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 장에 담겨진 함께 오락실도 가고 야자도 하고 땡땡이도 치던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영화 <친구>를 보고나면 문득 내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한국영화 대박신화의 초기의 획을 그은 <친구>의 흥행원인은 아마도 잊고 지내던 친구와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2001년의 개봉 당시에는 아마도 나는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전국민의 1/4 정도가 봤다는 이 영화를 나는 그로부터 횟수로 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만났다.

  장동건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하지만 그 옆에 별거 아닌듯 보이는 유오성의 전혀 가오잡지 않은 가오가 더 눈에 띈다. 영화를 보기 전과 본 후의 포스터에 대한 느낌은 이렇게 다르다. 좋아하는 배우 유오성과 장돈건의 젊게 꾸민 모습을 볼 수 있어 반가운 영화. 나는 남자이고 완전한 이성애자이지만 장동건을 정말이지 좋아한다. 여자들이 장동건을 좋아하는 똑.같은 이유로. 잘생겼잖아. 멋있잖아.



* 정말 해맑은 모습을 한 순수(?)했던 시절의 네 친구의 모습이다. 몇 년이 지난 후 각자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결국 공부로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나는 어릴 때 공부밖에 모르는 순도 100% 의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는 수줍어 얼굴 새빨개지는 그런 아이였고 언제나 엄마 치마 뒤에 숨어서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였으며, 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 내 주는 숙제 꼬박꼬박 하고 - 아이들은 보통 다음달 학교 와서 숙제하지만 난 집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날 학교에서 되도록 끝내려했던 아이였다 - 수업도 열심히 듣고 필기도 다 하고,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고, 밖에 나가하는 축구, 농구 이런건 관심도 없었으며, 오락실도 멀리했더랬다. 아으. 지금 생각하면 완전 내 친구 말마따나 '재수없는 모범생'이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에겐 항상 나를 지켜주는 주먹들이 있었다. 공부 잘하는 순둥이 모범생에게는 으레 시비거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며 그다지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했던 나는 건드리면 발악하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질 싸움 뻔히 알면서 덤비다가 코피 쏟는건 당연하고, 코뼈가 휘어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언제나 나랑 붙는 녀석들은 반짱, 학년짱의 수준인 주먹들이었다. 게임이 되나. 그러나 그녀석들이 날 칠 때마다 옆에서 그 아이들을 말리고, 나를 현장으로부터 도피시켜주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참 고마웠다. 그 친구들은 어디서 뭐 하나 궁금하네. 친놈이나 막은놈이나.

  남학교에서는 특히나, 주먹이 계급서열을 짓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여학교는 모르겠고. 그러나 졸업하고 누구는 대학가고, 누구는 재수하고, 누구는 깡패가 되면서 서열은 거꾸로 뒤바뀐다. 영화 속 준석과 동수, 중호와 상택은 전형적인 서열의 뒤바뀜을 경험한다. 약에 찌들어 방구석에서 떨고 있는 준석과 깡패 시다바리를 하고 있는 동수, 2년제 대학에 간 중호, 4년제 대학에 가고 유학까지 한 상택의 모습은 너무나 일반적이다. 한때 바다에서 튜브 띄워놓고 함께 이야기 나누던 그들은 어느덧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바닥에 머물던 준석과 동수는 결국 부딪히게 되었고,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 장동건 정말 멋있다. 머리길이가 기나 짧으나, 정장을 입으나 교복을 입으나, 수염을 깎거나 기르거나, 어떻게 해도 멋있다. 야 정말. 잘생긴게 컴플렉스일수도 있겠다. 너 정도면.

   상택이 준석을 면회하기 위해 신청서 '관계'란에 친.구. 라고 적어넣는 그 장면은 눈물 핑 돌게 한다. 결국 친구를 죽이고 친구에게 미안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길 자청하고 철장 안에 있는 준석의 모습과 그 친구를 면회간 성공한 상택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모인 네 명의 인생살이는 너무나 달랐다. 똘똘뭉치고 학교를 퇴학당하면서 서로를 지켜주던 그 모습은 이제 없다.

