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사건과 관련해 떠오른 기억 하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게 오랫동안 학력을 속이셨다. 아버지는 연세대 성악과 중퇴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이화여대(?) - 하여간 무슨 여대 -졸업하셨다고 거짓말 하셨다. 둘째 큰 아버지가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마친 뒤 서울 모 대학에 성악과 교수로 부임하셨으니 셋째인 아버지가 대학을 다니기엔 집안이 힘들었을 것이고, 돈이 부족해서 다니다가 그만두셨나보다 라고 자연스럽게 추론했고, 어머니의 경우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난 그게 거짓말이란걸 알았다.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두 분의 대화를 엿들은것도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학벌과 학력을 속이리란 생각을 해본다. 비단 이건 우리 부모님만의 문제는 아니지 싶다. 특별히 나의 부모님이 도덕성이 떨어져서는 아닐테다.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 좋은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돈이 들어오는 것도,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님에도 왜 거짓말을 했을까. 자식에게 뭔가 있어보이려는 만들어진 떳떳함과 이만큼 열심히 노력해 자수성가한 분들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싶으셨을게다. 보통 자식은 부모님을 닮아가기 마련이고, 부모님이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까지 졸업하셨다면, 자식으로서도 주어진 환경 탓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니 이런 점을 노리고 거짓말을 하셨을게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기대대로 학창시절 공부도 곧잘 했으며,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떠올려봐도 초중고 12년 중 적어도 10년은 근면성실하고 부지런한, 부모님과 선생님이 원하는 바로 그 모범생의 전형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나의 근면성실함이 이같은 거짓말로부터 나온 모방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본래 나는 매사 조심스럽고 수줍음 많았으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순하고 복종적인 아이였다. 우연하게도 부모님의 거짓말을 안 시점과 내 성적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린 시점은 일치하지만, 이건 우연일 뿐이다. 거짓말을 알았을 때에도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진 않았고, 그저 왜 거짓말을 했을까, 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후에도 알아챘음을 티내지 않았다. 

  글쎄 다른 나라에서도 자식에게조차 부모가 학력을 속이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학력이란 특별히 어떤 떡고물이 떨어지는 상황이 아니어도 이렇게 일상에서조차 '필요' 요소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부모님이 학력과 학벌을 속임으로써 얻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부모님에 대한 신뢰도만 떨어뜨렸을뿐. 두 분의 위조된 학력으로 인해 내가 공부를 특별히 더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거짓말에 따른 긍정적 효과는 없었던 셈이다. 

  학력과 학벌은 자식조차 속이고픈 부끄러운 부분일까. 그 시대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두분은 남들하는 만큼은 따라한 셈이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졸업한 상업고는 당시 꽤 이름있는 고등학교였다고 하니 굳이 속이지 않으셨어도 되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그렇게 부끄러우셨나보다. 학력과 학벌 위조는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기 위해서, 돈많고 지위높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도 발생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도 이루어진다. 당신들의 자녀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도 쓰인다. 자라면서 우리 부모님은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부모형을 따르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이런 민감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더군다나 타인에게는 털어놓는 일이 없으니,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례는 알 수 없으나, 일반화시켜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관련글 : http://blog.aladin.co.kr/drumset/1435203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oonnight 2007-07-2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집안형편이 많이 어려우셔서 학교를 별로 못 다니셨어요. "학교에서 물으면 엄마는 중졸, 아빠는 고졸이라고 말해라." 라고 일러주셨죠. 요즘도 학교에서는 새학기마다 부모님의 학력과 경제적인 형편을 조사하나요? 냉장고 있는 집. 에어컨 있는 집. 자가용 있는 집. 손들어 보라고 그랬었죠. 예엣날에는. ^^;

마늘빵 2007-07-22 13:58   좋아요 0 | URL
달밤님 부모님은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나봐요. 우리 부모님도 그냥 사실 그대로 말씀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을. 요즘에는 아마 그정도까지 조사하진 않을거에요. 제가 담임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에어콘, 냉장고, 세탁기 크흐 이런건 당연히 조사하지 않고요. 글쎄요 학력기재란이 있거나, 따로 물어 조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달밤님 때도, 저 때도, 이런 점들이 해당 학생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곤 했었죠.

Mephistopheles 2007-07-2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정아 사건의 경우 알파걸을 곱게 보지 못하는 소위 줄윗선의 남자들의 보복심리도 깔려있는 듯 싶습니다..^^ 그리고 신정아 사건의 경우 100% 노력보다는 일단 모래로 쌓여진 기초에서 지금의 업적을 이뤄놨기에 언제가 되었건 간에 무너지게 되어있을 예정이라고 보고 싶어요. 더군다나 그녀는 거짓학력과 학위였지만 그걸 십분 활용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으니까요..황우석 사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잣대로는 분명 거짓말임에 틀림없지만 이미 그것이 머리속에서는 진실이라고 거부할 수 없도 없고 반전될 수도 없는 대못이 박혀버렸다고나 할까요..참고로 신정아씨의 가족들은 이미 그 대못이 박힌 듯 하더라구요.^^

마늘빵 2007-07-22 16:08   좋아요 0 | URL
신정아의 경우 실력과 능력이 어찌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금까지 보기로는 인맥과 친화력, 거짓학위로 하나하나 쌓아간 모양새죠. 언젠간 무너졌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근데 이지영의 경우는 다릅니다. 만화가 이현세씨도 그렇고. 도미노처럼 커밍아웃을 했지만, 내용이 다르죠. 이지영씨나 이현세씨는 능력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봐야하는데 학위와 학벌을 위조한 경우죠. :)

