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주체성의 이념 -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 인문정신의 탐구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2월
품절


철학은 자유인을 위한 학문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마찬가지여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를 일으켜 세우려는 겨레만이 철학을 필요로 한다. 자유란 소박하게 말하자면 남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고립된 자기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 속에서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사회와 세계의 부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전체 사회와 세계가 나로부터 소외된 타자적 힘과 권력으로서 나에게 대립한다면, 나는 결국 그 전체에 의해 규정되는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사회와 세계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는 백성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입법자가 되고 주권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분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오직 전체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만 자기의 주인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단순한 분릴와 독립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오직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활동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11-12쪽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요구된다.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가 깨우쳐주었듯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오직 생각 속에서만 열리고 생성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모든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 만약 있는 것들이 오직 물리적 사물들이라면 세계는 그런 사물들의 총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전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들의 절대적 전체는 사물이 아니라 이념이다. 그런데 있는 것은 고정된 사물로서 주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있는 것은 될 수 있는 것이니, 있음은 언제나 될 수 있음이다. 그런즉 세계는 단지 일방적으로 고정되어 주어져 있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동시에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12-13쪽

자유인으로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물의 주어져 있음을 넘어서 모든 될 수 있음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있음의 모든 차원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참된 총체성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하고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13쪽

이른바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은 신념을 가지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이고, 민청학련 사형수 출신의 철도공사 사장은 고속철도 여승무원 문제에서 보듯 그들이 비판했던 자본가들과 한치의 다름도 없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단지 그들 개인의 문제로 돌려 변절이라 비판하겠지만, 사실은 이 모든 위기적 징후가 우리 모두의 정신의 빈곤에서 비롯된 일이다. 우리는 압제에 저항해서 싸우는 일에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준 겨레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는 너무도 게을렀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억압의 사실을 끊어내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다만 싸우고 또 싸워왔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참으로 새로운 우리들 자신의 세계상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도 설계도도 없이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 자기의 집을 지어야 했으니,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유의 빈곤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16쪽

"자아는 근원적으로 정신적 삶의 초기 단계부터 욕동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그 욕동을 만족시킬 능력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 부르며, 또 그렇게 스스로 만족을 얻는 방식을 자기성애라 일컫는다." (프로이트)-46쪽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 자체를 서양적 나르시시즘의 현대적표현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개념을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프로이트에게서 나르시시즘이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자기애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자기애는 한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와 반성적인 관계를 맺으며 더 나아가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에고이스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나르시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방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자기애라도 자기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것은 긍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연민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혐오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에 대한 긍지가 하나의 지속적 성격으로 굳어진 특수한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49쪽

본래적 나르시시즘이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느끼는 자기에 대한 "확고한 긍지"로 나타난다. 긍지란 '위에-있음'의 의식이다. 아름다운에서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긍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은 단순한 대자적 반성이 아니라 대타적 반성의 결과이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되 그것을 남과의 관계, 또는 객관적 비교 가운데서 우월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 이것이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그 우월성의 의식이 긍지인데, 이 긍지는 결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의식이다. 이에 반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일 수는 있으나 결코 긍지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의 나르시시즘은 아무에게도 허락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객관적으로 우월하고 탁월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자기감정인 것이다-54쪽

그렇게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나르시스는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뭇 타인들을 멸시한다. 그리고 이 멸시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은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가 멸시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뭇사람에게 사랑받았으나,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혹되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르시스적 정신은 언제나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와 관계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정신이다. 물론 모든 주체에게는 타자가 있고 이런 사정은 나르시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에게 타인은 진정한 타자적 주체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오비디우스는 나르시스를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 이름이 에코, 곧 메아리이다. 자기의 말을 빼앗기고 나르시스의 말을 단지 어눌하게 반복할 수 있을 뿐인 에코는 서양 정신 앞에서 자기의 언어와 주체성을 상실한 모든 타자적 정신의 은유이다.-54-55쪽