  친구.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 내게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저들만큼이나 서로를 아껴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을까.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누군가와 사귐에 있어 나를 다 내놓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그러다보니 자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직장'과 '학교'와 '동호회'로 이어져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엇' 때문에 연결된 사이라 할 수 있다. 그 '무엇'이 지워지면 고리는 자연 사라진다. 관계망에 있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친구'라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거란 생각이 든다. 모두가 시간을 쪼개살면서 맺게 되는 관계는 대개 '무엇'을 통하기 마련이니까.

  p.s.

 영화 <친구> 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93년 7월 부산에서 곽경택 감독의 친구인 칠성파 행동대장 정모씨가 부하들을  시켜 신20세기파 행동대장을 살해한 사건으로, 흥행 이후 2001년 정모씨와 칠성파 권모씨가 곽경택 감독에게 돈을 요구해 3억원 가량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 법정 재판 과정에서 곽감독이 이를 부인함으로써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2005년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 1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영화 속 모범생 상택은 곽경택 감독의 모습이었던 것인가? 그렇담 친구인 정모씨가 곽감독에게 금품을 요구함으로써 영화의 결말까지도 유지되던 준석과 상택의 우정과는 참으로 다른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된다. 결국 친구가 친구를 협박해 돈을 뜯어낸 것이니. 정모씨와 권모씨는 비록 징역 3년과 1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실형을 샀는지는 의문이고, 3억 받아낸 것치고는 꽤 작은 수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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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3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2-0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속닥님 / 이른 아침부터. ^^ 동감. 그런게 심하게 드러났었죠. 근데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고, 남자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내 주변에서도 비슷한 사고방식을 하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인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 있죠.
 

2007. 1. 25  예스24 영화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2&no=13861&ref=2&m_type=0

 

매트릭스 directed by 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이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대학 2학년 시절 본 것 같은데, 그간 배웠던 철학적 지식으로 영화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달까. 워쇼스키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삼아 이것저것 다 끼워 맞춰봤다고 하지만, 영화는 이미 던져졌고 난무하는 것은 해석뿐.
우리는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내가 만지는 이 자판이 딱딱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진짜와 가짜는 무엇인가, 어떻게 규정되는가 등등의 질문들. 이 영화 한편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철학 수업이 가능하다.

봄날은 간다 directed by 허진호

아, 도저히 영화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뒤에 일어설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픔을 가져다준 영화였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안에서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는 존재했지만 나를 포함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를 심적으로 거부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봄날은 그렇게 간다. 사랑에 빠졌고 사랑은 떠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래 사랑은 변한다. 인정하자.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꿈꿔왔던 사랑의 관념을 뒤바꿔준, 현실을 확인시켜준 영화랄까. 허진호 감독의, 사랑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장미의 이름 directed by 장 자끄 아노

움베르트 에코의 힘겨운 소설 『장미의 이름』을 영화로 확인하는 매력이란 이런 것.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아, 어렵다, 정말, 벅차다, 이런 느낌이었으나 영화는 좀더 대중적인 느낌을 전해준다. 영화 그 자체로서보다는 소설과 연계하여 봄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소설 속 캐릭터들은 영화 속에서 적절한 배우와 연기로 환원되었다. 지적인 희열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소설을 읽기 힘들었다면 이 영화를 먼저, 혹은 함께.

사랑을 놓치다 directed by 추창민

애절하게 질질짜고 전혀 안 쿨한 사랑영화. 요즘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이를 향해 고백하기 힘들어하는 두 남녀에 관한 이야기. 아, 한번의 고백을 위해 십년의 세월을 보냈던가. 난 그간 뭘 했던가. 우리가 만나기 위해 십년의 세월은 너무나 가혹했고, 십년은 우리의 그 애틋했던 느낌을 지속시키기 힘들었다. 어긋나고 어긋나고 또 어긋나고. 보는 관객이 더 화가 나고 답답해하는 그런 영화. 하지만 쿨한 요즘 세상에도, 과거와 똑같이,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향해 고백하기 그렇게 힘들다. 세상의 흐름과 사랑방식의 변화 문제가 아니라 본래적인 사랑의 문제이다. 쿨하지 않다고, 찌질하다고 그들을 욕하지마라. 정말 쿨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쾌락일지니.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directed by 리차드 링클레이터

참으로 다양한 사랑만큼이나 참으로 다양한 사랑방식이 존재하고, 참으로 다양한 사랑영화가 존재한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새로운 방식의 사랑영화이다. 낯선 남녀와 기차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끌려 함께 거리를 거닐고, 눈이 맞아 사랑을 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기차에서 헤어진다. 원나잇을 다룬 이보다 더 순수한 영화가 있을까. 사랑이 시작하고, 진행되는 과정을 매우 자연스럽게 압축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마치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는 듯.