다락방 2007-07-22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정아뿐만이 아니더군요. 굿모닝팝스의 이지영도 학력속였더라구요. 이지영의 경우는 고졸이든 박사든 영어를 잘하는것임에는 틀림없잖아요.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한것도 나쁘고, 학벌이 좋아야만 대우받는 사회도 나쁘고. 뭐가 더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돌고도는것 같아요. 그리고 아프락사스님의 말씀처럼 저희 부모님도 학력을 자식들에게 속이셨고, 그런데 그걸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됐어요, 저도. 부모님은 부모님의 생각이 있었을거고, 부모님의 마음이 그런것이었을테니 굳이 왜 속였냐고 묻고싶지 않아요. 부모님의 학력이 어찌됐든, 그리고 거짓이든 진실이든 저희 부모님임에는 틀림없으니깐요.
신정아 사건은 근래 가장 재미있는 뉴스였어요.

마늘빵 2007-07-22 16:1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부모님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큰 분노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게 됐을 때도 그냥 담담하더군요. 그렇다고 그게 잘한 일은 아니지만, 굳이 탓하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그걸로 어떤 이득을 취하려하신것도 아니고, 부끄러움을 감추시고 자식에게 뭔가 있어보이려고 하셨던 것일텐데, 라는 생각만 했어요. 근데 언젠가 네 가족이 모인 갈등을 푸는 자리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있는거 같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냐고 어쩌고. 잘 기억은 나지 않고. -_-

맑음 2007-07-2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껴안고 있는 각자의 상처이자, 자존심의 마지노선이 아닐까요?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학력을 따는 일은 저 멀리 동떨어져 있고(먹고 살만 하니 처자식이 줄줄이 딸려있더라는). 그게 늘 맘속에 콤플렉스처럼 똬리를 틀고 계시겠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학은 저절로 가는 우리 세대(그래도 전국의 고삼은 늘 괴롭겠지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건드리면 안 되는 민감한 부분이 아닐까요? 사람마다 남들이 거론을 안 해줬으면 하는 자존심이 걸린 부분이 있는데, 부모님 세대는 바로 학력인 것 같아요. 굳이 거짓말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일단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다는 소망과 가정조사(지금은 안 써내는지 몰라도 90년대까진 썼어요)에 써낸 학력 때문에 교사나 친구들 앞에서 부모로 인하여 자식이 창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맘이 아니였을까란, 추측만,,, 대부분 커가는 과정에서 추측으로만 부모의 학력을 알게 되는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고 부모의 뒤를 캐는 일은 없기를!!! 제가 살면서 자존심 때문에 한, 큰 거짓말에는 뭐가 있나 생각해 보나 딱히 당장 떠오르는 건 없고. 학생시절 성적표를 파기하거나 위조하거나 빼돌리는 것도 일종의 같은 거짓말에 속하지 않나 싶군요.

당당함의 차이일 수도 있어요. 88년도인가? 90년대 초반인가? 읍니다를 모두 습니다로 통일하는 등으로 한글맞춤법이 새로 바뀌었잖아요. 지금도 연세가 있으신 분들 중에 당당하게 읍니다를 쓰시는 분이 있고, 혹시나 틀린 맞춤법으로 창피를 당하시지 않을까 싶어 너무 조심스러워 공문서는 모두 자식에게 쓰라고 시키시는 분이 있죠.

끝까지 지키고 싶은, 세대 별 자존심의 마지노선은 어떤 게 있을까요?
50대 이상은 학력이 있을 수 있겠고 30대 후반에서 40대는 영어 능력이나 명퇴 등의 칼바람을 피하는 것.
20대에서 30대 초반은 짧은 기간에 취직 하는 것???
아무튼 부모님에게 학력 질문은 면접에서 열 몇 번 떨어진 친구에게 아직도 돈 안 벌고 뭐하냐고 묻는 질문쯤 될 것 같군요. 아프님, 어쩌시려고 부모님께 이야길 꺼내셨어요.ㅡ.ㅡ

덤으로, 왜 개인이 사회에 학력을 속일까란 의문에 학력을 속이지 않으면 기회조차 사회가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졸이더라도 결국 국내 대형 전시회 큐레이팅을 박사못지 않게 신씨가 해낼 수 있고 고졸이더라도 박사보다 이씨가 영어를 잘 하고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실무적인 면에서. 개인의 능력 자체를 검증하는 단계로 학력을 활용하는 제도 자체에, 기준 학력을 채우지 못하면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하는 진입장벽이 생기고.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학력을 속일 수 밖에 없고 그게 계속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게 아닐까란. 공손한 대안이라면 학력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사회를 만들자 정도. ㅋㅋ~(난 왜 댓글만 달면 글이 이리 길어질까요?)

마늘빵 2007-07-23 10:11   좋아요 0 | URL
맑음님 댓글 본 나의 반응
1. 허걱
2. 끄덕끄덕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
맑음님 가끔씩 출몰하시면 긴 댓글 다시는데, 자주 페이퍼로 이런 글을 써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럼 애독자가 될텐데요. 구구절절 끄덕끄덕입니다.

비로그인 2007-07-23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가르친다는 교수에게 있어 도덕성이 가장 중요한 항목중 하나이기는 합니다만, 우리사회의 능력이 아닌 학벌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부분도 같이 비판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째 사농공상중 '사'를 앞에 놓는터라...

마늘빵 2007-07-23 20:10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도덕성에 관해서는 관대(?)해진거 같아요. 도덕성이나 인격보다는 능력, 실력 위주고, 이건 또 학력과 학위에 의해서 평가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