좀 더 고민해달라, 고 건의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운영자 측이 예측하지 못했던 점에 대한 지적이나 건의의 차원이어야지, '하지마'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고 말고는 운영자가 결정할 일이고, 그들은 우리의 여러 의견을 듣고 충분히 고려할 것이다. 알라딘에 있어서 이런 의견을 주는 열혈 알라디너들은 무시 못할 존재이고, 그들이 있기 때문에 알라딘이 다른 서점과 차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얼마전 네이버의 인터넷 서점의 매출에 관한 기사를 봤는데,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니, 많은 댓글들이 나는 알라딘이 좋다, 왜냐하면 좋은 글이 많으니까, 였다. 내가 이곳에만 거주하는 건 아니지만 - 예스24에도 블로그 있다. 이제 활발히 돌아다니지는 않지만 - 은근 기분 좋더라. 거기에 나도 기여하는 거 같아서. 그런지 아닌지는 다른 이들이 나를 평가할 일이고.

 물론 서재 서포터즈 제도에 대한 비판 중 다른 차원에서 이뤄지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다. 알라딘을 망하게 하기 위한 조작 행위. 비판적인 목소리를 강하게 내고 여론을 선동함으로써 운영자 측에 타격을 주고, 제도 자체를 시행치 못하게 하는 세력(?). 마치 이키유바라 최의 <그림자 정부>와 같은 음모론이지만 가능한 이야기다. 고로 이곳에 집짓고 사는 거주민들은 친소관계와 서재지수 등을 떠나 자기 스스로의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사태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비단 이건 서포터즈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이다. 주변의 곁가지들을 싹 다 지워버리고, 백지상태에서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을 내려보길 권한다. 나는 그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찬성이든 반대든, 이도저도 아니든, 다양한 의견은 나올 수 있지만, 우리의 역할은 거기까지. 마지막에 하고말고는 알라딘 운영진이 결정한다. 이후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운영자 측에서 다시 사람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고쳐 시행할 것이고, 아니면 없애든지, 문제가 없다면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겠지.  내가 보기에도 부작용 발생할 가능성이 많아 보이지만, 이미 지적은 충분히 나왔다. 이제 알라딘 운영자에게 바턴을 넘기자.

 
* 부록 : 예상되는 부작용과 생각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셨지만 생각나는대로 한번 끄적여보면,

첫째, 출판사의 농간. 알바들을 서점에 가입시켜 자기네 책 리뷰가 떴을 때 - 알바가 쓴게 아니어도 - 추천을 누르게 하는 방법. 가능성은 있다. 이 또한 음모론이지만. -_- 그런데 이렇게 하면 금방 티나지 않을까. 해도 한 두번이니 몇번 반복되다 눈치 빠른 님들에게 걸리면, 출판사 완전 쪽팔린다. 앞으로 내는 다른 책에도 신뢰가 가지 않을 것이고. 고로 이건 출판사에게도 그다지 좋지 않으므로 가능성은 낮다.

둘째, 서포터즈 활동원들의 공정성의 여부. 그들이 정말 공정하게 추천을 누를까, 하는 생각. 글쎄 각자의 양심에 맡겨야 할 문제. 나와 친분관계가 있다고 특별히 찍어줄 것 같진 않다. 이 제도가 있기 전에도 적어도 나는 그래왔다. 오히려 어떤 책을 살 때 친한 분이 쓴 리뷰가 있다면, 그 분이 평소에 땡스투를 많이 받는 분이라면, 좀 더 유명한 분이라면, '리뷰가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다른 분께 땡스투를 눌러드렸다. 죄송합니다. 하이드님, 마태우스님, 로쟈님. 또 기억나면 추가.

셋째, 활동원들이 모든 리뷰를 어떻게 보냐, 는 지적. 24시간 내내 새로 올라오는 리뷰만 보고 있을 수도 없고 내 눈에 들어오는 리뷰들 중에서 좋다 싶은 것들을 추천한다는 말인데, 활동원들의 활동시간대는 대략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 야밤에, 새벽에 올라오는 리뷰는 눈에 안띄고 넘어갈 수 있다. 대략 저녁에 올리는 리뷰는 더 눈에 잘 띌 수 있다. 한참 지나간 리뷰까지 봐가면서 걸러내진 않을 것이다. 이미 실시간 대로 올라오는 리뷰도 충분히 많으므로. 가능성 높음.

넷째, 관심있는 분야의 책들만 걸러낼 경우. 서포터즈의 취향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간과 문학, 자기계발, 경제관련 서적 쪽에 몰리지 않을까. 어려운 철학서나 과학서 리뷰를 봐도 뭔말인지 모르고, 읽기도 어려우니까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가능성 높음. 소외되는 영역이 생긴다.

다섯째, 추천만으로 선발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추천을 바탕으로 운영자가 선발하는게 어떨까 싶다. 추천은 참고요소로도 고려하고. 비율을 정해도 좋겠지. 정확히 하기 위해서. 반반으로. 운영자 또한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 모든 판단은 주관적이다 - , 마을 구성원이 선발하는 것과 운영진이 선발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적어도 여러 분들이 걱정하는 친소관계는 개입할 여지가 없으므로. -_- 개인적 친분관계를 가진 분이 알라딘 마을에 거주할 땐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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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2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라는 개인 공간을 사용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알라딘 마을]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곳. 어쩌면 이런 주민들을 품에 안고 있는 [알라딘]은
복 받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웃음) 진심어린 관심과 애정을 이렇게 받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겠죠. 우리가 사는 실제 사회, 마을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
그야말로 이상적인 곳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일목요연한, 그러면서 옳은 소리로 정리한 아프님의 글이 시원하게 맛있습니다.

마늘빵 2007-07-28 15:31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옳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소리'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전 이곳에서 이상향을 꿈꿔봅니다.

로쟈 2007-07-2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주에 서포터즈 신청 메일을 받았는데 능력이 닿지 않는다는 생각에 바로 삭제해버렸습니다. 기억엔 두달 정도 시범적으로 운영해보려는 것 같더군요. 예상할 수 있는 문제점들과 함께 예기치 않은 효과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알라딘으로선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도입해보려는 것일 테니까 나름의 고충도 있을 것이구요. 저도 구상 자체에는 동감하기 어려우나 언제나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있기 때문에 굳이 반대를 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리뷰를 자주 쓰지도 않고 또 많이 읽는 편도 아니어서 사안에 대해 방관하고 있었지만 요즘 '반상회' 같은 분위기인지라 면피성 발언을 적어둡니다...

마늘빵 2007-07-29 11:57   좋아요 0 | URL
하핫. '반상회'란 표현이 재밌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러네요. 한 마을에 있는 주민들 나와서 한마디씩 하고 의견들어보는... 이런. :) 로쟈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알라디너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고, 어차피 알라딘 운영진 측에서 보완하더라도 하고, 폐지하더라도 하고, 하는거죠. 많은 지적이 나왔으니 두고봤으면 합니다.