 

 

  지금 다시 고르라면, <장미의 이름>을 빼고, 
  <이터널 선샤인>  <파니핑크>  <내 남자의 유통기한>  <클로져> <아들의 방>
  중에 하나가 들어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영화가 아닌 것은 <매트릭스>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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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개네요.^^ 왜 아직 매트릭스를 못 봤지...

마늘빵 2007-02-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더 꼽을 수 있지만 다섯편만 써달라해서 그리 되었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지금 와서 보면 다른 걸 집어넣을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거 말고도 넣을 영화는 많은데.

토트 2007-02-02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놓치다는 못봤네요. 이 영화들 다 좋았어요.^^

마늘빵 2007-02-0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랑을 놓치다>는 극과 극으로 나뉠 듯 하군요. 토트님께서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아픈 영화였답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2-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포선라이즈-유럽여행에 대한 환상을 키워준 영화. 언제 봐도 좋아요, 이 영화는. :)

마늘빵 2007-02-0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리 정해놓지 않은 듯 한 그런 자연스러움이 좋았어요. 영화니 당연히 인위적인 설정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저 두 사람의 뒤를 밟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이나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대화나. 간격을 두고 꾸준히 보고픈 영화입니다.

프레이야 2007-02-02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그 블로그가 님의 것이었군요. 몰랐어요. 축하드려요.^^
토로피칼 빠숑, 재미있어요. 비포선라이즈는 정말 대사를 놓치면 안 되겠더군요.^^

마늘빵 2007-02-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네 ^^ 혹 알고 계셨던건가요. 비포선라이즈는 그쵸 대사 놓치면 안돼요.
 

2007. 2. 1 예스24 영화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4160&ref=20&m_type=0

 

[칼럼] 이기주의와 묵가 철학으로 바라본 <묵공>

참으로 재미있는 영화가 나왔다. <묵공>이라. 한중일 합작영화라 하여 시선을 끌기도 하였고, 유덕화가 안성기 주연이라는 점을 앞세워 홍보하며 관객을 끌어보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노력"에 그쳤을 뿐, 언제 한중일 합작영화가 흥행한 적이 있던가. 그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몇 사람이 모여서 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합작영화지, 그 이상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한중일"은 무슨, 영화를 본 바로는 철저히 중국영화다. 주연이 유덕화와 안성기라고 하지만 안성기는 묻혔고, 유덕화는 빛을 발했다.

 

조나라 10만 대군의 수장, 항엄장(안성기 분). 말이 한중일 합작이지 안성기의 역할은 "지위"만 높았지 "비중"은 높지 않았다.

이기주의의 철학에서 바라본 <묵공>

<묵공>은 묵가학파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 묵가학파를 옹호(?)하는 책이 나왔더랬다. 김시천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은 중국철학의 역사에서 사실상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만이 기억되고 있는 오늘날, 묵가라는 저들 사이에서 기지개 피다 잠들어버린 한 학파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주의는 진정한 이기주의의 의미가 아니며 다른 관점에서 이기주의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삐딱하게 보면 말장난과도 같지만,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였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이기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이는 대인의 이기주의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대인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데 - "권유"의 수준을 넘어 "강요"의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 누구나 다 대인이 될 수는 없으며, 소인은 소인의 삶을, 대인은 대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대인의 삶이란 그 자리가 큰 것에서 생기지, 사람이 큰 것에서 생기지 아니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대인의 삶을 살길 고집함으로써 빚어진다. 많은 소인들이 대인의 자리에 있을수록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이 많아지게 된다.

