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근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권력
임형택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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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새삼 재인식한 것들이 있다. 우선 학술대회의 발표문들을 모아서 이렇게 꽤나 뚜렷한 주제의식의 책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부럽고 또 좋다.


'전통'이라는 것은 무수하게 다양한 기억들 중에서 일부 편집해서 생성해낸 것이라는, 이미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을 기본 주제의식으로 한다.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이 이미 벌써 30년도 더 된 책이다.


아쉬운 것은, 전통에 대한 개념사적인 정리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제외되어 있다. 고미숙 선생의 글은 기존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것을 비판하며, 가족 안에서 여성의 역할, 연대하는 여성 등을 홍명희의 <<임꺽정>>을 바탕으로 조명한다. 가장 세밀하게 다루어져야 될 부분이, 과연 1920년대에 쓰인 <<임꺽정>>과 실제 조선전기 임꺽정 사이의 간극이고, 이 1920년대 산 소설을 조선시대 풍속사의 증거로 다루어지기 전의 '사료비판'의 과정이 부재하는 지점이 아쉽다.


박노자 선생의 글은 계속 주지하지만, 가끔 까먹게 되는 20세기 초 한반도의 담론과 '동아시아적 시야'의 필수성을 일깨워준다. 신채호의 민족, 국수개념이 양계초와 어떻게 이어지고, 또 이것이 19세기 일본의 '정교사' 집단의 개념에서 어떻게 발원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신채호의 유학적 베이스가 어떻게 민족, 국수 개념이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서술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당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이념을 '국가주의'로 생각했던 단재가, 유교의 '효의 논리'를 받아들여서, 단군의 자손으로서의 '우리 민족'을 상정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신분을 초월해서 '가족'이라는 '우리'를 만들고자 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원래 유교에서 임금-아비/신하-어미/백성-자식들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고방식 아닌가? 충담사의 안민가에도 그렇고, 군군, 신신, 민민. 동몽선습에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가족'이라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군 아래 '평등'한 가족이 아니라, 위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단재의 유학적 세계관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그의 민족주의, 아나키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조금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진경환 선생은 결국 '누구의 전통'을 강조하면, 서발턴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전통'이라는 것 자체가 '지금-여기'의 정체성 요구와 관계되는 것으로 본다.


홉스봄 이후 30년.. 우리 학계에서 조금 더 발본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근원적으로 '전통'이라는 개념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거나, 이 '전통'이 현재 학문에 미친 영향 같은 것을 현재 학위논문들이나 소논문들로 추적하는 작업도 좋았을 것 같고.. 아니면 아예 관 담론들 분석 등으로, 정말 '지금-여기'와 연결시키는 작업이 보다 진척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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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의 영웅주의 - 최남선과 이광수
서영채 지음 / 소명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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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선생님의, "아첨의 영웅주의", 소명출판, 2011. 을 읽었다.


여러가지 생각꺼리들이 많이 생겼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식민지성'이 얼마만큼 결정적이고 큰 차이인가? 언어의 억압, 정치적 대표를 뽑지 못하는 제한? 일단 후자는 소위 ‘내지인’들과 얼마만큼의 차이를 지니는가? 더 나아가 오늘날의 상황과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가? (오늘도 식민지의 연속이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나라는 모든 다른 나라와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결국 식민지가 아닌가.) 즉 식민지임으로 인해서 ‘굴절’된 근대성이, 식민지가 아님으로 인해서 ‘굴절되지 않은’ 근대성을 지닌 제국과 비교한다고 했을 때, 제국 안에서도 특정한(가상적) 주체를 제외하고는 결국 식민지인과 매한가지가 아닌가? 일본 안의 오키나와 같은 예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농부들, 지식인 안에서도 계급과 권력의 유무, 젠더 등등을 생각해보면, 과연 ‘식민지성’이 그렇게 큰 결정 요인일까? 


식민지적 근대성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어떤 '민족'이나 국가가 근대성의 수신자인자 발신자인지, 또 제국체제에서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근대성의 특징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를 각 제국의 근대성과 어떻게 다른지, 이것이 제국간의 근대성과의 차이보다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것인지, 아니면 제국 간의 근대성의 차이는 논의할 여지가 없이 '공통'적인 것인지도 논의되지 않는다. 영국의 근대성, 네덜란드의 근대성, 혹은 영국 캠브리지의 근대성과 룩셈부르크의 차이? 영국 중산층 이성애자 여성과 독일 하류층 동성애자 남자 사이의 어떠한 '공통성'? 이러한 차이들은 모두 지워지고 어떤 '서구적 근대성'이라는 형태로 제시되는데, 이것은 증명되지 않은 자명한 공리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그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족이나 국가를 단위로 해서, 어떠한 '근대성'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경계는 물론 유의미한 경계이지만, 다른 수 많은 경계들과 함께 있다.


