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2007. 7. 16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6312&ref=76&m_type=0



 
* 스포일러 경고 

  개봉한 지 좀 시간이 흘렀고 이름 높은 영화평론가들에 따르면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아님에도 내게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영화이다. 생명보험회사와 고객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화의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매일 신문 재테크란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의 의뢰로 전문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조언을 해준다. 현재 빚이 얼마가 있고, 연봉은 얼마이며, 생활비는 얼마를 쓰고 있다. 은행저축보다는 적금을 매달 얼마씩 들고 있는데, 좀 더 효율적인 재테크 방법이 없겠느냐고 문의를 하고, 일단 적금은 만기가 찰 때까지 놔두시고 이후에는 적립식 펀드 해외형, 국내형 분산투자하시고, 청약부금에 가입하시고, 보험에도 얼마씩 넣으라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취업을 하고나면 일단 생각하는 것이 월급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 하는 점인데,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보험에 가입하고 매달 얼마씩을 넣으며, 적금과 펀드를 이용해서 나름 재테크라는걸 시도한다. 그래봐야 종잣돈도 없는 이들에겐 남들따라 흉내내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번듯한 집 하나 전세로 얻기도 힘든 판이니 어쩌랴. 먹여살릴 자식있는 결혼한 가장의 경우,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자신과 아내에게 생명보험을 들어놓고 나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을 위한 미래에 대비하기도 한다. 나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남은 자식들은 어찌하냐는 지극히 이타적인 사고(<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이런 것도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길이길이 보존하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로 비춰지겠지만).




* 검은집의 내부는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미로처럼 새로운 공간이 나온다. 이 집의 외양새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빛의 제국’은 하늘은 맑은데 집과 그 주변은 깜깜한 밤처럼 보인다. 신태라 감독이 미술팀에 보여 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과 제국' 이 영감의 실마리가 됐다고 한다. 

  영화 <검은집>은 이토록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 위에 현실적인 공포를 덧씌운다. 언젠가부터 보험이란 제도를 통해 우리는 보호받고 있다. 보험사는 나름대로 수익을 내는 이익집단이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수익을 내고 우리는 우리대로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한 순간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생물학에는 r 전략과 K 전략이란 것이 있는데, r전략은 곤충처럼 수많은 자손을 만든 다음 거의 내버려두는 방법이고, K전략은 인간처럼 소수의 자식을 에지우지하면서 키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 <검은집>의 원작인 기시 유스케의 소설 <검은집>의 등장인물 기나이시는 이렇게 보험회사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변화를 설명한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특히 자식을 소중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K전략자이지요. 옛날에는 잠시 눈을 떼기만 해도 아이가 죽어버리는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모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부모 없이도 자식이 자랄 수 있게 되자 r전략의 상대적 유리성이 증가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식을 만들고 싶은 만큼 만들어두고 내동댕이쳐도 사회가 돌봐주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식을 남길 수 있지요. 즉, 자식을 열심히 키우는 것보다, 자식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전략이 유리해져 버린 것입니다."(p242)

  결국 언제 닥칠질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제도 중 하나인 보험이 약자를 보호해주는 사회제도의 역할을 넘어 냉혹한 r 전략자를 증가시켰다는 말. 생물학을 공부해보지 않은 필자로서는 소설 속의 대사에 불과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사실여부를 떠나 적어도 우리네 현실이 냉혹해지고 있는건 사실이다. 바로 이 r 전략자의 전형적인 사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사이코패스'이다.

  사이코패스. 어떤 국어사전에도 사이코패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없다. 동일명의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본 바로 간단하게 사이코와 사이코패스를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사이코는 살인 자체에 목적을 두고 행동한다. 살인 이후의 어떤 쾌감을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사이코라면 사이코패스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이 따로 있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살인이란 방법을 택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이코패스에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양심이 결여되어있다.  

  영화 속에서는 이런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별하는 방법으로, 웃거나 우는 사진을 여러장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웃는 사진을 분류해낼 수 있다면 정상인이고, 구별하지 못한다면 사이코패스라는 말이다. 그들은 타인의 웃고 우는 감정의 변화모습을 구별해내지 못한다. 즉 타인의 감정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보통사람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 중에 사이코패스가 섞여있다고 한다. 그들은 겉으로보아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내 친구와 가족, 회사동료들 중에서 사이코패스를 찾아낼 수 없다. 양심이 없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다면, 사이코패스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치는 척, 반성하는 척은 할 수 있어도, 뉘우치거나 반성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이봐 이제 나올 때도 됐잖아? 나는 참을 만큼 참았어. 제발 부탁하는데, 꼭 돈이 필요하다구!" "죄송합니다. 본사에서 결정하는 일이라서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해 달라고 재촉해보겠습니다." "나는 보험료를 냈잖아! 비싼 보험료를 한 달도 빠지지 않고 냈단 말이야. 그런데 아이가 죽었는데도 왜 보험금을 주지 않는거야?" 

  매일 같이 뉴스에 보도되는 애인, 친구,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이들의 소식은 더 이상 우리에게 놀랍지 않다. 얼마전 다시 본 영화 <공공의 적 2>에서 보여지는 돈많은 재벌회장 한상우는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이고, 이어 자신을 추척하는 검사 강철중을 죽이려한다. 탐욕과 이익을 위해서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겐 가혹하다. 골프채를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고, 때로는 이용해먹기 위해 기꺼이 맞는 일도 감수한다. 많이 배웠지만 양심이 결여된 그는 똑똑한 만큼 상황을 역이용할줄도 안다. 반면 작은 불의로운 일에도 내 일처럼 나서서 부정의를 시정하려하고, 정의감으로 똘똘뭉친 강철중과 처자식도 떠나버린 부장검사 김신일은 한상우와는 정반대편에 머물러있다.