영화 <묵공>에서 천하통일을 앞둔 조나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양성함락을 위해 진군한다. 고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구를 합해봐야 인구 4천명밖에 되지 않는 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10만 대군에겐 너무 쉬워 보인다. 양성은 묵가학파에 원군을 청하지만, "혁리"라는 이름을 가진 단 한 사람만이 이들을 도우러 왔다. 단 한 사람이 1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비웃음은 잠시뿐, 조나라의 10만대군 중 5천명이 순식간에 시체로 돌변했다. 혁리는 양성에서 조나라를 물리치고 그 사이 백성들과 군사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대왕과 그의 충신들은 그를 시기하여 처단할 궁리를 하게 되고 결국 혁리는 그들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았다. 이후 양성은 다시 철군하고 남은 고작 천여 명의 조나라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백성은 피 흘리고 대왕은 조나라의 항엄중 앞에 무릎 꿇는다.

소인은 누구이고, 대인은 누구이며, 누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대인의 자리를 넘봤는가. 소인은 양성의 대왕이었으며, 대인은 혁리였고, 대왕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인의 자리인 대왕의 자리를 고집했다. 혁리는 대왕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그러나 대왕은 혁리를 두려워했고 그를 몰아냈다. 어찌 대인의 자리에 있어야 할 자는 여인이 주는 하찮은 신발조차 받기를 거부하며, 어찌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는 대인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소인임을 드러내는가.

이 영화는 단순한 서사시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 장르의 영화에서 바라보기엔 이 영화는 너무나 재미없고 지루하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다면 영화의 재미는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혁리와 대왕, 그리고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부하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엔 대인의 자리를 탐내는 소인들이 너무나 많다. 고요히 소일을 하며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대인의 자리를 탐내다 보니 갖은 말썽이 생기고, 큰 일이 틀어진다. 오히려 대인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이다. 각자 제 자리를 찾아가면 좋으련만.

 

묵가학파의 혁리로 나온 유덕화. 그가 연기한 혁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묵가의 일원을 보여줬다.

<묵공>으로 바라본 묵가의 철학

유가학파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듯 묵가학파는 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묵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언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주로 이야기되는 바로는, 그의 성은 "묵"이요, 이름은 "적"이다.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살았으며, 당시 유가의 공자와 함께 가장 두드러진 사상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묵자의 사상은 공자에 묻혀 그리 칭송받지 못했다.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두 사람이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쉽게 비교해보자면 - 도식화는 매우 위험하지만 -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해봤을 때 묵자가 공자보다 더 공동체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공자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묵자에 비교해 봤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따로"와 "함께"는 구분되어야 하며, "따로 노는 것"은 "함께 노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로 노는 것"에서 온갖 미움과 멸시, 공격, 억압, 교란 등이 생겨났고,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함께 노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 같이 위하여, 상대방을 자신과 같이 위한다면 모든 악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묵가의 주된 사상은 "겸애"로 요약되며,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바로 묵가학파의 겸애사상을 이야기한 것으로, 모든 백성들이, 모든 나라들이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사랑함으로써 "함께 사는" 세상을 실현하자는 말이다. 혁리가 조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것은, 그가 "사랑"으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첩자라 하여 죽이지 않고, 적군이라 하여 죽이지 않는다. 적을 물리치되 죽이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단지 최후의 방법으로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적을 죽임을 택할 뿐이다. 5천의 조나라 군사의 시체가 성의 안팎에 널려있는 것을 보고, 군사와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파 이들을 묻게 하는 마음이 바로 "겸애"이다. 첩자라 하여 백성들에게 몰매 맞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구해주는 "겸애"이다. 자신을 내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겸애"이다.

묵자는 "백성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다. 주린 자가 먹지 못하는 것, 추운 자가 입지 못하는 것, 그리고 피로한 자가 쉬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였다. 이것만 보면 묵자의 철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듯 하지만, 오히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오는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한 집단의 최대 행복은 그 집단의 가장 가난한 자의 행복과 연결되지 않지만, 가장 가난한 자의 행복을 우선시함으로써 집단 전체의 행복을 도모한다면 구성원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다. 양성을 지켜낸 혁리는 양성 전체의 행복보다는 백성 한 명 한 명의 행복을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첩자라 하여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는 그를 구하려 스스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묵자의 철학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한국이라는 집단 전체의 행복을 위해 경제발전을 우선시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라는 집단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들의 행복을 우선시하면서 집단의 행복을 도모할 것인가. 관점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집단 구성원의 행복도는 달라질 것이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진 않겠다. 대답은 영화를 본 그대들에게 있다.