구체적으로는 특히 최남선 신체시에 관한 논의가 흥미롭다. 거칠고 단순한 논의이지만, 최남선 시의 형식과 주제에서부터 출발해서 근대성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한 논의까지 과감하게 이어낸다. 최남선 신체시의 형식은 주지하듯이, 완전히 정형적인 것은 아니지만, 각 연은 유사한 형식을 되풀이한다. 한자로 표현하자면, 定形은 아니지만 나름의 整形이 있는 것이다. 이를 서영채는 보편성에 맞서는 특수성, 전체성에 맞서는 개별성으로서의 주체성의 원리와 연결된다고 본다. 사실 쉽게 생각하면, 기존 시형식이나 노래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을 창안했다는 것 자체가, 주체성의 원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별적인 규범으로서 기존의 보편적인 규범을 대체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기존 한시의 규범이나 시조, 가사, 창가, 민요 등의 노래에서의 규범이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그냥 ‘규범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과감한 논의는, 이렇게 보편성에 맞서는 특수성, 전체성에 맞서는 개별성으로서의 주체성의 원리를 모더니티의 핵심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모더니티’ 개념을 이렇게 사용한다면, 그렇다면 이옥 등의 18세기 ‘새로움’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모든 외적이고 전체화된 혹은 중심화된 원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을 탄생시키는 것, 또한 국민국가의 형성에 기본적인 이념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그리고 모든 전통적 규범을 거부하고 자아의 개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의 낭만주의 예술 등이 모두 이러한 주체성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근대성의 상징인 것이 아닌가.” (241)

  그리고 그렇다면, 이 근대성이라는 것은 이념형이며, 유독 ‘식민지’인 조선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제1세계’에서도 문제가 된다. “모든 외적이고 전체화된 혹은 중심화된 원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 사회의 꿈이다. 이는 언제라도 서영채 교수가 말하는 ‘사회적 근대성’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즉 이념형으로서의 ‘근대성’을 논의하는 것이라면, 서영채 교수가 근대시의 이념형을 ‘모든 외적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고립된 개인, 고독한 개인의 독백을 전제’하지만 최남선은 오히려 웅변이나 방백에 가깝다고 비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목은 고민을 하게 한다.

“청년 지식인 최남선이 처해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제국주의적 현실 속에서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국가 자체의 존립과 안위였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말하고 있는 최남선에게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관념적(추상적) 주체- 개인 주체- 문학적 주체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구체적) 주체 –집단 주체 –민족적 주체의 길이다. 최남선이 어느 노선에 있었는지는 명확하다. (...) 그에게 우선적인 것은 당연히 민족적 주체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국가의 존립이 무너진다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최남선은 계몽의 방식으로 잡지라는 매체를, 그리고 시라는 형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현실 사회의 제도를 떠나서는 존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둘이 서로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제1세계에만, 곧 보편사적 경향이었던 근대성의 본거지, 계몽이성의 본거지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이미 그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권화로 변모해 있는 그곳에는 국권에 대한 그 어떤 위협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제1세계의 지식인이자 시인이었다면 이 둘은 서로 조화로울 수도, 그리고 그는 집단 주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 주체의 자유와 평등을, 그리고 문학 자체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길을 따라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253)

  간단히 설명하면, 국권 자체를 빼앗긴 식민지인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미적 근대성’을 추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근대성, 또는 ‘민족 주체성’을 추구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를 제1세계와 비교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다. 제1세계의 지식인-시인이 ‘미적 근대성’만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의 예가 있을까?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같은 프랑스, 혹은 릴케 같은 독일(어권), 또는 파운드나 엘리엇 같은 영미 시인? 이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들이 제국주의 또는 한 국가의 정치나 국권의 상황과 무관하게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집단 주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 주체의 자유와 평등을, 그리고 문학 자체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길’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실행된 사례가 있을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말라르메의 시를 그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제1세계에서 집단 주체를 무시하는 것만큼, 제3세계에서도 집단 주체를 무시하며 시를 쓸 수 있다. 이는 단지 식민지인가 아닌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미적 근대성 논의와 함께 ‘식민지적 근대(성)’이라는 것이 어떠한 완성된 형태의 ‘(제국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무언가로 논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당연히 제국은 식민지를 전제한다. 제국의 근대성(이란게 있다면)이는 결코 자족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와 함께 창출되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식민지 근대성과 제국의 근대성은 쌍생아이지 부자관계가 아닌 것이다.