부리 2007-08-0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있네요!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7-09-09 18:21   좋아요 0 | URL
부리님은 없는데, 0000만 있지 =333
 
서로주체성의 이념 -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 인문정신의 탐구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2월
품절


철학은 자유인을 위한 학문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마찬가지여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를 일으켜 세우려는 겨레만이 철학을 필요로 한다. 자유란 소박하게 말하자면 남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고립된 자기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 속에서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사회와 세계의 부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전체 사회와 세계가 나로부터 소외된 타자적 힘과 권력으로서 나에게 대립한다면, 나는 결국 그 전체에 의해 규정되는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사회와 세계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는 백성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입법자가 되고 주권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분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오직 전체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만 자기의 주인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단순한 분릴와 독립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오직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활동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11-12쪽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요구된다.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가 깨우쳐주었듯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오직 생각 속에서만 열리고 생성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모든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 만약 있는 것들이 오직 물리적 사물들이라면 세계는 그런 사물들의 총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전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들의 절대적 전체는 사물이 아니라 이념이다. 그런데 있는 것은 고정된 사물로서 주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있는 것은 될 수 있는 것이니, 있음은 언제나 될 수 있음이다. 그런즉 세계는 단지 일방적으로 고정되어 주어져 있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동시에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12-13쪽

자유인으로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물의 주어져 있음을 넘어서 모든 될 수 있음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있음의 모든 차원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참된 총체성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하고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13쪽

이른바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은 신념을 가지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이고, 민청학련 사형수 출신의 철도공사 사장은 고속철도 여승무원 문제에서 보듯 그들이 비판했던 자본가들과 한치의 다름도 없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단지 그들 개인의 문제로 돌려 변절이라 비판하겠지만, 사실은 이 모든 위기적 징후가 우리 모두의 정신의 빈곤에서 비롯된 일이다. 우리는 압제에 저항해서 싸우는 일에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준 겨레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는 너무도 게을렀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억압의 사실을 끊어내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다만 싸우고 또 싸워왔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참으로 새로운 우리들 자신의 세계상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도 설계도도 없이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 자기의 집을 지어야 했으니,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유의 빈곤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16쪽

"자아는 근원적으로 정신적 삶의 초기 단계부터 욕동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그 욕동을 만족시킬 능력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 부르며, 또 그렇게 스스로 만족을 얻는 방식을 자기성애라 일컫는다." (프로이트)-46쪽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 자체를 서양적 나르시시즘의 현대적표현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개념을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프로이트에게서 나르시시즘이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자기애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자기애는 한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와 반성적인 관계를 맺으며 더 나아가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에고이스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나르시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방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자기애라도 자기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것은 긍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연민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혐오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에 대한 긍지가 하나의 지속적 성격으로 굳어진 특수한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49쪽

본래적 나르시시즘이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느끼는 자기에 대한 "확고한 긍지"로 나타난다. 긍지란 '위에-있음'의 의식이다. 아름다운에서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긍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은 단순한 대자적 반성이 아니라 대타적 반성의 결과이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되 그것을 남과의 관계, 또는 객관적 비교 가운데서 우월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 이것이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그 우월성의 의식이 긍지인데, 이 긍지는 결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의식이다. 이에 반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일 수는 있으나 결코 긍지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의 나르시시즘은 아무에게도 허락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객관적으로 우월하고 탁월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자기감정인 것이다-54쪽

그렇게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나르시스는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뭇 타인들을 멸시한다. 그리고 이 멸시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은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가 멸시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뭇사람에게 사랑받았으나,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혹되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르시스적 정신은 언제나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와 관계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정신이다. 물론 모든 주체에게는 타자가 있고 이런 사정은 나르시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에게 타인은 진정한 타자적 주체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오비디우스는 나르시스를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 이름이 에코, 곧 메아리이다. 자기의 말을 빼앗기고 나르시스의 말을 단지 어눌하게 반복할 수 있을 뿐인 에코는 서양 정신 앞에서 자기의 언어와 주체성을 상실한 모든 타자적 정신의 은유이다.-54-55쪽

그렇게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떠나지도 못하고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는 나르시스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려는 모든 홀로주체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하여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철학적 관용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주체의 죽음은 주체가 자기 집착의 허망함을 깨우쳐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집착의 필연적 결과로서 일어난 일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결코 스스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하데스로 내려간 나르시스는 지금도 스틱스 강에 하염없이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 것이다.-56-57쪽

"자아의 본질은 자유이다. 즉 자아는 오로지 절대적인 자기권력으로부터 자기를 어떤 사물이 아니라 순수한 자아로서 정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쉘링)-64쪽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표상들의 대상이다. 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산물이다. 나는 나 자신을 만든다. ......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든다." (셸링)

여기서 보듯이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다른 행위가 아니다. 내가 세계로부터 고립된 존재자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오직 세계를 형성하는 한에서 나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며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 나의 주인이 된다. 주체의 자유는 그렇게 자기와 세계를 무제약적으로 형성하는 근원적 행위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66쪽

생각하면 서양 정신이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공포는 바로 이 수동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나와 동등한 타자가 나 밖에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 의해 언제라도 예속되고 수동적으로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수동성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타자적 관계를 지양하는 것은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데, 근대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67쪽

여기서 우리는 서양 정신이 배제하는 것이 타자적 주체이지 타자 일반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타자도 없는 정신은 공허한 정신이다. 그것은 아무런 대상도 없는 생각은 현실적 생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정신은 오직 타자를 대상이나 객체로 삼는 한에서 자기의 존재를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적 정신은 이런 상황에서 타자를 자기화하고 내면화한다. 즉 그것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정립하는 대신, 또는 비슷한 말이지만 모든 타자를 자기의 내재적 계기로 만드는 정신이다.-69-70쪽

서양적 자유의 이념 속에 내재된 배리와 역설은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자적 주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데 있거니와 이것은 현실 역사 속에서는 북미 대륙에서처럼 원주민의 집단 학살과 같은 타자의 절멸로 나타나는가 하면, 이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타자를 자기에게 동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동화가 자기와 타자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 정신은 타자를 자기화하는 만큼 자기 속에서 다시 타자를 정립하는 정신이다. 즉 그것은 자기가 주인이 된 세계 속에서 다시 타자적 관계를 산출하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필연적으로 (반)정립하게 되는데, 이때 자기 속에서 반정립되는 타자는 정신의 타자일뿐 타자적 주체일 수는 없다. 그것은 관념 속에서는 대상화되고 객체화되는 타자이며, 현실 속에서는 도구화되고 노예화되는 타자이다. 그렇게 타자를 자기 속에서 노예화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보편자로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밖에 타자를 남겨두지 않을 경우에 그 타자의 주체성, 곧 타자적 자유 부정하고 타자를 노예화하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온 제국주의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태동한 서양적 자유의 이념의 현실태인 것이다-70-71쪽

서양 철학의 나르시시즘은 존재의 근저에 놓인 이 근원적인 권력을 자기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권력에 참여하고 그것을 전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나와 이질적인 것이라면 나는 결코 그것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도 없다. 오직 존재론적 권력이 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때에만 나는 그것을 나 속에서 따라체험하고 반복할 수 있으며, 또한 그때에만 나는 그 권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정신이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론적인 권력을 바로 자기 자신의 형상 속에서 찾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처럼 존재의 본질적 진리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의 특징이다.-77쪽

신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존재라는 말과 같다. 정신은 인간의 본질규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 정신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본질적 동일성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이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신과 인간의 무차별한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에게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본질적 동일성의 지평 속에 내재적 차이가 정립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신적인 정신은 인간의 정신처럼 자기 밖의 대상을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다. 만약 그런 정신이었다면, 그것은 타자에 의한 수동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정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정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오로지 자기하고만 관계하는 정신 곧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정신이다. 프로이트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은 절대적 나르시시즘의 현실태인 것이다.-89-90쪽

중세철학의 역사는 그 신에서 시작된다.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이 중세의 정신이다. 그것은 사냥에 지쳐 연못가에 와서 물 위에 엎드린 나르시스와도 같다. 그는 수면에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타인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 매혹된다. 그 얼굴은 사실은 남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의 얼굴이었으나, 나르시스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와 사랑에 빠져든다. 바로 이 단계가 중세이다. 그것은 신이 자기 자신의 영상인 줄 모르고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중세철학이 찾았던 신은 고대 그리스 정신이 발견한, 아니 투사한 신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리고 이 차이가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와 성장기를 나눈다. -91쪽

그러니까 인격적인 신에 대해 열광하는 까닭은 신이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므로 내가 신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아짐이야말로 신에 대한 기독교적 열광의 지향점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 겸허나 자기비하의 감저이 신 앞에서의 자기부정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확장과 신격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만약 서양 정신이 마주한 그 타자가 자기와 동등한 상대적 타자였더라면, 자기를 타자와 일치시키려는 열망이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요, 자기가 타자 앞에서 수동성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이 마주한 타자적 정신은 절대적 정신이요, 절대적 주체인 신이었다. 신 앞에서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신에게 일치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내가 신과 하나 된다는 것은 내가 그의 나라와 권력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의 절대화이다. 기독교적 열광은 이처럼 내가 신을 통해 절대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는 데 대한 열광이다. 결과적으로 신에 대한 열광은 자기에 대한 열광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그 본바탕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까닭에 그리도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06쪽

