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이코노미 - 한국의 군사주의. 성 노동. 이주 노동
이진경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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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이라는 트랜스내셔널한 이산적 접속점과 죽음정치적 노동

이 책의 충격적인 지점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노동을 죽음정치적 노동으로 명명하며, 70년대 이래 한국의 경제성장 자체가 이에 바탕한 서비스 이코노미임을 보인다는 점에 있다. 죽음정치적 노동이란 노동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도록 운명지워진, 신체 자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모되어, 비록 실제로 노동자가 죽지 않을지라도 죽음의 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을 의미한다. 푸코의 생명권력이 노동자를 규율화하는 방식으로 삶의 부양을 허용”(40)한다고 했지만, 그러한 생명권력은 죽음정치적 노동에 의해 구성된다. 죽음정치에 대한 위협이 생명권력을 작동시키기도 하며, 죽음정치의 존재가 생명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과 국가의 체제 자체를 존속시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에 따라, 그러한 죽음정치적 노동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군사 노동, 성 노동, 군대 성 노동, 이주 노동이라는 주변화된 노동에 주목한다. 남성중심적 제조업 노동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노동이라 지칭되지 않았던 노동들에 주목함으로서, 일반 노동 자체에 내재한 죽음정치적 특성을 부각하고, 또 그러한 기타 노동들의 유지 자체가 이러한 주변화된 노동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사, , 군대 성, 이주 노동은 여러 층위의 프롤레타리아트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화는 전통적인 농민이나 봉건적 잔재인 농업 노동 종사자가 임금 노동자로서 근대적 산업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것”(39)인데, 이것이 군사, , 이주 노동 등에도 적용되게 확장된다. 군사적 프롤레타리아화는 비릴리오에 의해서 제시된 개념으로, 하급 병사들은 결국 공장의 프롤레타리아화와 동일하게 군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성 노동은 섹슈얼리티 프롤레타리아화이며 이주 노동은 인종 프롤레타리아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도에 주목할 것은,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가 중층된다는 것이다. 인종이 프롤레타리아화하지만, 개별 인종의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고, 섹슈얼리티도 마찬가지이다. ‘최종심급으로서의 계급이 있고, 이것과 인종, 섹슈얼리티가 함께 중층된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군사 노동, 성 노동, 군대 성 노동, 이주 노동은 각각 어떻게 다른 노동들을 구성하고 유지시키는가? 이를 위해 1장에서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군사 노동의 의미를 미국제국과의 연관성, 하위제국으로서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한국 군인과 베트남/한국 성매매 여성과의 관계 등을 통해 조명한다. 여기서 문학 작품은 각 관계들과 연관된 현실, 감정, 이데올로기의 성공과 실패를 보여주는 자료로 기능한다. 미국 제국의 베트남 전쟁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었지만, 결국에는 미국이나 한국에게 경제적인 이유가 핵심이었음이 강조된다. 여기에 한국은 미제의 하위 파트너로써, 노동계급 남성들을 죽음정치적 노동의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전쟁이라는 군사 노동에 동원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정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이를 통해 경제발전을 달성한다. 특히 이는 노동계급 남성들의 섹슈얼리티를 군사 노동으로 동원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민족주의, 이성애적 남성중심주의, 인종주의, 초국가적 반공주의 등의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로 한국의 젊은 노동계급 남성들은 동원된다. 민족을 위해, 강한 남성’/베트남인들보다 우월한 남성으로, 공산주의를 물리치자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문학작품들에서 그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것의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같은 경우 베트남 전쟁은 경제적 전쟁일 뿐이라고 폭로하고, 다른 소설들은 베트남 여성이나 한국의 성매매 여성과 자신을 피해자로 동일시하기도 한다.

 

성 노동은 여성들의 낮은 임금을 유지하며 동시에 남성들의 성적 서비스 제공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측면에서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한다. 농촌 경제를 피폐화하고, 도시의 대중문화에 대한 환상을 퍼뜨림으로써 이촌향도 현상은 가속된다.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에 비해서도 매우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의지적으로 또는 비의지적으로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여성 노동자계급은 빈번한 성폭력에 시달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동원된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다.) 이러한 성노동의 임금은 다시 시골에 있는 남자 형제의 교육비로 투자되어 상대적으로 숙련 노동자나 사무직 노동자를 생산하는 구조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된다. 여기서 문학작품, 특히 남성작가의 문학작품들에서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 중심적으로 전유되는 양상을 다룬다. “여성의 성 노동과 성적 서비스는 물질적으로 (남성중심적) 가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민족적 국가에 의해 이용되며, 그 성-섹슈얼리티 노동의 상징적 가치는 효성스런 딸과 민족적 위안부, 근대화 및 그 사회적 질환의 아이콘 등으로 국가의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들을 더욱 지지하는”(159) 기능을 한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성 노동자와 공산주의 반군의 이미지를 겹쳐놓으며, 󰡔미스 양의 모험󰡕은 결국 성매매 산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여성 노동자 계층의 현실을 그린다.