그렇게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떠나지도 못하고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는 나르시스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려는 모든 홀로주체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하여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철학적 관용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주체의 죽음은 주체가 자기 집착의 허망함을 깨우쳐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집착의 필연적 결과로서 일어난 일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결코 스스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하데스로 내려간 나르시스는 지금도 스틱스 강에 하염없이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 것이다.-56-57쪽

"자아의 본질은 자유이다. 즉 자아는 오로지 절대적인 자기권력으로부터 자기를 어떤 사물이 아니라 순수한 자아로서 정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쉘링)-64쪽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표상들의 대상이다. 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산물이다. 나는 나 자신을 만든다. ......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든다." (셸링)

여기서 보듯이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다른 행위가 아니다. 내가 세계로부터 고립된 존재자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오직 세계를 형성하는 한에서 나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며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 나의 주인이 된다. 주체의 자유는 그렇게 자기와 세계를 무제약적으로 형성하는 근원적 행위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66쪽

생각하면 서양 정신이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공포는 바로 이 수동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나와 동등한 타자가 나 밖에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 의해 언제라도 예속되고 수동적으로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수동성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타자적 관계를 지양하는 것은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데, 근대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67쪽

여기서 우리는 서양 정신이 배제하는 것이 타자적 주체이지 타자 일반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타자도 없는 정신은 공허한 정신이다. 그것은 아무런 대상도 없는 생각은 현실적 생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정신은 오직 타자를 대상이나 객체로 삼는 한에서 자기의 존재를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적 정신은 이런 상황에서 타자를 자기화하고 내면화한다. 즉 그것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정립하는 대신, 또는 비슷한 말이지만 모든 타자를 자기의 내재적 계기로 만드는 정신이다.-69-70쪽

서양적 자유의 이념 속에 내재된 배리와 역설은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자적 주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데 있거니와 이것은 현실 역사 속에서는 북미 대륙에서처럼 원주민의 집단 학살과 같은 타자의 절멸로 나타나는가 하면, 이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타자를 자기에게 동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동화가 자기와 타자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 정신은 타자를 자기화하는 만큼 자기 속에서 다시 타자를 정립하는 정신이다. 즉 그것은 자기가 주인이 된 세계 속에서 다시 타자적 관계를 산출하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필연적으로 (반)정립하게 되는데, 이때 자기 속에서 반정립되는 타자는 정신의 타자일뿐 타자적 주체일 수는 없다. 그것은 관념 속에서는 대상화되고 객체화되는 타자이며, 현실 속에서는 도구화되고 노예화되는 타자이다. 그렇게 타자를 자기 속에서 노예화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보편자로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밖에 타자를 남겨두지 않을 경우에 그 타자의 주체성, 곧 타자적 자유 부정하고 타자를 노예화하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온 제국주의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태동한 서양적 자유의 이념의 현실태인 것이다-70-71쪽

서양 철학의 나르시시즘은 존재의 근저에 놓인 이 근원적인 권력을 자기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권력에 참여하고 그것을 전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나와 이질적인 것이라면 나는 결코 그것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도 없다. 오직 존재론적 권력이 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때에만 나는 그것을 나 속에서 따라체험하고 반복할 수 있으며, 또한 그때에만 나는 그 권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정신이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론적인 권력을 바로 자기 자신의 형상 속에서 찾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처럼 존재의 본질적 진리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의 특징이다.-77쪽

신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존재라는 말과 같다. 정신은 인간의 본질규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 정신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본질적 동일성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이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신과 인간의 무차별한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에게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본질적 동일성의 지평 속에 내재적 차이가 정립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신적인 정신은 인간의 정신처럼 자기 밖의 대상을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다. 만약 그런 정신이었다면, 그것은 타자에 의한 수동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정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정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오로지 자기하고만 관계하는 정신 곧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정신이다. 프로이트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은 절대적 나르시시즘의 현실태인 것이다.-89-90쪽