자아의 자유는 자기를 그렇게 주체로서 스스로 정립하는 것에 존립한다. 인간은 주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근대 철학은 바로 이런 자유를 보편화하였다. 왜냐하면 근대 철학이 말한 자아의 주체성은 다른 어떤 경험적 조건도 배제한 순수한 사유의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어떤 차별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질적으로 주체이다. 자유와 주체성의 보편화, 이것이 바로 근대 철학의 영속적인 공적이다-117쪽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자기정립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자기를 정립하는 것만큼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며, 사유의 주체성 또한 단순히 추상적 자아의 정립이 아니라 현실의 능동적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자아는 자기정립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법칙의 입법자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중략 ... 자아가 타율적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그는 타율적 강제 아래 있는 것이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도덕법칙이나 인륜적 법칙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오직 자기가 모든 객관적 법칙들의 입법자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117쪽

근대에 이르면 자아는 절대적 권력을 직접 자기 속에서 반복하고 따라체험함으로써 자기가 그 권력의 주체가 되려 한다. 중세 철학이 신과의 합일 속에서 진리와 자유에 참여하려 했을 때, 진리와 자유의 최종적 실행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은 다만 신과 하나됨으로써, 절대적 권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원리는 나 속에서 직접 실현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 자체로서 존립한다는 어떤 객관적 진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객관적 진리는 소외된 진리일 뿐이다. 진리는 나 속에서 반복되고 따라체험되는 한에서만 진리이다. 절대자는 더 이상 피안의 환상이 아니라 자아 속에 현전하는 현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기도와 은총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자아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는 이제 신의 절대적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과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118쪽

현대적 정신은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아는 초자아와 같아지기를 욕망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도리어 그것에 의해 억압받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만약 그가 자기를 욕망하기를 멈추고,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자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아는 계속해서 초자아에 예속되고 억압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욕망에 휘둘리고 초자아에 억압받는 자아가 바로 우리 시대, 정신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근대적 정신이 생각했던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체의 죽음이다. -129쪽

"의지는 다른 것, 외적인 것, 자기와 별개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을 바꿔 말하면 의지를 의지하는 한에서만 자유이다. 앞의 경우에 의지는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자유란 이것, 곧 자유롭고 의지하는 것이다." (헤겔, <역사철학강의>)-130쪽

내가 인식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내가 잠재적으로 사물의 생성과 존재의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다. 반면에 한 사물이 인식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형성의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가 인식 가운데서 사물의 생성을 반복할 때, 인식되는 그 사물은 생성의 근거와 원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객체가 된다. 물론 인식은 사물을 형성하되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현실공간 속이든 사유공간 속이든 중요한 것은 사물이 자기의 형성의 원리를 타자적 아르케에게 양도하고 객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다. 현실공간에서 사물은 아르케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이 형성에 대응하여 사유공간 속에서 사물은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형성되고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은 수동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인식의 사물의 형성 원리를 모방하고 반복할 때, 그것은 사물을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처럼 사물을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인식을 통해 자아가 얻는 권력인 것이다. -143쪽

서구적 인식에서 인식과 기술은 공속한다. 기술과 인식이 공속하는 한에서 인식의 대상은 동시에 기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기술적 재생산과 조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뜻하는 것인데, 이는 인식의 대상이 기술적 사유 앞에서 객체화되고 사물화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기술은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주체이다. 기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러나 기술 자체는 주관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기술이 객관적 정신의 체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9쪽

법이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명령할 때, 그것은 타율적 강제의 체계이다. 그러나 내가 법에 동의할 때, 법은 나의 주관적 의지의 보편화이다. 그리하여 내가 동의하는 법에 복종할 때, 그것은 내가 타율적 강제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자율성의 의미이다.
-151쪽

자유는 처음엔은 개인의 의지의 자율성으로 발생하지만 개인적 자유는 언제나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된다. 개인적 자유를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인간은 법의 주체가 됨으로써 보편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 자유와 권력을 향한 욕구에 한계가 없듯이 법의 적용 범위에도 한계는 없다.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아는 무제약적인 보편적 법의 주체가 되려 하고, 이에 따라 법의 외연은 시민법에서 국제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계시민법의 이념을 향해 끝없이 확장된다.-152쪽

"네가 외적으로 행위할 때, 너의 자의의 자유로운 사용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

법은 자유의 현실태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운 만큼 타인의 자유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법은 나의 자유의 현실태인 만큼 타인의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법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 사람의 행위의 합법성은 각자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만 확보된다. 칸트의 저 말은 이런 법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법은 모든 주체들을 동일화한 뒤에, 그 주체들 사이에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권리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이를 통해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154-155쪽

우리는 오직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할 때 온전히 자족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 ... 중략 ... 이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욕망이 무제한적인 만큼 소유에 대한 욕망도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자유의 원리가 보편화된 만큼 소유의 권리도 보편화된다.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는 공존할 수 있어야 하며, 나의 소유가 타인의 소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공존과 균형의 원칙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중략 ... 그러나 소유가 강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교환에 의해 주고 받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소유 가능성은 교환 가능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제약적인 소유 가능성은 무제약적인 교환 가능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하게 만드는 보편적 교환의 지평을 산출하게 된다.-158쪽

그렇다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홀로주체성이라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주체성을 타자와의 만남, 특히 인격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사유하는 일이다. 나의 주체성이 너와의 만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온전히 생성되고 정립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스적 홀로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수행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학이 지금까지 참된 주체성이 무엇인지를 물어왔던 것처럼 참된 만남이 무엇인지를 같이 물어야만 한다. -167쪽

선험론적 철학은 나의 존재든 세계의 존재든 그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믿음을 거부한다. 모든 존재 주체의 활동을 통해 개방된다는 것이야말로 선험론적 철학의 근본 통찰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칸트에 의해 기초가 놓인 선험론적 철학의 길을 따른다.-168쪽

우리의 과제는 헤겔이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만남 속에서만 생성되고 정립되는 주체성을 참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일이다. 주체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이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는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이란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과제이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기성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체성이 본질은 오로지 활동에 있다.-172쪽

서양 정신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은 채, 타자 없는 자기 관계 속에서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도리어 주체의 죽음에 이르게 되고 이런 위험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공속을 생각하게 만드는 배경이라면,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기를 자유로운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역사를 살아오면서 지속적인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정신적으로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왔던 까닭에 자기를 온전히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것이 수동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배경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서양 정신은 타자적 정신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자기가 먼저 있었으니, 그 자기의 아성을 타자적 주체를 향해 해체하고 개방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처음부터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민족이요, 그 결과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 겨레는 통일된 나라를 형성한 이래 한 번도 타자에 의해 강제되는 수동성의 굴레를 벗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동성에 빠져 있었던 겨레에서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176쪽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정신의 자기상실이다. 생각하면 자기의 철학이 없는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다. 철학은 자기인식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반성이다. 그러나 한민족은 자기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자기의 언어로 반성하는 일에 너무도 게을렀다. 기존의 세계관이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렸을 때 이 나라의 주류 철학자들은 스스로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기보다는 대개 남의 철학을 수입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수입된 이래 이 나라의 철학은 언제나 수입된 철학이었다. 불교가 쇠하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성리학이 쓸모없어지면 서양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이 나라 철학사의 지배적 경향이었으니, 그렇게 수입한 남의 철학에 주석을 다는 것이 이 나라 대다수 철학자들이 한 일이었다.-179쪽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생각의 총체성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세계관이라 부르는데, 이런 세계관을 기투하고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사유의 총체성 속에서 경험을 통일하고, 이를 통해 온전한 의미에서 세계를 통일된 경험의 지평으로 개방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세계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생각의 활동을 통해서 정립되는 이념이다. 철학은 비어 있는 총체성의 이념인 세계를 구체적 규정 속에서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다. 주체는 그런 철학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세계가 자기의 세계인 한에서 주체는 그 세계의 주인이다. 그런즉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자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먼저 자기의 철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181쪽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주체성이란 단순한 논리적 자기동일성의 의식이 아니라 총체적 인식체계로서 세계관을 스스로 정립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든 그들도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구성된 연속적인 세계관이 아니다. 개항 이후 서양의 온갖 철학과 세계관이 밀려 들어온 뒤에 한국 땅에는 너무도 많은 세계관들이 중첩되어 있는 까닭에 단절 없는 잘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의 지평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는 잘 구성된 연속적인 자기 또한 없다. 한국인에겐 자기가 그 자체로서 타자성의 총체이다. 이 타자성 속에서 한국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통스럽게 단절과 불화를 자기 속에서 경험해야만 하며, 결과적으로 온전한 주체로서 행위할 수도 없게 된다. -18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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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7-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추천받아서 읽고 있는데, 제가 아는게 없어서 쉽게 읽히지 않아 반쯤 읽고 덮어두고 있었는데.. 님 밑줄보고 다시 봐야겠단 용기가 생겼어요 ^^; 물론 여전히 제겐 쉽지 않겠지만..^^