  모든 연쇄살인범들을 사이코패스라고 할수는 없지만 그들 중 다수인 사이코패스는 같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죄의식과 죄책감이란 것이 없으니 사람을 죽이기 한결 쉽다. 영화 속 신이화는 자식을 자살로 위장해 보험금을 타고, 박충배의 손가락과 나아가 두 팔을 자름으로써 추가로 보험금을 타냈다. 그리고 묻는다. "혹시 이 남자가 죽으면 보험금을 탈 수 있나요?"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생명보험이라는 것이 가족구성원을 죽여가면서 보험금을 받아내는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단 영화 속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뉴스거리도 안되는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자살로 위장해 살인 한 후 보험금을 받아내는 그들이나, 남편이나 아내가 죽은 뒤 우연히 언젠가 가입된 거액의 보험금에 기뻐하는 이들은 얼마나 다른가. 전자는 사이코패스라 칭하고, 후자는 일반인이라 칭할 것인가. 전자와 후자는 정도의 차이일뿐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나이 많으신 여자분의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며칠 후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더라. 가입한지 몰랐던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보험금을 받았고 그걸로 새 집을 사서 들어갔다. 얼마나 다행이냐고. 잘됐다, 라고 하기보다 다행이다, 라고 했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지극히 일반적인 현대인의 모습이고 아마 같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목적과 고의적인 행위가 전제된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렇지 않다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건 아니지 싶다. 물론 전자와 후자는 엄밀히 구분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이 들어가야겠지만, 사람사는 모습은 전자와 후자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유전적으로 희귀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일반인의 15% 에 불과해서 타인의 감정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또한 양심도 결여되어있다. 물론 후천적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화학 성분의 과다축적으로, 임신 중에 병에 걸리거나 약물로 뇌에 손상을 입는 경우에도, 장시간의 스트레스에도 후천적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고 한다.



* 연극배우 강신일씨는 공교롭게도 사이코패스 영화에 거듭 출연했다.  <공공의 적> 1,2 는 사이코패스 영화라 홍보하지 않았지만,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다. 첫편에서 자신의 부모를 무참히 살해한 조규환과 뒷편에서 돈과 야망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 형 등을 죽인 한상우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닐런지. <공공의 적>과 더불어 <검은집>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도 탁월했다.     

  범죄는 날로 흉악해지고 잦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뉴스에도 쉽게 당혹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티비 뉴스와 신문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하는 것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나에게, 나의 가족에게, 나의 친구에게 닥치지 않는 한 딴 세상 이야기고 결코 난 그런 잔혹한 범죄로부터 벗어나있다고 생각한다. 닥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이런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들이야말로 사이코패스가 아닐런지.

  얼마전 일본 기차에서 한 젊은 여성이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떤 남자로부터 성추행받고 있었음에도, 그 여자가 도와달라고 소리쳤음에도, 그 열차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직접 나서지 못한다면 전화로 신고를 할 수 있고, 달려가 차장에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여자는 기차 뒷편 화장실에서 성폭행 당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성폭행범만의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그저 성폭행 당한 여자가 재수가 없었으려니 하고 말 일인가. 처벌은 물론 성폭행범이 받겠지만 침묵하고 바라보던 그들 모두 유죄이다. 사이코패스는 어떤 특수한 유전적 결함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전두엽의 기능이 일반인의 15%에 불과한 양심을 결여한 이들 뿐 아니라, 부정의를 당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서도 나서지 않는, 아무렇지 않은, 우리 모두는 사이코패스이다. 

  맹자는 인간에겐 네 가지 선한 마음이 있다 하였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인데,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논증하기 위해 맹자는 측은지심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았다. 그는 분명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아이를 구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위험에 처한 아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은 측은지심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인 '수오지심',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 등도 우리 인간의 내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무릇 이같은 네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사이코패스라 불리우는 특별한 문제가 있는 어떤 병자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네 가지 본성이 결여되어있음을 느낀다. 사이코패스와 일반인을 분류하고 그들을 병자취급하는 우리들 또한 사이코패스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맹자는 <맹자>의 '공손추'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이는 모두 계발시켜 채워갈 줄 안다. 불이 처음 타오르고 물이 처음 솟아나듯이 진실로 사단을 계발시켜 채워갈 수 있으면, 온 세상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계발시켜 확충해가지 못한다면 부모조차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약자를 보호한답시고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지만, 정작 약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부작용만 속출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노라고 새로운 법을 만들었지만 정작 비정규직은 예전보다 더욱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 최근 발생한 이랜드 사태는 대표적인 사례다. 맹자의 네 가지 선한 본성은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키워나감으로써 확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계발하지 않고 자신의 선한 본성을 버려둔다면 그것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지름길이요, 열심히 계발해 확충한다면 그것이 '사람'이 되는 지름길일 것이다. 사이코패스가 되고 사람이 되고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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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6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16 15:03   좋아요 0 | URL
앗 찔리시다니요. 속닥님이요? 그럴리가요. :)

비로그인 2007-07-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되게 땡기네요. 난 영화는 별로일것 같더라구?
그러고보니 난 이미 사이코패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크흐흐...