중세철학의 역사는 그 신에서 시작된다.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이 중세의 정신이다. 그것은 사냥에 지쳐 연못가에 와서 물 위에 엎드린 나르시스와도 같다. 그는 수면에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타인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 매혹된다. 그 얼굴은 사실은 남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의 얼굴이었으나, 나르시스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와 사랑에 빠져든다. 바로 이 단계가 중세이다. 그것은 신이 자기 자신의 영상인 줄 모르고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중세철학이 찾았던 신은 고대 그리스 정신이 발견한, 아니 투사한 신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리고 이 차이가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와 성장기를 나눈다. -91쪽

그러니까 인격적인 신에 대해 열광하는 까닭은 신이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므로 내가 신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아짐이야말로 신에 대한 기독교적 열광의 지향점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 겸허나 자기비하의 감저이 신 앞에서의 자기부정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확장과 신격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만약 서양 정신이 마주한 그 타자가 자기와 동등한 상대적 타자였더라면, 자기를 타자와 일치시키려는 열망이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요, 자기가 타자 앞에서 수동성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이 마주한 타자적 정신은 절대적 정신이요, 절대적 주체인 신이었다. 신 앞에서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신에게 일치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내가 신과 하나 된다는 것은 내가 그의 나라와 권력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의 절대화이다. 기독교적 열광은 이처럼 내가 신을 통해 절대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는 데 대한 열광이다. 결과적으로 신에 대한 열광은 자기에 대한 열광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그 본바탕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까닭에 그리도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06쪽

자아의 자유는 자기를 그렇게 주체로서 스스로 정립하는 것에 존립한다. 인간은 주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근대 철학은 바로 이런 자유를 보편화하였다. 왜냐하면 근대 철학이 말한 자아의 주체성은 다른 어떤 경험적 조건도 배제한 순수한 사유의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어떤 차별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질적으로 주체이다. 자유와 주체성의 보편화, 이것이 바로 근대 철학의 영속적인 공적이다-117쪽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자기정립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자기를 정립하는 것만큼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며, 사유의 주체성 또한 단순히 추상적 자아의 정립이 아니라 현실의 능동적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자아는 자기정립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법칙의 입법자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중략 ... 자아가 타율적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그는 타율적 강제 아래 있는 것이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도덕법칙이나 인륜적 법칙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오직 자기가 모든 객관적 법칙들의 입법자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117쪽

근대에 이르면 자아는 절대적 권력을 직접 자기 속에서 반복하고 따라체험함으로써 자기가 그 권력의 주체가 되려 한다. 중세 철학이 신과의 합일 속에서 진리와 자유에 참여하려 했을 때, 진리와 자유의 최종적 실행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은 다만 신과 하나됨으로써, 절대적 권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원리는 나 속에서 직접 실현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 자체로서 존립한다는 어떤 객관적 진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객관적 진리는 소외된 진리일 뿐이다. 진리는 나 속에서 반복되고 따라체험되는 한에서만 진리이다. 절대자는 더 이상 피안의 환상이 아니라 자아 속에 현전하는 현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기도와 은총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자아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는 이제 신의 절대적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과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118쪽

현대적 정신은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아는 초자아와 같아지기를 욕망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도리어 그것에 의해 억압받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만약 그가 자기를 욕망하기를 멈추고,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자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아는 계속해서 초자아에 예속되고 억압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욕망에 휘둘리고 초자아에 억압받는 자아가 바로 우리 시대, 정신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근대적 정신이 생각했던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체의 죽음이다. -129쪽

"의지는 다른 것, 외적인 것, 자기와 별개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을 바꿔 말하면 의지를 의지하는 한에서만 자유이다. 앞의 경우에 의지는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자유란 이것, 곧 자유롭고 의지하는 것이다." (헤겔, <역사철학강의>)-130쪽