마늘빵 2007-07-23 00:41   좋아요 0 | URL
아 제이드님 저도 이거 힘들게 읽었습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텍스트에 밑줄을 치고픈 욕망이 가득해집니다. 이 책 한권이 정말 많은걸 깨닫게 해줬습니다. 전 종교는 없지만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느낄 때의 그런 '마음이 밝아짐'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 책 완전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겠습니다. 이거 밑줄긋기 옮겨 치느라 죽는줄 알았습니다. 휴.

2007-07-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속닥님 네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넷 2007-07-23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지난번에 밑줄긋기로 올리지 않으셨어요?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엇, 아닐텐데요. -_- 제가 비공개로 계속 꾸준히 치면서 축적해온건데, 언제 한번 중간에 살짝 공개된 적이 있었나봐요. 그때 보셨나보다. :) 이게 완성본이에요. 다 읽었어요.

비로그인 2007-07-2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찬찬히 읽어두어야 할텐데 서재에선 이런글 같은데에 책갈피 꽂아두는 것같은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ㅜ..ㅠ

마늘빵 2007-07-23 20:18   좋아요 0 | URL
어 있잖아요. 찜기능. 저는 좀 오래 씹으며 읽어야 할 페이퍼나 리뷰들은 찜해놓고는 제 서재에서 열어보곤 합니다. :) 곱씹어 읽고 읽다 멈춰 사색할 문장이 많아요. 최근 이슈들과도 연관해서.
 


  동의, 다산부대 철군 조기 확정한다고 한다. 동의, 다산 부대는 아프가니스탄에 2002년 2월과 2003년 2월에 파견돼 의료지원과 건설지원 활동을 수행하는 비전투부대다. 탈레반과의 협상 때문에 철군을 조기 확정한거 같은데, 당장 철군하는건 아니고, 철군하는데는 5-6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탈레반이 이 정도를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샘물 교회 신도들의 피랍 때문에라도, 철군한다니 환영이다. 제발 좀 미국입김으로 미국이 침공한 이슬람 국가에 뒷처리반으로 군대 좀 보내지마라. 탈레반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알아서 자체적으로 철군을 결정했으면 오죽 좋았으랴만 정부는 언제나 뭔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니 원. 



출처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224080.html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다산부대 윤장호 하사가 폭탄테러로 숨진 뒤 “국가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때로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인류 사회 속에서의 국가의 도덕적 의무를 위해 국민들에게 위험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인다고 해도, 한국의 해외파병이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인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인류사회 속에서 국가의 도덕적 의무를 위한 것인지 의심이 간다. 어느 하나 모양새가 맞는게 없단 말이다. 한국군이 가 있는 지역을 보면, 죄다 미국이 일단 치고 쑥대밭 만든 지역이 아닌가. 이게 뭐 사건 다 터뜨리고 나서 뒷처리하는 용역업체지 무슨 국민의 안전과 이익과 도덕적 의무를 위해 파병한 군대라고 볼 수 있나.

  노무현 대통령이 정말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이익과 도덕적 의무를 위한다면 지금 파병한 군대 다 불러들여야한다. 오히려 해당국가에 독이 되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더불어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고 친구라면 가서 좀 설득해라. 제발 좀 깡패 노릇 좀 그만하라고. 뒷처리하는 것도 힘들다고. 그냥 조용히 살자고. 그러면 위에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셈이 될게다. 괜히 돈들여서 나가네 마네 싸우지들 말고 깔끔하게 부시를 설득해라. 그게 제일 빠르다.




관련 페이퍼 :
http://blog.aladin.co.kr/drumset/1436687 

관련 기사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224061.html (철군확정)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224080.html (들러리 파병 안된다)


 * 이거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거라는군요. 지금 장난해? -_- '조기철군확정'이 아니라 '철군조기확정'이었다. 어떤 단어를 먼저 쓰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의미가 달라진다. 원래 예정되었던 일을 뭐 새삼스레 새로 발표한 것처럼 이런담. 한명 죽기전에 얼른 군대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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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3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3 20:17   좋아요 0 | URL
아 속닥님 이런 재치덩어리. 노무현 대통령이 그 영화를 봤을리 없잖아욧. 쌓인 현안에 매일같이 고민이 많으실텐데. 그나저나 저는 영어문맹이 완전히 된 줄 알고 있었는데, 그 문장은 한 눈에 들어오는걸요.
 


  19일 오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인근의 가즈니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한국인 20여명이 탈레반으로 추정되는 반군세력들에게 납치됐다. 여기에는 분당 샘물교회 신자 19명과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2명 등 모두 21명이 포함되어있는데 이들이 탔던 빈 버스만이 남겨진채 모두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었다.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탈레반 측의 주장과 한국 공관의 주장이 다르지만, 어떤 것이 사실이냐를 따지는건 여기서 중요한 건 아니다. 탈레반 측은 "우리의 무자헤딘이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으며, 이들의 운명과 관련해선 우리는 탈레반 평의회의 결정에 기초에 행동할 것"라고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이후 탈레반은 오늘 오후 5시까지 탈레반 수감자 23명을 석방할 것, 그리고 현지에 주둔중인 한국군을 철수할 것을 이들의 생존 및 안전을 위한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대부분 기사를 통해서 밝혀졌지만, 이 시점에서 궁금증을 해소하고 넘어가면, 첫째, 이들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갔는가. 분당 샘물교회 소속 신도로 알려진 이들은 예전 故 김선일씨와 마찬가지로 선교활동을 하러 갔다. 교회측과 가족들은 봉사활동하러 갔다고도 하는데, 말이 봉사활동이고, 내용은 선교활동이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저 먼 곳 아프가니스탄까지 간 건데, 왜 하필 아프가니스탄이냐. 매일 같이 오로지 성경책만을 읽고 있다는 미국의 부시대통령에 의해 폭격맞아 기독교라면 치를 떨 그들을 대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니 말이 되는가.

  기독교인들께서 들으면 불편하시겠지만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활동을 보고 있으면 지극히 미국적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진리요 선이니 무지한 너희들을 일깨우리라,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으시라, 오로지 유일하게 우리를 구원해주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라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비종교인 및 타종교인들을 대상으로 작업(?)하려 든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대상으로 미국식 정치체제와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제제를 가하겠노라고 선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만이 옳고 너희는 틀렸다, 라는 생각은 반드시 충돌을 불러올 수 밖에 없고, 어느 한쪽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지 않는한 양자 모두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더불어 한쪽의 절대적인 힘 또한 다른 한쪽을 무참히 밟아버리는 사태를 불러온다. 자기들은 좋은 의도에서 그랬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이들 입장에선 테러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국외선교 열기는 대단하다. 지구상에 이들이 활동하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국외 선교 초기인 1970년대 말 100명도 안되던 선교사는 1만 2874명(2004년기준)으로 늘었다. 4만 6천명인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3위인 영국의 갑절이나 된다. 개신교 선교단체가운데는 2030년까지 신도 600명당 1명의 선교사를 파견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선교 1위 국가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말하는 곳도 있다. 특히, 복음주의 교회들은 선교사를 얼마나 많이 파견했는가, 얼마나 두메에 파견했는가를 놓고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인구 수천명에 불과한 조그만 도시에 수십명, 또는 수백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몰려, 곳곳에서 한국 선교사 사이의 마찰이 빚어지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카불에서 봉사했던, 한국제이티에스의 유정길씨는 "선교 단체들이 심지어 무슬림 사원에서 통성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을 공표하기도 했다"며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모두 개신교 선교사로 인식돼 한국인들이 테러의 표적이 떠올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이상 2007년 7월 21일자 한겨레 신문 기사 인용) 