마늘빵 2007-07-16 17:31   좋아요 0 | URL
아니 체셔님이 왜 싸이코패스에요? 이거 영화도 재밌고 책도 재밌어요. 책은 영화가 다루지 못하는 저런 류의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싣고있어서 생각해볼 거리를 찾기엔 더 좋습니다. 이런 영화는 집에서 티비나 컴퓨터로 보면 실감나지 않을거고, 극장서 봐야 제 맛이 납니다.

프레이야 2007-07-16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쓰셨군요, 아프님.
연쇄살인범들의 뇌를 연구하고 싸이코패스를 정의하던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납니다. 15% 정도의 양심만으로 버티려는 우리가 싸이코패스의
혐의에서 풀리기란 쉽지 않겠어요. 양심을 콱콱 찔러대는 글..^^
강신일은 다른 영화에서도 참 연기를 잘 하더군요.

마늘빵 2007-07-16 18:1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 프로그램을 보고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이코패스에 대해 관심이 깊어져서. 강신일씨의 <진술>이란 연극을 대학로에서 봤는데 대단했습니다. 또 한다면 꼭 보러갈겁니다.

네꼬 2007-07-1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감당하지 못해서 못 볼 것 같아요. =_= 무서워.

마늘빵 2007-07-16 18:16   좋아요 0 | URL
ㅋㅋ 네꼬님 좀 무섭긴해요. 집에서 보면 별로 안무서울거에요. 영화관에서 보면 무섭지만. 무섭다기보다 소름끼치죠. 무엇보다 현실감있는 영화라.

푸른신기루 2007-07-16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힝.. 영화보고 싶어요..ㅠ_ㅠ

마늘빵 2007-07-16 21:33   좋아요 0 | URL
이거 재밌어요. 평은 별로인데 난 재밌었는데... -_- 너무 나 믿지는 마삼. ㅋㅋㅋ

비로그인 2007-07-16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 게다가 듀나의 평을 본뒤에 볼까 말까...하고 있어요.

마늘빵 2007-07-16 22:29   좋아요 0 | URL
책을 먼저 읽으셨군요. 책이 어쩜 더 재밌고 깊이있을수도 있어요. 영화를 먼저 보는게 나았을텐데. 한번 보세요. 강신일씨의 연기에 주목하면서. :) 듀나가 이 영화 평도 썼었나요? 듀나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비로그인 2007-11-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영화 봤어요. 삭제된 부분이 있었으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를터인데. 넘 많이 잘라내서 으응?했어요. 여하간 원작의 기시 유스케도 나왔고, 유선 연기 잘하더군요. 황정민씨는 으으음...여하간, 책보다 덜, 그러나 듀나의 평보단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여기서 깨달은 점: 영화평 보고 가서 영화보지 말자.
 

2007. 5. 22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668&ref=65&m_type=0




* 스포일러 경고

SF 천재 작가로 불리우는 필립 K. 딕의 원작소설 『골든맨』을 영화화한 <넥스트>는 소재 자체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액션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실제 소설 속 주인공의 초능력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그 배경은 미래라 하지만, 영화에선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고, 배경 또한 현재이다. SF는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내지는 변형ㆍ조작을 통해서 미래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런 기본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SF 느낌이 나지 않을 밖에. "필립 K. 딕" 원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들은 영화 시작 전 머리 속에서 "필립 K. 딕"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마술무대에 서는 크리스 존슨. 사실 그는 마술사가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2분 먼저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자 행운이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마술쇼로 생계를 이어간다. "내"가 개입된 사건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2분 뒤의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고, 이미 조금 뒤의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예측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단 2분은 충분히 나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다음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2분이지만 잠깐의 2분은 이후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

언젠가 버스 안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그 여자 참 마음에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을 할까. 언제 내가 그 여자를 봤던 것도 아니고, 잠깐 버스 안에서의 우연한 스침일 뿐인데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어느 광고처럼 "저 지금 내려요" 라고 말하고 내려버릴까, 아니면 막무가내로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하고 대놓고 데이트 신청을 할까, 그도 아니면 그녀가 내리는 정거장에서 같이 내린 다음 "도를 아십니까" 하고 접근할까. 여러 가지 가능한 작업들을 떠올려보고 2분 뒤를 예상한다. "저 지금 내려요" 했더니 대답이 없다,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그랬더니 그냥 내려버리더라, 그런데 "도를 아십니까" 했더니 "어머! 저 도에 관심 많아요" 하고 대꾸하더라. 어떤 방식이 그녀에게 먹힐지는 시도하기 전엔 모른다. 하지만 2분 뒤를 예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쑥맥이어도 작업은 통한다.

내 삶의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분 뒤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나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버스 안의 그 여자와 내게 그저 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함께 가는 정도가 정해진 운명의 전부였다면 나는 운명을 거부하고 그녀와의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잠깐만 기다려. 좌측 12시 방향을 겨냥해.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는 크리스는 여러 목숨 살려냈다. 하지만 이 기이한 능력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평범한 삶은 떠나갔고, 나는 지금 여기서 이들과 함께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또 어디에.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주어진 일정한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원인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도 생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이 없으며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신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신의 변치 않는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말이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 이것은 다시금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무한히 진행한다." (『에티카』, 스피노자 저, 강영계 역, 서광사, 116쪽)

결국 내가 자유롭게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모든 행위의 원인에는 원인이 있고, 그 앞의 원인이 있고, 무한히 소급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크리스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리즈가 오게 된 것도, 거기서 그녀를 쫓아온 남자를 만나게 된 것도, 현실에서 오늘 내가 영화 <넥스트>를 혼자 보러 간 것도, 극장을 용산CGV로 택한 것도, 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 현금인출을 한 것도 모두 나의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내가 고통에 처했을 때도 그것은 운명이니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도, 우리집의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것도, 남들 연봉 3000만원씩 받아가며 차 굴릴 때 학자금 대출 갚아가며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모두 운명이니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통은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확실히 인식할 때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주어진 상황과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왜 남들 자가용 끌고 다닐 때 나는 버스를 타야 하는가, 왜 이 좋은 여름날 남들 이쁜 사랑 나누며 데이트할 때 난 방구석에서 타자 치고 있어야 하는가, 기타 등등의 현실 속에서 왜 그것이 필연적인 일인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극복 가능하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건 정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산다면 자기존재를 보존하면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였다.