내가 인식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내가 잠재적으로 사물의 생성과 존재의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다. 반면에 한 사물이 인식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형성의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가 인식 가운데서 사물의 생성을 반복할 때, 인식되는 그 사물은 생성의 근거와 원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객체가 된다. 물론 인식은 사물을 형성하되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현실공간 속이든 사유공간 속이든 중요한 것은 사물이 자기의 형성의 원리를 타자적 아르케에게 양도하고 객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다. 현실공간에서 사물은 아르케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이 형성에 대응하여 사유공간 속에서 사물은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형성되고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은 수동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인식의 사물의 형성 원리를 모방하고 반복할 때, 그것은 사물을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처럼 사물을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인식을 통해 자아가 얻는 권력인 것이다. -143쪽

서구적 인식에서 인식과 기술은 공속한다. 기술과 인식이 공속하는 한에서 인식의 대상은 동시에 기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기술적 재생산과 조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뜻하는 것인데, 이는 인식의 대상이 기술적 사유 앞에서 객체화되고 사물화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기술은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주체이다. 기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러나 기술 자체는 주관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기술이 객관적 정신의 체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9쪽

법이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명령할 때, 그것은 타율적 강제의 체계이다. 그러나 내가 법에 동의할 때, 법은 나의 주관적 의지의 보편화이다. 그리하여 내가 동의하는 법에 복종할 때, 그것은 내가 타율적 강제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자율성의 의미이다.
-151쪽

자유는 처음엔은 개인의 의지의 자율성으로 발생하지만 개인적 자유는 언제나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된다. 개인적 자유를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인간은 법의 주체가 됨으로써 보편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 자유와 권력을 향한 욕구에 한계가 없듯이 법의 적용 범위에도 한계는 없다.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아는 무제약적인 보편적 법의 주체가 되려 하고, 이에 따라 법의 외연은 시민법에서 국제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계시민법의 이념을 향해 끝없이 확장된다.-152쪽

"네가 외적으로 행위할 때, 너의 자의의 자유로운 사용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

법은 자유의 현실태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운 만큼 타인의 자유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법은 나의 자유의 현실태인 만큼 타인의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법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 사람의 행위의 합법성은 각자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만 확보된다. 칸트의 저 말은 이런 법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법은 모든 주체들을 동일화한 뒤에, 그 주체들 사이에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권리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이를 통해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154-155쪽

우리는 오직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할 때 온전히 자족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 ... 중략 ... 이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욕망이 무제한적인 만큼 소유에 대한 욕망도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자유의 원리가 보편화된 만큼 소유의 권리도 보편화된다.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는 공존할 수 있어야 하며, 나의 소유가 타인의 소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공존과 균형의 원칙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중략 ... 그러나 소유가 강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교환에 의해 주고 받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소유 가능성은 교환 가능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제약적인 소유 가능성은 무제약적인 교환 가능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하게 만드는 보편적 교환의 지평을 산출하게 된다.-158쪽

그렇다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홀로주체성이라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주체성을 타자와의 만남, 특히 인격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사유하는 일이다. 나의 주체성이 너와의 만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온전히 생성되고 정립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스적 홀로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수행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학이 지금까지 참된 주체성이 무엇인지를 물어왔던 것처럼 참된 만남이 무엇인지를 같이 물어야만 한다. -167쪽

선험론적 철학은 나의 존재든 세계의 존재든 그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믿음을 거부한다. 모든 존재 주체의 활동을 통해 개방된다는 것이야말로 선험론적 철학의 근본 통찰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칸트에 의해 기초가 놓인 선험론적 철학의 길을 따른다.-168쪽

우리의 과제는 헤겔이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만남 속에서만 생성되고 정립되는 주체성을 참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일이다. 주체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이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는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이란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과제이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기성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체성이 본질은 오로지 활동에 있다.-172쪽