 참으로 대단한 열정과 노력과 경쟁심이다. 이런 열정과 노력과 경쟁심을 왜 좋은데 안쓰고 다른 엉뚱한 곳에서 발휘를 할까 모르겠다. 하긴 저분들은 다른 무엇보다 저것이 가장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하실테니 말 다 했지. 미국 국민 수와 한국 국민 수, 미국 개신교 신자숫자와 한국 개신교 신자숫자가 엄연히 하늘과 땅 차이일텐데 미국을 제치고 1위를 하겠다고 온갖 지역에 신도들을 보내다니 목사님들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크고 크시다. 이런 경쟁은 없을까. 국내 양노원, 고아원, 어린이집 등등의 온갖 시설에서의 봉사시간에 대한 경쟁, 혹은 교회가 아닌 성당이나 절과 연대해서 함께 봉사하는 시간에 대한 경쟁. 이런 경쟁 있으면 참 좋을텐데 말이다. 한국 사회는 너무 쓸데없는데에 경쟁심을 쏟아붓는다. 한국의 대학은 미국이 선정하는 세계 100대 대학 안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한국의 교회는 - 물론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 해외파견 선교사수 1위를 하려고 애쓰고.

  목표가 잘못 설정되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도 잘못된다. 목표설정과 목표를 달성하기까지의 과정, 이때 주의해야 할 점 등등은 분명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나 볼 수 있는 - 사실 굳이 교과서에 실으면서까지 가르칠 필요도 없는 - 아주 기본적인 부분임에도, 언제나 기본이 안되어있기에 문제는 발생한다. 제발 좀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곳에서, 도움을 원하는 곳에서, 그들의 열정과 노력과 경쟁심을 발휘해줬으면 한다. 기독교에 반감가지고 있는 국가들에 가서 선교해봐야 반감만 더 커진다. 가서 최소한의 뭔가라도 건져오려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접하고 오던가. 안티 크리스트를 키우고 싶거든 지금처럼 하고 하느님의 좋은 말씀을 전하고 싶거든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를 해야할 것이다. 

  둘째, 탈레반은 왜 한국인을 납치했는가. 한국인 뿐 아니라 현재 독일인도 납치되어있다고 하고, 중국인을 납치하려고 계획중이란 기사를 봤다. 인종과 국가를 넘어서서 탈레반은 납치를 감행하고 있고 목적은 자신들의 형제들의 석방과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국가들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납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프간에 주둔한 한국군 200여명이 재건을 목적으로 그곳에 있다고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건 그들에겐 침략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거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 그들이 한국을 지배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던가를 생각해보자. 비록 우리가 아프간을 점령하고 있는건 아니라 하더라도 미국의 우방세력으로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이 미국과 다른 나라라고 해서 아프간이 우리를 달리 보진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미국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

 나는 이참에 아예 정부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면 한다. 우리가 아프간의 무장세력에게 굽히고 들어간다는 식의 이기고 지는, 모양새의 문제를 따지지 말고 깔끔하게 철수하자. 괜히 또 우물쭈물 하다가 내일 아침 피랍된 이들 중 한 명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갔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지금 이 같은 사태로 몰고온 그들이 밉기는 하지만, 일단 살리고 봐야하지 않겠느냐. 아프간의 재건이 우선이냐 - 사실 순수하게 '재건'으로만 보기도 힘들지만 - 아니면 한국민의 안전이 우선이냐. 정부는 이런저런 요령 피울 생각말고 이들을 속히 한국땅으로 데리고 와야한다. 또 이후 피랍된 이들로부터 공개 사과를 받아야한다. 그들에게 법적인 처벌까지 가해야한다는 네티즌들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하고, 하지만 분명 공개적인 사과는 받아야한다. 그것은 이곳에서 당신들을 걱정해준 한국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 기독교 신자들께서 글이 불편하셨을 수도 있는데 모든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와 이쪽 계열의 기독교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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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7-07-2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학법 재개정하라고 *랄 *광하던 한개총 쓰레기들은 이번 사태에는 입 싹 씻고 찌그러져 있더군요. 하여튼 기독교고 이슬람이고 광신도들은 하루 빨리 천국으로 가주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그리고 인질 구출에 들어간 비용은 전액 핏물교회에 보상 청구해야죠.

마늘빵 2007-07-22 18:53   좋아요 0 | URL
굶자님 / 크흣. 그러게요 한기총이 이럴 때 조용하네요. 맨날 온갖 사건에는 다 기웃거렸었는데 정말로 이번에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군요. 인질 구출 비용도 상당하겠죠. 엄청날거에요. 교회를 팔아서라도 정부에 보상해줘야합니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지만. 그나저나 탈레반이 예고했던 시각이 지난거 같은데... 불안합니다. 정부는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고. 쩝. 그 사람들이 돌아와야 보상금을 받아내던, 대국민 공개사과방송을 하던 할텐데요.

stella.K 2007-07-22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에 대해 쓴 것에 관해서는 아프님의 견해가 틀리지 않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이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도 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선교인들끼리 싸우는 것도 기독교인이라서라기 보단 우리나라 사람의 인간성(?)뭐 그런 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물론 그 부분을 기독교가 깨뜨리지 못하고 역이용하려는 것은 유감이죠.
하지만 요즘 진보와 보수가 하나 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있을거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번에 납치된 기독교인들, 그들은 전략상의 실책을 범했을 거라고 봅니다.
이미 뉴스 보도에도 나온 것처럼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기 보단 구호를 위해서 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만큼 그렇게 아둔하거나 오만하지 않습니다.
아프님 저리 쓰신 것에 대해 불편하다기 보다 세상에 알려진 기독교에 비해 또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들의 무사귀환을 바랄뿐이며, 혹시라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의 하나 우리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면 기독교측에서 순교니 떠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귀환한다면 영웅이니 떠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래 줄런지 저도 약간은 우려되는 바입니다.

마늘빵 2007-07-22 18:5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그래서 오해하실까봐 맨 아랫글을 달아놓았습니다. :) 제 주변에도 기독교인들 무지 많습니다. 철학과를 다녀서 그런지 제가 다닌 학교의 철학과엔 목사님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의 철학과가 그 경로라고 하더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유일하게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두 선배 중 하나는 강남쪽 어느 교회에 강도사(?)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자주 - 저는 싫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아요 - 집으로 엽서를 보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엽서를. 학창 시절 그 선배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고, 그 분 또한 이에 동의했답니다.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언질해주셨고, 저 또한 모든 기독교가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샘물교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갔건, 봉사를 목적으로 갔건, 명백한 것은 정부의 수차례의 자제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봉사라고 보기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한 봉사라는건 받는 대상이 기꺼이 원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봉사라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봉사일 뿐이죠. 일단 빨리 돌아오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넷 2007-07-2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나쁜 것만 배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는 하네요. 이것 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살리고 봐야죠.

다들 살아왔으면 좋겠어요.

마늘빵 2007-07-22 20:09   좋아요 0 | URL
네 일단은 살아돌아와야죠. 그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주의를 주고 말린 정부와 국민들에게 사과하기 위해서라도 살아돌아와야합니다. 아직까지 정부가 아무런 발표를 하지 않고 있네요 그나저나.

꼬마요정 2007-07-2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살아돌아와야 할텐데요...
이제 정말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활동 하러 안 가겠죠?
음.. 그리고 제발 주말에 확성기로 찬송가 부르고, 아이들 동원해서 전단지 안 나눠줬으면.. 하구요...