 

영화 <매트릭스>는 저리 가라. 네오는 빠른 몸놀림으로 총알을 보고 피했지만 크리스는 저격수의 위치도 모른 채 네오보다 어설픈 동작으로 총알을 피한다. 멋대가리 하나 없지만 총알 피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다. 지금 외제 스포츠카 굴려가며 떵떵거리고 살던 사람이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지금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소설을 써서 작가로 등단할 수도 있다. 고통과 불행은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행복 또한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불행한 운명은 우리의 2분 후를 예측함으로써만 행복한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고통과 불행을 미리 차단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현실의 인식"은 바꿀 수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너 없이는 못산다, 차라리 죽겠다, 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 내가 너 아니면 못사냐, 두고 봐라 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난다, 고 마음을 다잡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나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다. 함께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나의 고통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2분 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크리스 존슨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명 못난 외모와 허술한 옷차림, 어눌한 말투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리즈에게 접근해 작업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의 특별한 능력을 써먹기 위한 FBI와 악당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능력도 아니며, 내 인생의 미래를 바꿔주지도 못할 것이고, 나 혼자만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지금 당장은 유용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아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대학입학을 앞두고 어느 대학을 가야할지, 결혼은 언제쯤 할지, 배우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게 적성에 맞는지,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의 궁합은 어떤지, 심지어는 내 성격은 어떻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내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고 들어줄 맞장구쳐 줄 사람이 필요해 점집을 찾는 것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시원하게 결정해주고 이 길로 걸어가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내 인생은 결국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고, 내 결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남에게 맡기는 건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긍정적으로, 내 인생의 결정은 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는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극복하고 깨고 나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오늘 고통을 겪지만 이후에 다가올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만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다 괴롭고 힘들다. 다만 처해있는 상황과 현실이 다를 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고 현재의 고통만 느낄 뿐이다. 2분 뒤 미래를 예언하려고 하기보다 지금 처해있는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현명하게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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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5. 9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511&ref=61&m_type=0

 

* 스포일러 경고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여선생 장귀남(박솔미 분)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그녀가 범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 분)이 마을주민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니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범인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고 의견이 나뉘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결말이 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대개의 추리소설류에서 볼 수 있는 마무리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명확히 드러나는 것 하나 없는 결말과 미궁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건, 그 사이에서 극장을 빠져 나온 관객들은 두뇌게임을 즐긴다.

수많은 추리들이 가능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우성(박해일 분)이 범인이라고 가정하자. 박해일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자신이 연구하던 신약 실험을 감행하기 위해 "보건소장"의 신분으로 마을에 잠입했다. 마음씨 좋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보건소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2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사람 사는 맛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간다.

조용한 섬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살인사건. 아니 살인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밤새 고스톱을 치던 세 사람이 엉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는 사실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은 모여서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놀라움에서 "누가 범인일까?" 라는 의심 품은 의문으로 넘어간다. 범인을 찾자. 분명 이 섬마을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짓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이다. 사건 그 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목격자를 찾아보자. 그러나 사건발생일로부터 날이 지날수록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 하얀 가운 입고 해맑게 웃는 박해일이 범인이란 말인가.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인 이 사람이 정말로 범인이란 말인가. 의심하라.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건소장 제우성은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섬마을 주민들을 택했고, 그들에게 처방해주는 약 안에 실험물질을 넣음으로써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고자 했다.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실험이 그들 몰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잘못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실험에 임했다. 그렇다면 애초 좋은 목적을 가지고 행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가 발생했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일까.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제우성의 잘못일까.