 

군대 성 노동은 이러한 성 노동의 연장선상에서, 군사 노동을 뒷받침하는 노동이다. 한국의 경우 일본 제국의 위안부문제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는 한국 정부의 묵인 그리고 그 후 적극적 관리 하에 한국 내 미군에 대한 기지촌 관리로 연속된다. 마지막 장의 이주 노동과 이민노동은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이 베트남 군사 노동(일종의 이주 노동이자 대리노동)으로 경제적 축적(당시 수출액의 40%가량)과 미국제국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고, 사우디, 독일 등으로 인력수출해서 자본을 축적했다면, 80년대말 이후 한국은 하위제국으로서 값싼 이주 노동력을 끌어들이고, 해외로 자본을 이동시켜서 자본을 축적하는 시스템임을 강조하고 있다.

 

 

2. 역사와 사회 기술 자료로서의 문학 텍스트의 한계와 제국의 시선

이 책은 문학 텍스트를 자신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사용한다. 그 주장은 문학이라는 장르에 대한 예술적 판단이라기보다는, “베트남에서의 한국의 군사 노동의 문학적 재현을 젠더화되고 섹슈얼리티화된 서비스 노동으로서 분석함으로써, 남성중심성을 비판적으로 재규정하는 일을 시도한다. (..) 군사화된 남성중심적 신체와 인종주의화된 군대 성노동과의 섹슈얼리티적 관계를 검토한다. 1장의 결말에서는 전쟁의 기억과 관련해서, 화해 및 치유 가능성 모색과의 연관성/단절성을 생각해보는 한편, 또한 오늘날 베트남에서의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이해관계와의 연관성(단절성)을 고찰”(88)이다. 당연히 문학 텍스트와 이것이 반영하는 사회의 관계는 중요하고, 연구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여러 차원의 비판적 검토 후에야 가능하다. 문학 텍스트와 사회는 직접적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문학과 사회를 매개하는 여러 층위들이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노동계급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베트남에서의 군사 노동으로 동원하는 한국의 개발적 국가의 역할과, 그런 국가의 전유를 해체하는 군사 노동의 문학적 재현을 다룬다. 이는 가능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정권 차원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선전과 이에 대응하고 이를 균열시키는 문학적 재현은 동일한 층위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책이 문학 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선택할 때, 이미 서구에서 정해진 이론을 바탕으로 그 이론에 부합하는 작품의 부분을 선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사의 꿈은 근대 노동계급의 형성을 노동과 섹슈얼리티의 (상상적인) 신성한 공동체적 통합으로부터 성적 프롤레타리아화로의 이행으로 묘사한다. 성적 프롤레타리아화에서는, 본래 존재론적 활력 자체에 연결된 것으로 재해석된 섹슈얼리티가, ()성적으로 섹슈얼리티화된 노동하는 주체로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황석영이 그처럼 성적 프롤레타리아화의 과정을 자신의 섹슈얼리티의 박탈로 인해 매력을 잃은 신체와 생기 없는 좀비를 생산하는 것으로 여기는 바로 그 만큼, 그에게 섹슈얼리티란 또한 근본적으로 성적-활력적 주체인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성의 진정성 있는 매혹적인 위치가 된다. (112-113)

 

즉 이 책은 우리에게 한국문학 작품에 대해서 어떠한 새로운 발견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서구이론들로 구성된)에 대한 근거로 동원되는 한국문학 작품들의 면면들을 발견하게 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는 기묘하게 미국-제국과 식민지-한국 내지는 제국 미국과 하위제국 또는 주변부 한국이라는 도식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1) 즉 재료로서의 식민지와 가공자로서의 제국-주체. 미제에 동원되고, 이를 배워와 반복하는 한국이라는 도식이 이 책과 같은 미국내 한국학 연구, 그리고 이와 닮은 부분이 분명 있는 한국에서의 한국문학 연구에서 연상된다.

또 이 책은 소설을 어떠한 예술적 장르로서의 재현보다는, 작가의 주장이나 또는 저자(이진경)의 주장을 입증할 사실로 사용한다.