 

글/ 트로피컬 빠숑

 

 

* 커밍아웃.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트로피컬 빠쑝은 접니다. -_-
  그래스물넷에서 영화칼럼을 맡았습니다. 리뷰인지 칼럼인지 구분은 잘 안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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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02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글을 예스24에 연재하신다니 반가워해야 할지 유감스러워해야 할지 흠...

마늘빵 2007-02-0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아직 안주무셨군요! ^^ 아. 글이 좀 딱딱하고 어려워졌습니다. 담에는 좀 쉽게 써야지. 저런 글은 아무도 안볼거에요. -_- 일단 읽혀야지.

antitheme 2007-02-02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저도 영화를 꽤 좋아했는데 요즘은 볼 시간이 안나요..

마늘빵 2007-02-0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쉴 때마다 쇼파에 편하게 기대 앉아 영화를 봐서 그런지 많이 보게 돼요. 별로 안보는거 같으면서도 이렇게 해서 보는 영화들이 상당하답니다.

승주나무 2007-02-0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는데, 아프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전형적인 중국영화의 틀을 어김없이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다만 제가 관심을 갖는 묵가가 나왔고, 그것이 나름대로 녹았다는 데 의미를 둡니다.

리뷰를 보니 맹자의 구절이 생각나네요.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왕업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맹자는 왕천하를 두 번이나 이야기하면서 방점이 여기 있다고 강조했지만, 다들 군자삼락에만 관심을 보어더라는 안타까운 그 구절^^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같이 있지 않다.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가 사고가 없으면, 첫째의 즐거움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음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孟子曰: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

 


릴케 현상 2007-02-0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밍아웃이라니 양파껍질처럼 자꾸 벗겨야겠군요^^ 만화를 재밌게 본 터라 영화를 굳이 볼 맘이 안 드네요~

마늘빵 2007-02-0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 묵가철학의 의미 말고 그냥 서사영화로 보기엔 그다지 아니었죠. 아 중국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승주나무님께 좀 배워야겠습니다.
선책님 / ^^ 벗기면 너무 야해요. ㅋㅋ 근데 이게 만화도 있어요?? 그건 몰랐는데;;

비로그인 2007-02-0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가에서는 묵가에서 내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답니다. 이론일 뿐, 사람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남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처럼 결코 사랑할 수가 없지요. 하하

잠깐 들렀답니다. 아프락사스님.
멋진, 깊이있는 리뷰입니다.

통상적 의미의 이기주의대신 '개인주의'라는 훌륭한 어휘가 있지요.


마늘빵 2007-02-0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들르셨군요. 네. 그것이 유가의 묵가의 차이죠. 유가가 묵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관점의 차이인데 그것이 나 개인의 문제로 들어가면 그렇죠 달라질 수 밖에 없죠. ^^
 



* 스포일러 경고

  종교영화 혹은 어떤 영적인 계시에 관한 영화인줄 알았다. 그런데. 가족영화라고. 정말이지 내내 영적인 영화로서 받아들이던 내게,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도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 영화를, 어디까지 참아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영화관람의 중점이 되었다. 끝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엔딩 크레딧 올라가더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대개 영화는 무슨 영화인지 자세한 내역을 모른 채 봐야 제맛이지만 이 영화는 시시콜콜 다 알고 봐야 이해할 수 있다.



* 친절하고 자상한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자식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관심이냐 간섭이냐. 

  미국에는 실제로 영화에서와 같이 '내셔널 스펠링 비'라는 철자 맞추기 대회가 있는데, 이는 만 16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참가하여 순전히 집중력과 기억력에 의거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회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종교학 교수인 아버지 사울은 그의 딸 엘리자가 어른들도 모르는 글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기억해내는 능력을 발견하고선 이 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는 믿고 있다. 딸이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사울에 딸과 철자대회를 준비하면서 아내와 아들에게 소홀해지고, 아내와 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외된 자신을 드러낸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되뇌이는 말마따나 신비한 빛의 조각들을 모으는데 주력하고, 아들은 유대교를 배신하고 힌두교에 몰입함으로써 '이유있는' 반항을 한다. 화목했던 네 명의 '가족구성원'은 이제 각자가 관심갖는 것들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고 '가족'은 무너져간다.