의무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는 의무론과 결과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를 판단할 때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중시하는 반면,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길거리에 지갑이 떨어져있다. 열어봤더니 안에는 현금 5만원과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주인에게 연락해서 직접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현금 5만원만 쏙 빼고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흔히 전자를 착한 행동으로, 후자를 악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착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행위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신분증 사진을 보아하니 내 또래의 이쁜 여학생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냥 돌려주느니 이렇게라도 인연을 만들어 그녀와 어떻게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둘째, 5만원 다 가져가고 지갑 버리는 건 양심상 못하겠고, 주인에게 돌려주면 사례비로 조금 떼어주지 않을까. 사례비면 내가 부당하게 취한 이득도 아니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다.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넷째, 지갑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이 불쌍하고 갖다 주면 행복해할 거 같아서. 그 외에도 행동의 몇 가지 원인을 더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지갑을 돌려줬다면 그는 의무론자요, 넷째 지갑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행복을 돌려주기 위해 지갑을 줬다면 그는 결과론자다. 의무론은 그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론이고, 결과론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나 목적을 따져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론이다. 의무론에서는 의도만 좋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용서가 되지만, 결과론에서는 의도가 좋더라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거꾸로 나쁜 의도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과론에서는 허용되지만 의무론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제우성이 범인이라고 할 때 -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애초 신약 개발이라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살인과 자살이었다. 의무론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고, 결과론에서 봤을 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잘못을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의무론자로 분류되는 칸트의 경우,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의무로 부과했고, 따라서 우리는 의무에 따라서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 칼을 빌려줬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시일이 됐으니 칼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굉장히 흥분해있었고 내게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말을 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렇다. 내가 친구에게 칼을 빌린 것이 사실이고, 약속한 시일이 다 되었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흥분한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 나의 의무는 거기까지이고, 이후 그 친구가 실제로 그 칼로 누군가를 죽였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주어진 의무에 따라야 한다. 선한 동기, 선한 의도에 따라 의무를 다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든 괜찮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의무가 더 들어가 있다.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이지만,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지켜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동기와 의무만을 우선하는 의무론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건소장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신약을 개발해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에 의해서 실험을 했고, 비록 죽음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바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 혹자는 박해일이 아니라 박솔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생존했고 박해일의 노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미 영화를 본 나로서도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는 머리 속에 명확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그 혼란이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영화는 혼란한 틈새에서 홀로 빠져 나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 안에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범인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결과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정말 잘못이 없을까. 결과론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자. 결과론은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 이론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의무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의도나 의무보다는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도덕 원리이다. 결과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도덕이론이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표어다. 엄밀히 들어가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엄격히 다르지만, 대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공리라는 것은 한 집단 내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벤담을 계승해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20명도 안 되는 섬마을 주민들을 다 희생해서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하겠다. 그는 그들이 모두 희생될지를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설령 모두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면 그보다 몇 백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험대상이었던 마을 주민이 모두 죽었다면 그건 실험에 성공한 것이 아니므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준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이들에게 투여해서 효과를 봤어야만 다른 이들에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가져다줄 이익은 이들의 생존을 전제한다. 제우성은 실험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실험 결과 더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지도 못했으므로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유죄다.

마무리 발언

제우성이 무죄이건 유죄이건 영화 속 섬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강한 의무감은 때로 도덕적 광신을 불러온다. 제우성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자신에게 부과한 강한 의무감으로 무장했고, 결국 강한 의무감은 도덕적 광신 상태를 불러왔다. 그는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을 대상으로 무작위 실험을 했고, 실험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에게 살해되건 스스로 자살하건 그도 아니면 미쳐버리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살겠다는 사명감을 지닐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짐을 지울 필요도 없다. 아무런 의무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지나친 의무감을 자신에게 지운 자 역시 자신에게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32명을 살해한 승희-조가 어떤 작은 분노에 의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보겠다고, 거기에 일조해보겠다고 그랬는지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있었고, 자신의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정화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승희-조뿐 아니라 의무와 사명감이 광신으로 나아간 사태는 곳곳에 널려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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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넘 멋쪄! *_*

비로그인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굳~! ㅡ_ㅡb

마늘빵 2007-05-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네꼬님과 테츠님께서 좋으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속마음1 : 니가 좋은거야 당연하지. 니가 쓴건데.
속마음2 : 아니다. 내가 쓴거래도 맘에 드는건 별로 없다.

비로그인 2007-05-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난 어렵지... ㅠㅠ...

antitheme 2007-05-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스포일러 경고
이글 때문에 내용은 안봤어요.
담에 영화보고 나서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5-0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엄...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 그런가봐욤. 내가 어렵게 썼나? -_-a
안티테마님 / 넵. 스포일러 경고에요. 영화 보실거라면 이후에 보세요. :)

fallin 2007-07-2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의무론과 결과론..쉽고 재밌게 설명 잘하시네요ㅋㅋ 칸트의 칼이야기..과제때문에 읽었던 플라톤의'국가정체'라는 책에서도 나왔던 거 같아요. 철학이란 게 가끔은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또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도 같고...암튼 영화와 철학을 참 잘 접목시키셨어요..잘 읽고 가요 ^^

마늘빵 2007-07-25 22:28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제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_- 그간 읽어온 책들에서 영향을 받았겠죠. 칼의 예는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것이고. 이런거 저런거 다 빼고 나면 남는게 없습니다. 크흣.

kitsch78 2009-03-2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이거 무슨 뜻으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네요. 칸트의 정의가 당연히 '보편적 입법 원리'를 준칙으로 삼은 언명인데,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라는 말씀은 왜 나오는 건지?
말은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네요.

마늘빵 2009-03-21 11: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건 조승희가 어떤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일을 저질렀다면(가정과 추측), 사건을 벌인 조승희의 그 의무는 광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의 의무감이 아닌.
 

예스24  2007. 3. 12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4673&ref=41&m_type=0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꿈꾸는 자의 현명한 선택

<드림걸즈>는 60~70년대를 풍미했던 다이애나 로스의 여성 그룹 ‘슈프림스’를 모델로 삼고 있다. 다이애나 로스의 일방적인 인기로 팀명은 "다이애나 로스 & 더 슈프림즈" 로 개명되었다가, 그녀의 탈퇴로 인해 그룹은 해체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의 프로듀서 베리 고디 주니어는 프로 권투선수 출신이었으며, 1961년 디트로이트 출신의 플로렌스 발라드, 메리 윌슨, 다이애나 로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계약을 성사시켰다.  ‘슈프림스’는 하루 사이에 스타가 되었고 1964년 ‘Where Did Our Love Go’가 첫 No.1 히트를 기록한 이후 5년간 총 11번의 No.1 히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왼쪽부터 로렐, 디나, 에피. 원래 에피의 자리는 가운데였지만 그녀는 그룹 전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팀을 떠난다.