서양 정신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은 채, 타자 없는 자기 관계 속에서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도리어 주체의 죽음에 이르게 되고 이런 위험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공속을 생각하게 만드는 배경이라면,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기를 자유로운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역사를 살아오면서 지속적인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정신적으로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왔던 까닭에 자기를 온전히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것이 수동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배경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서양 정신은 타자적 정신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자기가 먼저 있었으니, 그 자기의 아성을 타자적 주체를 향해 해체하고 개방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처음부터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민족이요, 그 결과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 겨레는 통일된 나라를 형성한 이래 한 번도 타자에 의해 강제되는 수동성의 굴레를 벗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동성에 빠져 있었던 겨레에서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176쪽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정신의 자기상실이다. 생각하면 자기의 철학이 없는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다. 철학은 자기인식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반성이다. 그러나 한민족은 자기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자기의 언어로 반성하는 일에 너무도 게을렀다. 기존의 세계관이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렸을 때 이 나라의 주류 철학자들은 스스로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기보다는 대개 남의 철학을 수입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수입된 이래 이 나라의 철학은 언제나 수입된 철학이었다. 불교가 쇠하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성리학이 쓸모없어지면 서양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이 나라 철학사의 지배적 경향이었으니, 그렇게 수입한 남의 철학에 주석을 다는 것이 이 나라 대다수 철학자들이 한 일이었다.-179쪽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생각의 총체성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세계관이라 부르는데, 이런 세계관을 기투하고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사유의 총체성 속에서 경험을 통일하고, 이를 통해 온전한 의미에서 세계를 통일된 경험의 지평으로 개방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세계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생각의 활동을 통해서 정립되는 이념이다. 철학은 비어 있는 총체성의 이념인 세계를 구체적 규정 속에서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다. 주체는 그런 철학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세계가 자기의 세계인 한에서 주체는 그 세계의 주인이다. 그런즉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자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먼저 자기의 철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181쪽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주체성이란 단순한 논리적 자기동일성의 의식이 아니라 총체적 인식체계로서 세계관을 스스로 정립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든 그들도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구성된 연속적인 세계관이 아니다. 개항 이후 서양의 온갖 철학과 세계관이 밀려 들어온 뒤에 한국 땅에는 너무도 많은 세계관들이 중첩되어 있는 까닭에 단절 없는 잘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의 지평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는 잘 구성된 연속적인 자기 또한 없다. 한국인에겐 자기가 그 자체로서 타자성의 총체이다. 이 타자성 속에서 한국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통스럽게 단절과 불화를 자기 속에서 경험해야만 하며, 결과적으로 온전한 주체로서 행위할 수도 없게 된다. -18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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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7-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추천받아서 읽고 있는데, 제가 아는게 없어서 쉽게 읽히지 않아 반쯤 읽고 덮어두고 있었는데.. 님 밑줄보고 다시 봐야겠단 용기가 생겼어요 ^^; 물론 여전히 제겐 쉽지 않겠지만..^^

마늘빵 2007-07-23 00:41   좋아요 0 | URL
아 제이드님 저도 이거 힘들게 읽었습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텍스트에 밑줄을 치고픈 욕망이 가득해집니다. 이 책 한권이 정말 많은걸 깨닫게 해줬습니다. 전 종교는 없지만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느낄 때의 그런 '마음이 밝아짐'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 책 완전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겠습니다. 이거 밑줄긋기 옮겨 치느라 죽는줄 알았습니다. 휴.

2007-07-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속닥님 네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넷 2007-07-23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지난번에 밑줄긋기로 올리지 않으셨어요?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엇, 아닐텐데요. -_- 제가 비공개로 계속 꾸준히 치면서 축적해온건데, 언제 한번 중간에 살짝 공개된 적이 있었나봐요. 그때 보셨나보다. :) 이게 완성본이에요. 다 읽었어요.

비로그인 2007-07-2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찬찬히 읽어두어야 할텐데 서재에선 이런글 같은데에 책갈피 꽂아두는 것같은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ㅜ..ㅠ

마늘빵 2007-07-23 20:18   좋아요 0 | URL
어 있잖아요. 찜기능. 저는 좀 오래 씹으며 읽어야 할 페이퍼나 리뷰들은 찜해놓고는 제 서재에서 열어보곤 합니다. :) 곱씹어 읽고 읽다 멈춰 사색할 문장이 많아요. 최근 이슈들과도 연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