* 화목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 가정의 평화는 사소한 부분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어긋남은 지속되기 쉽다.

   영화는 잔잔하게 화목한 가정이 서로 어긋나고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느누구도 이 영화가 그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접하게 된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감독은 새로운 형식의 가족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아무런 메세지도 전달하지 못했고, 그다지 볼 거리도 없다. 종교와 영적인 교류 등등을 끄집어내어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를 만들려했지만 하나도 안 있어보이고, 양념이 되어야 할 것이 주가 됨으로써 주요내용은 사라지고 양념은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 채 뒤섞였다.

  스코트 맥기히와 데이비드 시겔, 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는 이번이 첫번째가 아니다. 2001년 <딥 엔드>라는 아직 보지못한 -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 영화를 함께 만들었고, 이번이 두번째 공동작이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볼거리가 없다면 메세지라도 뚜렷해야 하는데 메세지도 없고 볼거리도 없고 영화의 장르조차 의심케 만든다. 처음엔 스릴러일줄 알았다. 잔잔하게 다가다 이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구나, 싶었는데 그도 아니었다. 참 애매하고 모호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내 시선을 주목한 것은, 리처드 기어. 나는 그의 얼굴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푸근함이 좋다. 사람이 참 따뜻하다, 라는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체조장학생으로 메사추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가 2년 뒤 연기에 뜻을 두고 곧장 뮤지컬에 몸을 던졌으며, <그리스>의 주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영화에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참 많은 영화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다지 흥행한 작품은 많지 않고 내가 그를 접한 것조차 <귀여운 여인>과 <자칼>이 전부다. 이제 50대 후반을 달리는 그지만 연기에 나이가 따로 있으랴. <다섯번째 계절> 이후 <플록>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던데 이건 개봉했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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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아 정말 포스터 야하다. 누가 다 벗고 나온 것도 아니지만 세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하나는 뒤에서 껴안고 하나는 풀어헤친 가슴 사이로 손 집어넣고 또 하나는 그의 아래에서 관능적인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나도 비밀이 있다. 그러나 비밀은 비밀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나의 입을 통해 누군가의 귀로 전달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은 나만이 알고 있다.  



   - 재즈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즈보컬리스트 미영은 자유연애주의자이다. 그녀는 매달리는 남자 싫고, 돈 많고 부티도 좀 나고 잘생기고 튕기는 남자를 좋아한다. 오늘도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어디 잘 생기고 뽀대 좀 나는 남자 없나 물색하고 있다. 에이 오늘은 영 꽝인데. 어 가만가만 지금 들어오는 저 남자 좋은데? 저 주문하시겠어요? 남자가 이럴 때 데낄라 한잔 딱 주문해야지. 저 데낄라 주세요. 네? 좋아 감이 좋아. 제 전화번호에요. 오빤 내 남자야.

 

 "사랑은 원래 벼락처럼 다가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 나는 대학원생이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책이 좋아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삶이 좋으며, 시를 읽고 시를 논하는 그럼 남자를 만나고 싶다. 잘생겼으면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남자라면 오케이다. 그런데 내 주변엔 그런 남자가 없다. 그런 남자가 언니 주변에 왜 있어. 좀 남자를 찾으려면 돌아다녀야지 집구석에서 책만 보고 있는데 남자가 어디서 나타나?! 아니야 사랑은 벼락처럼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오는거야. 그런게 바로 사랑이야. 나에게 벼락처럼 사랑이 다가왔어요. 동생의 그 남자가.  근데... 섹스는 어떻게 하는거죠? 막내동생 방에서 몰래 비디오를 가져와서 봐야겠어요. 책도 보면서 연구도 좀 하고요.



"세상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두 가지 감정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걸 몰라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요. 지금 내 마음이 어떤가가 더 중요한거 아닌가요. 나중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아닌."