고등학생인 이들은 어느 경연대회에 참여했고 그녀들이 가진 모든 재능을 다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등을 따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 있던 매니저 커티스에 의해 인기가수 제임스 썬더 얼리의 코러스로 투입되고, 서서히 대중의 귀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서는 재능과 열정만으론 부족하다. 온갖 뒷거래와 홍보가 있어야 하고, 오디오뿐 아니라 비디오도 되야 한다. 에피는 노래는 최고였으나 얼굴과 몸매는 아니었다. 커티스는 과감히 에피를 내려 앉히고 비디오가 되는 디나를 리더로 내세워 텔레비전을 장악한다. 재능이 있고 열정이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결국 비디오는 떴고, 오디오는 졌다.

디나는 에피의 남자친구 커티스와 결혼을 했고, 최고의 부자가 되었으며, 무대에서는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광고와 영화 섭외가 밀려드는 인기를 얻었다. 반면 에피는 아버지 없는 딸을 낳아 키우고 노래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다른 일을 못해 생활고를 겪는다. 그녀는 그 동안 함께 했던 멤버들로부터, 남자친구로부터, 오빠로부터 버림받았고 홀로되었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있고, 진심은 통하게 되어있다. 혼이 담긴 진짜 음악을 하겠다며, 정말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겠다며,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세 명의 드림걸즈는 네 명의 드림걸즈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핑클. 왼쪽부터 이효리, 성유리, 옥주현, 이진

나는 <드림걸즈>를 보며 그룹 "핑클"을 떠올린다. 물론 핑클이 영화 속 드림걸즈와 같은 멤버들간의 불화와 소동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게 드림걸즈의 에피는 핑클의 옥주현과 자꾸만 겹친다. 핑클이 활동을 중단한 현재, 이효리와 옥주현은 떴으며 이진과 성유리는 분야를 바꿨다. 이진은 엠씨로, 성유리는 탤런트로. (솔직히 공식적으로 해체한 적은 없다고 하지만 이 정도의 공백과 이 정도의 개인별 활동이라면 사실상 해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핑클이 처음 무대에 섰을 때, 사람들은 이진과 성유리와 이효리를 좋아했고, 옥주현은 거기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가수로서의 이진과 성유리는 빛을 발하지 못했으며, 가수로서 이효리와 옥주현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효리야 원래부터 인기가 있었고 그것이 극대화되었다고 보면 그만이지만, 옥주현의 환골탈태(?)는 가히 "대단"을 넘어서 "존경"할 만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의 팬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옥주현은 네 명의 멤버 중 얼굴도 몸매도 가장 안 되었더랬다. 그러나 모든 노래의 클라이막스는 옥주현이 소화했으며 그녀 없이는 핑클은 생각할 수 없었다. 옥주현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솔로활동을 했고, 동시에 운동과 다이어트를 통해 살을 빼고 성형수술을 함으로써 대변신을 감행했다. 사람들은 현대 과학기술의 힘이다, 라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나는 그녀가 대단하다 생각한다. 긍정적인 의미로.

드림걸즈의 에피는 목소리가 개성이 강하고 세다는 이유로, 얼굴이 못생기고 몸매가 안 된다는 이유로 리더에서 물러났고 이를 참지 못해 결국 그룹을 떠났다는 점에서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들의 말마따나 그건 에피가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핑클의 옥주현은 데뷔 당시 다른 세 명의 멤버에 비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때로 팬들에게 서운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스스로 힘겨운 노력을 통해 카메라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을 시도함으로써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드림걸즈가 실제 활동했던 미국의 60~70년대와 2007년 대한민국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에피는 자존심 지켜가며 그룹 탈퇴를 감행했고 고난의 세월 끝에 더 나이 먹고 늙은 모습으로, 9살 딸아이를 키우는 아줌마의 모습으로, 이전보다 더 뚱뚱한 모습으로 재기했지만, 2007년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회의적이다.

 

데뷔 때와는 다른 현재 옥주현의 모습. 그녀를 싫어하는 이들도 그녀의 각선미만큼은 인정해준다.

오디오냐 비디오냐. 예전에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길거리를 다녔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손에 TV를 하나씩 쥐고 길거리를 다닌다. 예전에 사람들은 밤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기 위해(엄밀히는 "보기 위해") TV를 켠다. 가수의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을 듣는 대중의 주요관심사가 아니다. 요즘의 대중은 가수의 목소리보다는 가수의 얼굴에 주목하고, 얼굴과 몸매가 된다는 전제하에 그들의 목소리와 노랫말을 듣는다. 특히 여가수의 경우는 남가수의 경우보다 더욱 심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런 시점에서 옥주현이 목소리로 솔로 활동에 승부를 건 것과 동시에 솔로 성공을 위해 스스로 피나는 다이어트와 꾸준한 운동 등의 자기관리, 성형을 감행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춤을 춰도 별로 티 나지 않는 통통녀가 요가 비디오를 낼 정도의 몸매를 소유한 날씬녀가 되었고, 그것이 운동과 다이어트와 더불어 현대과학기술(성형)의 힘이라 하지만 그녀는 모든 비난으로부터 결백하다. 아무리 재능과 열정과 실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외모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가벼운 오디션 통과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며, 음반녹음과 정식가수활동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자존심 센 에피는 2007년의 대한민국에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2007년의 대한민국은 재능과 열정에 앞서 외모를 가꿀 것을 주문한다. 재능과 열정은 그 다음이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뚱뚱녀는 재능과 열정이 있었음에도 뚱뚱한 외모 때문에 무대 위의 누군가를 대신해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꿈을 위해 현실과 타협할 것이냐,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꿈만 꿀 것이냐. 둘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면 전자를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때로 현실과의 타협이 반드시 꿈의 실현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분명 무대에 오르기 위해 외모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재능과 열정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재능과 열정이 결여된 채 이쁜 외모를 가진 이는 단지 가수를 지망하는 이쁜 아가씨일 뿐이다. 옥주현이 가요 무대와 뮤지컬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외모 이전에 재능과 열정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오디오냐 비디오냐. 오디오보다 비디오의 힘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디오뿐 아니라 비디오도 소리를 지닌다는 사실은 잊고 있는 듯 하다.