제 친구는 교회에 정말 열심히 다니는데, 다른 종교 다 인정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내 놓고 배려도 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던데... 그런 사람들도 많을텐데 왜 이런 일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주제가 엇나갔지만.. 어쨌든 부디 살아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마늘빵 2007-07-22 21: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엇나갔지만, 주말에 애들 전단지 나눠주고, 길거리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갈지어다, 라고 외치는 아저씨, 아줌마들 제발 그만 좀 했으면 좋겠군요. 우리는 아프간의 탈레반처럼 그런 사람들 납치해다가 협박하진 않지만, 그런거 정말 못견디겠더군요. 지하철에서도 그런 분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같은 지하철 안에도 몇 명씩 만나는데, 견디기 힘듭니다.

Mephistopheles 2007-07-2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광적인 기독교인들은 더이상 기독교가 아니에요..
마치 청말의 백련교를 보는 듯 합니다.

마늘빵 2007-07-22 21:14   좋아요 0 | URL
다른 좋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욕먹이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간에서는 '한국인=선교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더군요.
다른 한국인들까지도 싸잡아 욕먹는 짓 하고 있습니다.

가을산 2007-07-2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물교회 덕에 저와 남편이 정말 몇 년 만에 사회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맞았습니다.
아프락사스님과 같은 논조지요.
이참에 "철군"이나 되었음 합니다.

마늘빵 2007-07-22 21:16   좋아요 0 | URL
앗, 가을산님 옆지기님과 의견이 잘 안맞으시나보군요. 저는 배우자가 그렇다면 좀 힘들거 같습니다. 대개 비슷하면서 가끔씩 엇나가면 괜찮겠지만. 좋아하는 누군가와 의견이 맞을 때 기분이 좋더라고요. :)

이매지 2007-07-2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기독교인들의 그 집착이라고 해야할지 강한 신념이라고 해야할 지 그런 게 무서워요. 자기와 같은 종교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든 구원해야할 상대로 생각하고. 제 친구 중에도 몇몇 그런 녀석들이 있는데 그 문제때문에 결국엔 틀어지게 되더라구요. 물론 뭐 아프님 말씀처럼 좋은 기독교인들도 있지만요. 전 저렇게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는데 힘쓰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정말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지부터 묻고 싶어요.

마늘빵 2007-07-22 22:05   좋아요 0 | URL
네 모든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들로 인해 다른 기독교인들까지 싸잡아 비난받아서는 안되죠. 우선 그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 이죠.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지. 하느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말이죠. 일단 이들은 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작업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겠죠.

paviana 2007-07-2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제 동생이랑 한 말이랑 비슷해요.아프간까지 가서 봉사활동이라니 우리나라 달동네에서는 한번이라도 하고 간건지 모르겠다.왜 하고 많은 나라중에서 정 하고 싶으면 아프리카도 있는데 왜 아프간인지 모르겠다라고 했거든요.이래서 알라딘이 좋아요.
저도 이왕에 아프간에서 철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마늘빵 2007-07-22 23:42   좋아요 0 | URL
다행히 지금 철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다음달부터 철군시작해서 올해말까지 끝내겠다고. 뭐 그렇게 오래걸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거라도 다행입니다. 이참에 이라크와 레바논 등에 있는 군부대도 다 철수시켜야할텐데요. 샘물교회 신도분들이 의도치 않게 또 이런 좋은 결과를 끌어내주시니 고마워해야하는건가? :) 일단 얼른 살아돌아와야지.

Mephistopheles 2007-07-23 00:40   좋아요 0 | URL
예 아마 오래 걸릴 껍니다..^^
비전투군이고 의료부대가 전부이지만 그동안 그곳에서 행해진 의료활동덕분에
처리하고 마무리해야 할일이 제법 많을 꺼에요. 오히려 전투인원들이였다면
더 쉽게 철군이 이루어졌을 껍니다.

하이드 2007-07-2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에 올해말로 철군 예정 되어 있었는데요;;

마늘빵 2007-07-23 00:03   좋아요 0 | URL
-_- 그럼 달라진게 없군요. 어차피 그리될거였네요? 정부가 머리쓰는건가. 꼼지락대면서.

2007-07-23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3 00:33   좋아요 0 | URL
속닥님 / 이런 정말 오랫만에 접속하셨군요!!! 도대체 어디 가 계시는겁니까아. 그렇죠.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왜 자꾸 기독교 전체의 움직임이 이런식으로 보이는건지 의문이 듭니다. 복음주의를 모토로 삼지 않는 다른 기독교인들은 어디에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군요. 그같은 이들에 비해 세력이 약해서 숨어있는걸까요. 왜 아프간 파병이나 피랍 사건에서도, 기타 다른 복음주의 세력들이 정치적 메세지를 흘리는 때에도, 그 좋은 다른 기독교인들은 침묵을 지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간과하고 있던 새로운 의문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sweetrain 2007-07-2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교인인데요, 요 며칠 진짜 저 사람들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알라딘은 그나마 글이나 댓글수준이 양호한데, 다른데서는 아주
평소 기독교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갖고 계시는 분들까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더군요. (개독교는 그 사람들이 하는
욕 축에도 못듬;; 아주 악마라느니 사탄이라느니...
근데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랑, 극성스러운 교인이랑
대체 뭐가 그렇게 다를까요. 남한테 상처주는건 똑같은데.)

저도 한국 교회의 많은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으로 저 사람들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정부에서 그렇게 지속적으로 말릴 때,
아프간에 가지 않는게 하나님 뜻이라는 생각은 못 해본건지,
정말 열심히 몇년간 지속적으로 봉사하신 선교사님들에게
피해주는 행동이라는 생각은 못 해본건지,
자신들로 인해 피해입은 교인들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암튼...참 돌아와서 무지하게 쳐 맞아야죠. 저사람들.

그리고 알라디너분들도 기독교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건 좋은데,
기독교 교리나 신앙, 하나님,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풍자하거나 비방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아프락사스님이 그러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마늘빵 2007-07-23 08:56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점들을 생각했다면 그 분들은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겁니다. 오로지 그분들에게 중요한건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거였겠죠.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피해준다는걸 이제는 깨달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들의 행동 또한 문화적 테러임을.

stella.K 2007-07-2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앞으로 이런 글은 가급적 자제해 줬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습니다. 정말로 아프님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말이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쓴다면 말릴 수야 없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피랍된 그들의 입장이 아닌 이상 함부로 말하는 건 넌센스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라고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놓였는데 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데, 이것을 가지고 기독교 선교 비난 우논하는 우린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지금쯤 그들도 많은 부분 실책을 인정하고 있을 겁니다. 실수는 누구든지 합니다. 그것이 선교라는 것에 덧씌워져서 이런 말만 많은 공론을 계속 해야 하는 건지 의문스럽군요.

그리고 아는 선배가 강도사라니 성경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있다는 데 그게 뭔지 물어 보세요. 그럼 친절하게 잘 가르쳐 줄겁니다.
그리고 봉사에 대해 말했는데,
과연 아프님이 아프가니스탄의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봉사는 원할 때만 와서 해달라고? 봉사를 원치 않는다는 건 탈레반이겠지요. 그 놈들 때문에 정작 아프간의 난민들은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 가족이, 내 이웃이 죽어가고 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일텐데, 그때도 우리가 원할 때만 와서 봉사해달라는 말이 나올 수 있나요?
아프님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겠습니까? 봉사나 도움은 상대가 원할 때만 하라고?
물론 그들의 봉사가 얼만큼 순수한지, 아닌지에 대해 누구도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하지만 짦은 기간이나마 양민들을 돕고 싶어했을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이 되보지 않는 이상 뭐라고 비판을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다 못 살고, 못 먹는 나라에 가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거라고 보십니까?
그들도 인간입니다. 편하게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난, 아프님이 선교사님을 예쁘게 봐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님의 이런 글이 순수하게 봉사하는 선교사님들에게 누가 될까 걱정스럽고, 많은 부분 저 위에 쓰신 스윗레인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본의 아니게 격해져서 길게 쓴 점 양해하길 바랍니다.