  -  아휴 배만 잔뜩 뿔룩 튀어나와가지구는 쇼파에 드러누워 킁킁 코를 골고 씻지도 않아 냄새나고 입에는 먹다남은 안주거리 묻혀놓고 자는 저 남자 내 남편입니다. 내 남편은 나보고 가족끼리 섹스를 어떻게 하느냐고 그럽니다. 그래 너같은 남자랑은 섹스하고픈 마음도 안생긴다.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섹스할 생각이 드니. 뭐 결혼이 다 그런거죠. 그렇게 그렇게 살고 그러다 늙고 가는거죠. 결혼이 별건가요. 나는 나보다 내 남편과 내 아이를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만족하렵니다. 그런데 귀엽다 이 남자. 나보고 이쁘댄다.

- 이제부터 저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잊지 못할 비밀 한 가지씩을 만들어줄거에요. 미영이? 좋아해요. 사랑스럽고 이쁘고 귀엽잖아요. 애교도 많고 몸매도 이쁘고. 하지만 미영이 언니 선영이도 매력적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처녀인데다가 한번 당겨주면 그냥 다가올거 같아요. 이런 여자 쉽죠. 하지만 순수한 매력이 있어요. 아 미영이의 결혼한 첫째 언니 진영씨요? 진영씨 이쁘죠.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에요. 사랑에 굶주렸어요. 남편과 아이에게 시달리며 자신의 사랑을 잊어버린거죠. 이런 여자요 쉬워요. 몇마디 칭찬과 위로면 충분히 넘어오거든요. 거봐요. 벌써 제 위에 올라와있잖아요.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비밀에 관한 영화다. 사랑에 관한 영화다. 사랑의 비밀에 관한 영화다. 내 친구의 애인을 좋아해본 적이 있나요. 애인이 있는 줄 알면서 접근해본 적 있나요. 짝사랑하는데 말도 못하고 혼자 마음 졸이며 삭히고 있지는 않나요. 결혼한 여자인데 나의 첫사랑인데 왜 아직도 포기못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는걸까요? 사랑에 관해선 무수히 많은 비밀들이 가능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드러내지 않은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륜이건 사랑이건 아니면 하룻밤의 쾌락이었건 어떤 식으로 이름붙이건간에 모두 비밀이다. 쉿.  

  <누구나 비밀이 있다>는 자유롭고, 도발적이고, 권태감을 느끼는 각각의 세 여자들이 '이상적인 너무나 이상적인' 한 남자와 느끼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말한다. 영화는 사람들이 지겨운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리얼리티 티비 프로그램과 같다.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런 생각들을, 때로는 섹시한 여자, 때로는 지적인 여자, 때로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 것만 같은 여자를 골고루 사귀어보고픈 남자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또 여자들 역시 마음에 들지만 내 동생 혹은 내 친구의 애인인 그를 내 남자로 만들고 싶은데 도리상 그리 할 수는 없고 감추어진 속마음을 영화를 통해 투영하고 바라보며 대리만족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영화 속 수영에 의한 세 여자와의 치정극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걸 알기에 그만 우리의 꿈으로부터 '깨몽'한다.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고, 그것이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사람들은 마음 속에 겹겹이 꼭꼭 싸매고 감추려든다. 그 비밀을 말하는 순간 나는 누군가로부터 머리 쥐어 뜯길 수도 있으며, 유치장에 들어갈수도 있으며,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며, 친구와 절교를 해야할 수도 있으며, 또다른 차원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버리고 떠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밀이 나중에라도 발각될 우려가 있다면, 그것이 두렵다면,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때의 사태가 무섭다면, 어쩌면 비밀을 살짝 내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때 일어날 사태를 내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비밀을 간직할 자신이 없다면 솔직한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다만 이 또한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어야 한다. 때로는 비밀보다는 솔직함이 상대방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영화 속에서와 같은 비밀은 털어놓으면 복구불능의 사태를 불러오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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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2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나름 좋아해요. 이병헌의 매력이 잘 풍겼던 영화 같아요. ^^
요즘 나온 영화에선 좀 덜하더군요.

마늘빵 2007-01-2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괜찮게 봤습니다. ^^ 각기 다른 세 여자의 연애관과 처지도 재밌고, 중간에서 그들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병헌의 매력도 돋보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