  

2015, 독서일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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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사서함 문학과지성 시인선 357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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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용기 -박라연


끼니 걱정
집 걱정하는 이웃을 위해
간판 하나 내걸고 싶을 때 있다


천상의 시간에서나
맛볼 냄새
식물들이 밤새워 지은 밥상을
받을 수 있는


새나 곤충
식물들의 운과 명이 번져
끼니도 집도 허공에게서
노지에게서 하사받을 수 있는


허공과
노는 땅을 실어 와 분양해주는


占집 같은 간판들을 여기저기
덧걸고 싶을 때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참 마음에 들다가, 읽을수록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화자는 끼니 걱정, 집 걱정도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만은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지만, 끼니 걱정 안 하는 식물, 새, 곤충들에 생각이 번진다. 허공과 노는 땅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은 누구는 몇십채의 집을 소유하고 누구는 집이 없어 걱정하며, 필요 식량보다 생산 식량이 많은데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그런데 과연, 식물, 새, 곤충은 끼니 걱정을 안 하고 사는 것일까? 말라죽은 풀, 고속도로에서 터진 내장을 드러낸 새, 잡아먹히는 곤충들.. 나는 자연 대 인간이라는 상상력의 구도자체가 불편하다. 원초적 어머니, 풍요로운 대지로서의 자연과 이에 반대되는 인간의 구도. 이 또한 인간의 특권화가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점집 같은 간판'을 덧거는 어떤 공상, 미신의 영역으로 갈무리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손가락 의자 -박라연


더 이상은 날 수 없다는 듯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더 이상은 바라봐선 안 될 한계 그늘에서


쉬고 있는 내 여윈 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옆 사람에게 미안했지만


심장 박동 수가 비슷해서 굴러 온


축복이려니, 조심조심 지친 숨을


다독여주었다 기댐과 돌봄 사이에


행여 금이 갈까 두려워


온몸에 쥐가 나도록 한결같았는데


어쩌나! 엄지손가락에 다른 잠자리가


또 내려앉아 심장 박동 수를 맞추게 하니!



이런 시는 참 부럽다. 섬세한 화자의 마음은 '옆 사람에게 미안했지만'이라는 구절로 잘 표현된다. 늘 이웃을, 옆 사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냥 잠자리 한 마리 내 검지에 내려앉은 것 뿐인데, 옆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내려앉은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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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사라전종횡기 (개정판) (전11권) 사라전종횡기 (개정판)
수담 옥 / 알에스매니지먼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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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서사는 지루하다. 삼국지와 같은 거대 단체들의 전쟁을 무협지 세계관에 이식한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전술들은 평이하다. 비추하는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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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5-01-1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협도 읽으시네요.

무협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괘나 알려지신 분으로 기억하는데... 별로인가봐요...

기인 2015-01-14 00:08   좋아요 0 | URL
네 ㅎㅎ 그래서 저도 읽어봤는데, 너무 별로였어요 ㅜㅠ
 
최남선 평전 - 우리 근대와 민족주의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 한겨레역사인물평전
류시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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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현 교수는 최남선 전공자인 역사학자이다. 그런 필자인 만큼, 많은 자료들을 주석으로 제시해서, 최남선이 어떤 글을 썼는지 궁금하거나, 그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평전을 썼다.

그러나 두 가지 정도 아쉬운 점이 있다. 가장 근본적으로 최남선이 어떤 '인물'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도 고민을 했을 것이고, 후회를 했을 것이며, 유혹도 당했고, 또 사랑도 하고 아이도 길렀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소거되어, 오직 최남선이 쓴 글에 대한 내용 정리만이 있다. 따라서 인간 최남선의 내면이 전혀 들어나지 않는다. 


평전이니만큼, 최소한 어떤 서사를 바랬다. 최남선은 이런 인물로, 이런 교육을 받아서 이런 사고체제 하에서 이런 글을 썼는데 이 때 그의 심정은 이랬고, 당시 사회는 이랬다... 등의 내용을 바란 것은 과한 욕심이거나 전기에 대한 문학도의 편견일까?(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가 내가 상상하는 좋은 평전이다.) 이 평전은 거의 그의 저작들에 대한 시기별 정리에 그칠 뿐이다. 그가 반일에서 친일로 전향할 때의 고민 등에 대한 저자의 추정이나 상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까? 역사학자로서는 자료가 말하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료 안에 인물의 내면까지 복원하지 못하면, 이는 온전한 의미의 평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또 최남선은 한국문학사에서 신체시로 유명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시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언급이나 서술이 없다. 아무리 역사학자가 필자라고 하지만, 이에 대한 서술은 문학연구들을 참조해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남선의 문학가로서의 면모가 너무 소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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