마늘빵 2007-07-23 13:09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제 글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신거 같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다시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안티크리스트도 아니고, 그런 입장에서 서술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양한 의견은 나올 수 있습니다만,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 라는 식의 관점은 지양해주셨으면 합니다. 글이 많이 불편하셨나본데, 저는 순수한 기독교인에 대해서 뭐라하는게 아니라, 복음주의에 따라 세력을 확장하려드는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들의 의도를 곡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요. 하지만, 지금 드러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그렇게 말리고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서 '봉사'를 - 처음엔 '선교'라고 했다가 나중에 '봉사'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 하겠다는건데, 하느님의 진실된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러 갔다고 생각하기에는 밝혀진 사실에 비춰볼 때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sweetrain 2007-07-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지금 샘물교회가 하러 간 것과 같은
아프간 선교는 결사 반대합니다.
이미 한국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5명의 아프간 사람이 살해됐습니다.
그리고 선교단이 들어가 봉사한 마을의 주민들이
그 선교단과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탈레반에게 많은 괴롭힘을 받죠.

이게 과연 진정한 봉사고 진정한 선교일까요?
이 선교단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해버려서
아프간에서 이미 오랜시간 헌신하며 봉사하시던
정말 헌신적인 선교사분들까지도 설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전 한국교회가 젊은이들 데리고 단기선교 가서
다른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행동하게 하는거 반대합니다.

마늘빵 2007-07-23 14:08   좋아요 0 | URL
단비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애초 의도가 봉사였건 선교였건, 본인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아프간 민간인은 이미 살해당했죠. 주변의 많은 민간인들 또한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겠죠.

stella.K 2007-07-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글도 다시 읽어 줬으면 하는데요...옳고 그르다는 논점으로 보입니까? 물론 아프님의 글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댓글 단 사람들이 각양각색인지라 저도 한 말 더 보탯을 뿐입니다. 그리고 언론. 사람의 말. 얼마나 믿습니까?

마늘빵 2007-07-23 14:07   좋아요 0 | URL
이점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안티크리스트도 아니고, 기독교에 특별한 감정도 없으며, 단지 이 사건만을 놓고 바라봤다는 점을요.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복음주의'라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비로그인 2007-07-23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글 너무 속시원해요.

마늘빵 2007-07-23 20:14   좋아요 0 | URL
아 이게 속시원하면 안되는데;;;
그러지마시고 다른 관점에서 딴지를... 좀.

깜소 2007-07-23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하는 글입니다 지나친 복음주의 때문에 모든 종교가 멍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종교인이었으나 지금은 아닌 이유도 지나친 복음주의때문이었으까요..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마늘빵 2007-07-23 20:4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지금은 사이가 좀 멀어진 제 친구녀석 하나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저를 데리고 가기도 했었지만 몇년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님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따라 교회에 나갔고, 나가지 않자, 어머니께서 잔소리를 많이 한거 같은데, 자기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고 더 이상 다니지 않더군요. 자주 출몰하며 의미있는 댓글 - 의미없는 댓글도 환영입니다 -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깜소 2007-07-23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리고 저는 뉴스에서도 처음 접할때 의료 봉사를 하러 갔다고했고 선교단이 아니라 봉사단이라 들었기에 과도하게 신앙심을 내비치는 봉사단은 아니었을거라고 믿어집니다 모든 분들이 무탈하게 살아서 돌아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번일로 상처받는 분들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마늘빵 2007-07-23 22:11   좋아요 0 | URL
알라딘 내에서의 제 글을 시작으로, 그래도 다양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었는데, 끝마무리가 안좋을거 같습니다. 조금씩 조심해줬으면 좋겠는데...

다락방 2007-07-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름을 잘 따라가질 못했어요. 그래서 이 페이퍼를 지금에야 봤구요.
제가 기독교라고 말하면서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유가 깜소님과 같고, 기독교보다 복음주의가 문제라는 아프님의 생각에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단은 그들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먼저이겠지요.

논쟁에 관해서라면,아프님 말씀처럼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들어보는 것은 좋지만, 그럴때마다 상처받고 서재를 접는 것이 반복되어 우울해져요.

마늘빵 2007-07-24 10:57   좋아요 0 | URL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서술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조심하고 주의를 한다면 이런 일은 없을텐데 말이죠. 어디선가 들은 이런 말이 생각나는군요. 토론이란건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 뿐이다. 억지로 의견을 조율하고 하나로 통합하려하면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요. 어디서 들었지...? -_-a 토론을 의도하고 쓴 페이퍼도 아니고 그냥 현안에 대한 제 생각을 서술했을 뿐이었는데, 방향이 이상한데로 가고 있습니다. 근데 예전 1.0서재처럼 '알라딘마을'이라 해서 페이퍼들 총집합하는 그런 곳은 이제 없나봐요?

2007-07-24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4 23:17   좋아요 0 | URL
속닥님 / 그거까진 알겠는데 '화제의 글' 나오는 데를 몰랐어요. 없는줄 알았는데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알라딘 서재' 클릭하면 나온다는걸. 전 여태 거기 마우스 갖다댔을 때 뜨는 메뉴들에만 들어가봤어요. -_- 바보같이.

비로그인 2007-08-30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0??? 난 11 ㅋㅋㅋㅋㅋ

마늘빵 2007-08-30 12:40   좋아요 0 | URL
이런 발칙한 테츠님! 크크.
 


  신정아 사건과 관련해 떠오른 기억 하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게 오랫동안 학력을 속이셨다. 아버지는 연세대 성악과 중퇴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이화여대(?) - 하여간 무슨 여대 -졸업하셨다고 거짓말 하셨다. 둘째 큰 아버지가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마친 뒤 서울 모 대학에 성악과 교수로 부임하셨으니 셋째인 아버지가 대학을 다니기엔 집안이 힘들었을 것이고, 돈이 부족해서 다니다가 그만두셨나보다 라고 자연스럽게 추론했고, 어머니의 경우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난 그게 거짓말이란걸 알았다.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두 분의 대화를 엿들은것도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학벌과 학력을 속이리란 생각을 해본다. 비단 이건 우리 부모님만의 문제는 아니지 싶다. 특별히 나의 부모님이 도덕성이 떨어져서는 아닐테다.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 좋은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돈이 들어오는 것도,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님에도 왜 거짓말을 했을까. 자식에게 뭔가 있어보이려는 만들어진 떳떳함과 이만큼 열심히 노력해 자수성가한 분들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싶으셨을게다. 보통 자식은 부모님을 닮아가기 마련이고, 부모님이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까지 졸업하셨다면, 자식으로서도 주어진 환경 탓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니 이런 점을 노리고 거짓말을 하셨을게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기대대로 학창시절 공부도 곧잘 했으며,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떠올려봐도 초중고 12년 중 적어도 10년은 근면성실하고 부지런한, 부모님과 선생님이 원하는 바로 그 모범생의 전형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나의 근면성실함이 이같은 거짓말로부터 나온 모방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본래 나는 매사 조심스럽고 수줍음 많았으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순하고 복종적인 아이였다. 우연하게도 부모님의 거짓말을 안 시점과 내 성적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린 시점은 일치하지만, 이건 우연일 뿐이다. 거짓말을 알았을 때에도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진 않았고, 그저 왜 거짓말을 했을까, 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후에도 알아챘음을 티내지 않았다. 

  글쎄 다른 나라에서도 자식에게조차 부모가 학력을 속이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학력이란 특별히 어떤 떡고물이 떨어지는 상황이 아니어도 이렇게 일상에서조차 '필요' 요소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부모님이 학력과 학벌을 속임으로써 얻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부모님에 대한 신뢰도만 떨어뜨렸을뿐. 두 분의 위조된 학력으로 인해 내가 공부를 특별히 더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거짓말에 따른 긍정적 효과는 없었던 셈이다. 