무대 위에서 과감히 바지를 벗어제끼며 무대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얼리는 말한다. "난 영혼이 담긴 음악을 하고 싶다고. 더 이상 이런 간드러지는 발라드는 하지 않겠어." 발라드건 알앤비건 디스코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는 영혼이 담긴 음악을 하고 싶었다는 것일 뿐. 혼이 담긴 음악은 호화 출연진이 나오는 뮤직비디오나 가수들의 일상생활을 담아낸 오락 프로그램에서보다는, 가만히 눈을 감고 들려오는 노래에 집중할 때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내 마음을 울리는 멜로디와 노랫말은 내 눈보다는 내 귀를 통해 들려온다. 보여지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이 댄스나 디스코의 장르라면 더더욱. 그래서 눈을 가리라 말하지 않는다. 귀를 열어라. 음악을 소비하는 대중에게보다는 음악을 "제작"하는 기획사에 하고픈 말이다.

* 드림걸즈를 보며 핑클을 떠올리고, 에피를 보며 옥주현을 떠올리는 건, 지극히 나의 주관에 기인한다. 두 그룹과 두 사람은 엄밀히 같은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성장과정을 겪지도 않았다. 더욱이 핑클에서 옥주현이 차지하는 위치와 대우는 드림걸즈의 에피의 그것과 시작부터 달랐다. 그럼에도 "나의 주관"이라는 핑계를 삼아 드림걸즈로부터 핑클을, 에피로부터 옥주현을 도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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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1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스에도 올리시는구나...^^
잘 읽었어요.
옥주현씨에 대한 제 느낌은 글쎄... 지금은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가 없겠네요.
드림걸즈를 보고서 비교한다면 또 모를까.
좋은 밤입니다 :)

마늘빵 2007-03-12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마니아페이퍼라 해서 몇명 뽑아서 하는건데, <묵공>이후로는 글이 제 스스로 썩 맘에 들지 않습니다.

다락방 2007-03-1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주현에 대해서라면 저는 뭐 잘 모르니 할말은 없지만
각선미보다 얼굴이 더 예쁜것 같아요. 요즘엔. ^^;;

아, 그리고 전 이 영화 보고싶었는데 못봐서 너무너무 화가나요. 제니퍼 허드슨의 노래, 꼭 듣고 싶었는데 말이죠. 흐음.

마늘빵 2007-03-1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레이>를 보셨다면 그걸 떠올리시면 돼요. 스토리 전개나 내용이나 비슷합니다. <레이>의 레이로 나왔던 제이미 폭스가 여기선 커티스라는 매니저로 나오죠.
 

 2007. 2. 27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4493&ref=34&m_type=1





  * 스포일러 경고 

<바람피기 좋은 날>은 바람에 관한 영화다. 한 남자와 결혼식장에서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그 순간, 혼인의 기쁨을 표현하는 키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다. 지금의 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일부일처제는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한 남자와 한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는 사회적 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사람에게 어떻게 단 한명의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본성상 그럴수도 없을 것이고, 그것이 법적 도덕적 강요가 되면서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깨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강요는 반드시 일탈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강요하는 내용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책이다.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심심하고,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생각하는 이 여자. 인터넷 챗팅을 시작했다. 누군가를 집으로 불러내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쉽게 수다 떨 수 있는 이 기분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바람을 목적으로 그런건 아니고 대학 초창기에 PC통신을 통해 챗팅하는 것이 낙이었던 때가 있었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과 만나게 되기도 했지만, 인터넷 채팅방 속의 그녀는 밖으로 연결되지 않기 마련이다. 외모도, 이미지도, 분위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팅은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중독성이 강했다.  

 명랑무쌍 대담녀 '이슬'과 아무것도 모르는 개념없는 대딩남 '대학생' 한 커플, 남편 잘 챙기고 전형적인 주부로서 손색이 없는 '작은새'와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증권맨 '여우두마리' 한 커플. 그들은 그렇게 채팅방에서 만나 각기 오프모임을 갖는다. 심심하고 외로운 두 남녀가 채팅방에서 만나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속에 가득 심어놓고 현실에서 실제로 만나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은 너무나 설레인다. 게다가 기대 밖의 훈남과 섹시녀가 나온다면 더더욱.



* 신기한듯한 표정으로 노골적으로 대학생을 훑어보는 이슬. 나이차는 좀 나지만 쭉쭉빵빵한 섹시 아줌마가 나와서 기분좋은 대학생. "야 지퍼내려볼래?" "지금요....?" "응" 이쯤 되면 선수다.  

