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2. 1 예스24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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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기주의와 묵가 철학으로 바라본 <묵공>
참으로 재미있는 영화가 나왔다. <묵공>이라. 한중일 합작영화라 하여 시선을 끌기도 하였고, 유덕화가 안성기 주연이라는 점을 앞세워 홍보하며 관객을 끌어보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노력"에 그쳤을 뿐, 언제 한중일 합작영화가 흥행한 적이 있던가. 그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몇 사람이 모여서 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합작영화지, 그 이상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한중일"은 무슨, 영화를 본 바로는 철저히 중국영화다. 주연이 유덕화와 안성기라고 하지만 안성기는 묻혔고, 유덕화는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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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 10만 대군의 수장, 항엄장(안성기 분). 말이 한중일 합작이지 안성기의 역할은 "지위"만 높았지 "비중"은 높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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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의 철학에서 바라본 <묵공>
<묵공>은 묵가학파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 묵가학파를 옹호(?)하는 책이 나왔더랬다. 김시천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은 중국철학의 역사에서 사실상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만이 기억되고 있는 오늘날, 묵가라는 저들 사이에서 기지개 피다 잠들어버린 한 학파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주의는 진정한 이기주의의 의미가 아니며 다른 관점에서 이기주의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삐딱하게 보면 말장난과도 같지만,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였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이기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이는 대인의 이기주의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대인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데 - "권유"의 수준을 넘어 "강요"의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 누구나 다 대인이 될 수는 없으며, 소인은 소인의 삶을, 대인은 대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대인의 삶이란 그 자리가 큰 것에서 생기지, 사람이 큰 것에서 생기지 아니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대인의 삶을 살길 고집함으로써 빚어진다. 많은 소인들이 대인의 자리에 있을수록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이 많아지게 된다.
영화 <묵공>에서 천하통일을 앞둔 조나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양성함락을 위해 진군한다. 고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구를 합해봐야 인구 4천명밖에 되지 않는 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10만 대군에겐 너무 쉬워 보인다. 양성은 묵가학파에 원군을 청하지만, "혁리"라는 이름을 가진 단 한 사람만이 이들을 도우러 왔다. 단 한 사람이 1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비웃음은 잠시뿐, 조나라의 10만대군 중 5천명이 순식간에 시체로 돌변했다. 혁리는 양성에서 조나라를 물리치고 그 사이 백성들과 군사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대왕과 그의 충신들은 그를 시기하여 처단할 궁리를 하게 되고 결국 혁리는 그들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았다. 이후 양성은 다시 철군하고 남은 고작 천여 명의 조나라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백성은 피 흘리고 대왕은 조나라의 항엄중 앞에 무릎 꿇는다.
소인은 누구이고, 대인은 누구이며, 누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대인의 자리를 넘봤는가. 소인은 양성의 대왕이었으며, 대인은 혁리였고, 대왕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인의 자리인 대왕의 자리를 고집했다. 혁리는 대왕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그러나 대왕은 혁리를 두려워했고 그를 몰아냈다. 어찌 대인의 자리에 있어야 할 자는 여인이 주는 하찮은 신발조차 받기를 거부하며, 어찌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는 대인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소인임을 드러내는가.
이 영화는 단순한 서사시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 장르의 영화에서 바라보기엔 이 영화는 너무나 재미없고 지루하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다면 영화의 재미는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혁리와 대왕, 그리고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부하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엔 대인의 자리를 탐내는 소인들이 너무나 많다. 고요히 소일을 하며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대인의 자리를 탐내다 보니 갖은 말썽이 생기고, 큰 일이 틀어진다. 오히려 대인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이다. 각자 제 자리를 찾아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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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가학파의 혁리로 나온 유덕화. 그가 연기한 혁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묵가의 일원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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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공>으로 바라본 묵가의 철학
유가학파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듯 묵가학파는 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묵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언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주로 이야기되는 바로는, 그의 성은 "묵"이요, 이름은 "적"이다.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살았으며, 당시 유가의 공자와 함께 가장 두드러진 사상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묵자의 사상은 공자에 묻혀 그리 칭송받지 못했다.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두 사람이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쉽게 비교해보자면 - 도식화는 매우 위험하지만 -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해봤을 때 묵자가 공자보다 더 공동체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공자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묵자에 비교해 봤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따로"와 "함께"는 구분되어야 하며, "따로 노는 것"은 "함께 노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로 노는 것"에서 온갖 미움과 멸시, 공격, 억압, 교란 등이 생겨났고,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함께 노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 같이 위하여, 상대방을 자신과 같이 위한다면 모든 악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묵가의 주된 사상은 "겸애"로 요약되며,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바로 묵가학파의 겸애사상을 이야기한 것으로, 모든 백성들이, 모든 나라들이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사랑함으로써 "함께 사는" 세상을 실현하자는 말이다. 혁리가 조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것은, 그가 "사랑"으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첩자라 하여 죽이지 않고, 적군이라 하여 죽이지 않는다. 적을 물리치되 죽이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단지 최후의 방법으로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적을 죽임을 택할 뿐이다. 5천의 조나라 군사의 시체가 성의 안팎에 널려있는 것을 보고, 군사와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파 이들을 묻게 하는 마음이 바로 "겸애"이다. 첩자라 하여 백성들에게 몰매 맞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구해주는 "겸애"이다. 자신을 내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겸애"이다.
묵자는 "백성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다. 주린 자가 먹지 못하는 것, 추운 자가 입지 못하는 것, 그리고 피로한 자가 쉬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였다. 이것만 보면 묵자의 철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듯 하지만, 오히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오는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한 집단의 최대 행복은 그 집단의 가장 가난한 자의 행복과 연결되지 않지만, 가장 가난한 자의 행복을 우선시함으로써 집단 전체의 행복을 도모한다면 구성원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다. 양성을 지켜낸 혁리는 양성 전체의 행복보다는 백성 한 명 한 명의 행복을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첩자라 하여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는 그를 구하려 스스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묵자의 철학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한국이라는 집단 전체의 행복을 위해 경제발전을 우선시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라는 집단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들의 행복을 우선시하면서 집단의 행복을 도모할 것인가. 관점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집단 구성원의 행복도는 달라질 것이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진 않겠다. 대답은 영화를 본 그대들에게 있다.
글/ 트로피컬 빠숑
* 커밍아웃.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트로피컬 빠쑝은 접니다. -_-
그래스물넷에서 영화칼럼을 맡았습니다. 리뷰인지 칼럼인지 구분은 잘 안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