  학력과 학벌은 자식조차 속이고픈 부끄러운 부분일까. 그 시대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두분은 남들하는 만큼은 따라한 셈이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졸업한 상업고는 당시 꽤 이름있는 고등학교였다고 하니 굳이 속이지 않으셨어도 되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그렇게 부끄러우셨나보다. 학력과 학벌 위조는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기 위해서, 돈많고 지위높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도 발생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도 이루어진다. 당신들의 자녀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도 쓰인다. 자라면서 우리 부모님은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부모형을 따르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이런 민감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더군다나 타인에게는 털어놓는 일이 없으니,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례는 알 수 없으나, 일반화시켜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관련글 : http://blog.aladin.co.kr/drumset/143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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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07-07-2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집안형편이 많이 어려우셔서 학교를 별로 못 다니셨어요. "학교에서 물으면 엄마는 중졸, 아빠는 고졸이라고 말해라." 라고 일러주셨죠. 요즘도 학교에서는 새학기마다 부모님의 학력과 경제적인 형편을 조사하나요? 냉장고 있는 집. 에어컨 있는 집. 자가용 있는 집. 손들어 보라고 그랬었죠. 예엣날에는. ^^;

마늘빵 2007-07-22 13:58   좋아요 0 | URL
달밤님 부모님은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나봐요. 우리 부모님도 그냥 사실 그대로 말씀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을. 요즘에는 아마 그정도까지 조사하진 않을거에요. 제가 담임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에어콘, 냉장고, 세탁기 크흐 이런건 당연히 조사하지 않고요. 글쎄요 학력기재란이 있거나, 따로 물어 조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달밤님 때도, 저 때도, 이런 점들이 해당 학생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곤 했었죠.

Mephistopheles 2007-07-2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정아 사건의 경우 알파걸을 곱게 보지 못하는 소위 줄윗선의 남자들의 보복심리도 깔려있는 듯 싶습니다..^^ 그리고 신정아 사건의 경우 100% 노력보다는 일단 모래로 쌓여진 기초에서 지금의 업적을 이뤄놨기에 언제가 되었건 간에 무너지게 되어있을 예정이라고 보고 싶어요. 더군다나 그녀는 거짓학력과 학위였지만 그걸 십분 활용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으니까요..황우석 사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잣대로는 분명 거짓말임에 틀림없지만 이미 그것이 머리속에서는 진실이라고 거부할 수 없도 없고 반전될 수도 없는 대못이 박혀버렸다고나 할까요..참고로 신정아씨의 가족들은 이미 그 대못이 박힌 듯 하더라구요.^^

마늘빵 2007-07-22 16:08   좋아요 0 | URL
신정아의 경우 실력과 능력이 어찌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금까지 보기로는 인맥과 친화력, 거짓학위로 하나하나 쌓아간 모양새죠. 언젠간 무너졌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근데 이지영의 경우는 다릅니다. 만화가 이현세씨도 그렇고. 도미노처럼 커밍아웃을 했지만, 내용이 다르죠. 이지영씨나 이현세씨는 능력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봐야하는데 학위와 학벌을 위조한 경우죠. :)

다락방 2007-07-22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정아뿐만이 아니더군요. 굿모닝팝스의 이지영도 학력속였더라구요. 이지영의 경우는 고졸이든 박사든 영어를 잘하는것임에는 틀림없잖아요.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한것도 나쁘고, 학벌이 좋아야만 대우받는 사회도 나쁘고. 뭐가 더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돌고도는것 같아요. 그리고 아프락사스님의 말씀처럼 저희 부모님도 학력을 자식들에게 속이셨고, 그런데 그걸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됐어요, 저도. 부모님은 부모님의 생각이 있었을거고, 부모님의 마음이 그런것이었을테니 굳이 왜 속였냐고 묻고싶지 않아요. 부모님의 학력이 어찌됐든, 그리고 거짓이든 진실이든 저희 부모님임에는 틀림없으니깐요.
신정아 사건은 근래 가장 재미있는 뉴스였어요.

마늘빵 2007-07-22 16:1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부모님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큰 분노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게 됐을 때도 그냥 담담하더군요. 그렇다고 그게 잘한 일은 아니지만, 굳이 탓하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그걸로 어떤 이득을 취하려하신것도 아니고, 부끄러움을 감추시고 자식에게 뭔가 있어보이려고 하셨던 것일텐데, 라는 생각만 했어요. 근데 언젠가 네 가족이 모인 갈등을 푸는 자리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있는거 같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냐고 어쩌고. 잘 기억은 나지 않고. -_-

맑음 2007-07-2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껴안고 있는 각자의 상처이자, 자존심의 마지노선이 아닐까요?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학력을 따는 일은 저 멀리 동떨어져 있고(먹고 살만 하니 처자식이 줄줄이 딸려있더라는). 그게 늘 맘속에 콤플렉스처럼 똬리를 틀고 계시겠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학은 저절로 가는 우리 세대(그래도 전국의 고삼은 늘 괴롭겠지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건드리면 안 되는 민감한 부분이 아닐까요? 사람마다 남들이 거론을 안 해줬으면 하는 자존심이 걸린 부분이 있는데, 부모님 세대는 바로 학력인 것 같아요. 굳이 거짓말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일단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다는 소망과 가정조사(지금은 안 써내는지 몰라도 90년대까진 썼어요)에 써낸 학력 때문에 교사나 친구들 앞에서 부모로 인하여 자식이 창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맘이 아니였을까란, 추측만,,, 대부분 커가는 과정에서 추측으로만 부모의 학력을 알게 되는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고 부모의 뒤를 캐는 일은 없기를!!! 제가 살면서 자존심 때문에 한, 큰 거짓말에는 뭐가 있나 생각해 보나 딱히 당장 떠오르는 건 없고. 학생시절 성적표를 파기하거나 위조하거나 빼돌리는 것도 일종의 같은 거짓말에 속하지 않나 싶군요.

당당함의 차이일 수도 있어요. 88년도인가? 90년대 초반인가? 읍니다를 모두 습니다로 통일하는 등으로 한글맞춤법이 새로 바뀌었잖아요. 지금도 연세가 있으신 분들 중에 당당하게 읍니다를 쓰시는 분이 있고, 혹시나 틀린 맞춤법으로 창피를 당하시지 않을까 싶어 너무 조심스러워 공문서는 모두 자식에게 쓰라고 시키시는 분이 있죠.

끝까지 지키고 싶은, 세대 별 자존심의 마지노선은 어떤 게 있을까요?
50대 이상은 학력이 있을 수 있겠고 30대 후반에서 40대는 영어 능력이나 명퇴 등의 칼바람을 피하는 것.
20대에서 30대 초반은 짧은 기간에 취직 하는 것???
아무튼 부모님에게 학력 질문은 면접에서 열 몇 번 떨어진 친구에게 아직도 돈 안 벌고 뭐하냐고 묻는 질문쯤 될 것 같군요. 아프님, 어쩌시려고 부모님께 이야길 꺼내셨어요.ㅡ.ㅡ

덤으로, 왜 개인이 사회에 학력을 속일까란 의문에 학력을 속이지 않으면 기회조차 사회가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졸이더라도 결국 국내 대형 전시회 큐레이팅을 박사못지 않게 신씨가 해낼 수 있고 고졸이더라도 박사보다 이씨가 영어를 잘 하고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실무적인 면에서. 개인의 능력 자체를 검증하는 단계로 학력을 활용하는 제도 자체에, 기준 학력을 채우지 못하면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하는 진입장벽이 생기고.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학력을 속일 수 밖에 없고 그게 계속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게 아닐까란. 공손한 대안이라면 학력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사회를 만들자 정도. ㅋㅋ~(난 왜 댓글만 달면 글이 이리 길어질까요?)

마늘빵 2007-07-23 10:11   좋아요 0 | URL
맑음님 댓글 본 나의 반응
1. 허걱
2. 끄덕끄덕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
맑음님 가끔씩 출몰하시면 긴 댓글 다시는데, 자주 페이퍼로 이런 글을 써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럼 애독자가 될텐데요. 구구절절 끄덕끄덕입니다.

비로그인 2007-07-23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가르친다는 교수에게 있어 도덕성이 가장 중요한 항목중 하나이기는 합니다만, 우리사회의 능력이 아닌 학벌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부분도 같이 비판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째 사농공상중 '사'를 앞에 놓는터라...

마늘빵 2007-07-23 20:10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도덕성에 관해서는 관대(?)해진거 같아요. 도덕성이나 인격보다는 능력, 실력 위주고, 이건 또 학력과 학위에 의해서 평가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