 

- 이슬과 대학생

테이블 양쪽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이슬과 대학생. 더 생각할 거 뭐있어. 대학생의 머리 속엔 오직 그녀와 하고싶단 생각 뿐. 이슬 또한 다르지 않다. 노골적으로 니거 크냐, 잘하냐, 에이 잘못할거 같은데, 핀잔을 주지만, 안다. 벌써 데리고 놀고 있다. 주도권은 이슬에게 넘어갔고, 오로지 대학생은 그녀의 허락만을 기다린다. 볼 거 뭐 있냐, 일단 벗기고 보는거지. 교외 한적한 러브호텔로 데려가 본격적으로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아니 탐닉하기 시작한다. 간지럽히고 서로의 성감대를 찾고 이불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모른다. 침대 위의 두 남녀는 어느새 땅바닥에 누워있고, 카메라로 보이는건 오로지 그녀의 다리 한짝과 대학생의 상반신.  



* "얘기 좀 해줘요" "응 내가 여자팬티 속으로 ... " "아니 그런거 말고. 줄거리 있는거" "응. 저기말이야. 지하철을 탔어. 내 앞에 있던 여자가 치마가 짧았는데... " "좀 더 재밌는걸로" "응 알았어.... 그러니까... " 이 여자 참 어렵다. 섹스 한번 하기 힘들다. 무슨 요구사항이 이리도 많은건지.



- 작은새와 여우두마리 

    처음이라 어색하다던 작은새를 위해 여우두마리는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했다. 모텔로 데려갔더니 안하겠다지, 답답하고 미치겠는데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한번 해보려는데 말을 안듣네. 내숭이야 진심이야. 콘돔이 없어서 싫단다. 그래서 콘돔을 사왔다. 그런데 이제는 술을 한잔 해야겠단다. 술을 사왔다. 술이 부족하단다. 그래서 또 사왔다. 그리고 침대에 눕혔는데 마음이 안따라준단다. 와 정말 모텔방까지 들어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답답허다. 그런 그녀가. 돗자리 가지고 야외로 나가 깔아놓고 나보고 누우랜다. 노팬티로 나온 이 여자는 이제 여기서 내 위에 올라타겠다고. 어떡하면 좋냐. 서서히 이 여자가 부담스러워진다.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 
 



 * "야 너 어디야" "뭐 이 00놈아. 니가 어딘지 알면 나 잡을 거 같아? 못잡아 너는." 바람피고 이렇게 당당한 여자가 어딨을까 싶다. 빽빽 소리지르고 약올리고 울고불고 난리치고 다시 바람피우고. 아주 고단수다.


- 바람의 조건

  바람의 첫번째 조건, 사랑하지 말 것. 바람이 사랑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바람으로서 의미를 사라진다. 사랑하지 말지어다. 그러나 어디 내 마음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더냐. 그저 한순간 억압된 결혼생활로부터, 너무나 지루하고 평범한 결혼생활로부터 일탈하고 싶었을 뿐인데, 한 순간의 일탈은 영원한 일탈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사랑한단 말은 서로에게 오르가즘을 선사하기 위한 최상의 섹스를 위한 도구로서가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 되어버렸고, 한쪽의 도구로서의 말과 한쪽의 진심어린 말은 관계의 어긋남을 예고한다.  

  이슬은 남편에게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빽빽 소리지르며 산을 타고 도망다니고, 엄마와 오빠가 대동한 친구 집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잘못했다고 사랑한다고 남편을 껴안음으로써 잠시 멈춘다. 이 여자 정말 전략적이다. 진심이 아니란 걸 아는 남편은 이후에도 미행을 시키고, 그녀는 남편이 진정된 사이 007작전을 펼치며 어린 대학생을 차에 때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참 재밌겠다. 짜릿하다. 어쩌면 그녀는 이걸 즐기는지도. 인생이 이렇게 재밌어야 살만하지 않은가. 대학생이 좋아서가 아니라 쫓고 쫓기는게 좋아서 바람피는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즐긴다. 그러나 작은새는 결국 여우두마리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그를 향해, 어떻게 하면 그녀와 한번 더 해볼까 돌진하는 그를 향해 목발이 부러지도록 쥐어 패주고 나오며 눈물 훔친다. 바람의 마지막과 사랑의 마지막은 이렇게 다르다.

- 바람의 결말  

   대개의 바람은 좋지 않은 결론을 맺는다. 일부일처제에 동의하지 않고, 나의 정념을 어찌할 수 없는 이라면, 애초 둘이 아닌 홀로를 택해야 할 것이고, 역시 홀로인 이와 만나 서로를 즐기면 그만이다. 즐기다 사랑하면 동거하라. 결혼하지 말고. 동거하다 틀어지면 헤어지라.  서로를 붙들지말고. 상대의 진심을 믿고 결혼한 나의 배우자에 대한 예가 아니다. 한쪽의 진심과 한쪽의 거짓은 필경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줄 수 밖에 없다. 바람은, 그것이 바람이기 때문에, 평온하고 따분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이기 때문에 더 많은 쾌락을 안겨주는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내가 누군가에게 얽매여있다는 사실은 짜릿함을 선사해주는 필수요소다.

  바람핀 자는 자신의 배우자를 여전히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라. 당신이 사랑하는 배우자가 당신의 쾌락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음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 있음을. 들키지 않고 바람핀다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들키게 되어있다. 그것이 바람의 마지막 법칙이다. 바람피기 좋은 날. 당신의 바람지수를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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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0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영화 디비디로 봐야겠어요. 재미있겠어요.
님의 영화평론글들이 모두 재미있고 감칠맛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