 

창녀를 사면서 적을 죽일 때와 혼융되는 의 의식은 군사 노동의 섹슈얼리티화된 본성을 다시 재확인시킨다. 여기서 주체/승리자는 남성의 위치를 가정하며, /패배자에게는 여성의 위치가 할당되는, 이처럼 (인종주의화되고 계급화된) 젠더적 위계가 전제된 전투의 본질에 접근할 때 폭력적 권력 관계의 구조로서 성 노동의 본질이 입증되는 것이다. (121)

어떤 여성 공장 노동자들의 경우 겸업 성 노동은 빈약한 급료를 보충하는 부수적인 수입의 수단이었다. 예컨대 황석영의 단편 돼지꿈에는 근처 여관에서 남자 반장 등을 고객으로 부업을 하는공장 여공이 나온다. (170)

최근에 군대 매춘의 주제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이 증가했음을 볼 수 있지만, 그런 연구들은 거의 사회과학적 영역에서 시작된 것이며, 민족지학적 현장조사나 경험적인 자료와 정보에 근거하고 있다. 그 같은 기존의 연구와는 달리, 3장에서는 기본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문학적, 문화적 재현들을 검토함녀서, 기지촌과 그곳의 노동자들이 겪어온 변화에 대한 보다 넓은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려 한다. (238)

 

소설의 한 대목을 분석하는 곳이다. 소설의 재현을 근거로 성 노동의 본질이 입증된다거나 사회 현실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소설적 재현을 다루는 이 책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저자의 이미 구성된주장을 확인하기 위한 근거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쟁이 정복 전쟁이라는 황석영의 이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미국의) 해석과 부합한다. (137)

󰡔무기의 그늘󰡕은 미국의 군사적 침입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확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베트남전이나 다른 미국 전쟁이 일차적으로 경제적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구실임을 주장한다. (144)

베리의 세계적인 (그리고 세계화하는) 산업으로서의 매춘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2장에서는 1970년대의 한국 상황에서의 국내매춘을 초국가적 현상의 국가적분편으로 인식하려 한다. (158)

 

이러한 대목이 문학 연구자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텍스트의 내용=작가의 이해=(미국의) 해석이라는 등식은 여러 층위에서 너무나도 단순화된 것이다. 이는 반대로, 미국의 해석으로 작가의 이해를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내용을 재단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워진다. 결국 이 대목이 이 책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보여 지는데, 이는 바로 “(미국의) 해석과 부합하는 한국 소설들의 나열이다. 부언하지만,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많은 새로운 미국의 해석을 접하게 되어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의 문학 연구가 아닌 다른 연구를 적어도 한국에서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 뿐이다. 문학 텍스트를 자료화하지 않고, 이들의 발언을 경청하여 이들의 특수성을 부각하고, 그 이후에 조심스레 보편성과 대화하고자 하는 것.

한국문학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성급히 일반화되며, 저자는 단지 선별된(자신의 주장에 걸맞는) 작품들만을 예로 제시할 뿐이다.

 

기지촌 문학은 다음 장의 주제인 미군 상대 군대 매춘만을 전적으로 다루는 문학을 말한다. 기지촌 문학의 전제는, 여성 매춘의 신체를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주권 침해의 상징적 위치로 알레고리화하는 것이다. 그것을 증언하면서, 기지촌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목표는 훼손되고 축소된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 즉 남성적인 것으로 상상된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76)

 

(난쏘공) 영희의 자기희생은 남성 가장의 가족에게만 바쳐지는 것이 아니며, 남성적 정체성의 노동계급 전체로까지 확대되고, 궁극적으로는 좌파 민족주의에 의해 재규정된 남성중심적 민족에게까지 바쳐지는 희생이다. (...) 남성중심적 좌파 민족주의의 본질 자체는, 노동계급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희생적인 매춘으로 요구하고, 동원하고, 승인하는 바로 그 의지와 능력에 있으며, 그런 희생적인 매춘을 비판적인 민족적 행위로서 궁극적으로 승인하는 데 있다. (179-180)

 

기지촌 소설이 제공하는 그런 남성중심적인 민족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한국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치안하고 규율화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앤 스톨러가 문화적 민족적 위생학이라고 부른 것을 주입시키려 시도하는 것이다. (253)

 

이러한 대목들은 별다른 근거 없이 제시된다. 한국에서 기지촌 문학에 대한 연구라면, 기지촌 문학 작품들을 우선 다 읽고, 이를 분류한 후에 의미화를 할 것이다. 또 난쏘공이 좌파 민족주의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내적으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자료미국독자들에게 쓰는 이 글은, 재빨리 한국의 문학을 재단한다.

 

또 어떤 텍스트들은 충분히 분석되거나 소개되지 않고, 저자의 주장만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경ᄋᆉ 오늘날 이주 노동 활동가들이 따라야 할 원형이나 모델로 암암리에 확립된다는 것은, 한국과 그 밖의 아시아의 주변적 국민국가들 사이의 경제와 민주화 수준의 위계성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일이다. 여기서 한국 노동운동의 교훈은, 자신의 진보주의 자체 안에서 준주변부적 규범화와 하위제국적 보편주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세게 자본주의와 국제정치학의 영역에 존재하는 위계성을 복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353)

 

여기서 성공회대의 이주 노동 활동가를 위한 이수과정을 소개하면서, 거기서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과도하다. 특히, 그 수업의 내용이나 취지에 대한 아무런 확인된 자료도 제시하지 않고서, 이를 준주변부적 규범화와 하위제국적 보편주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것은, 외부자의 시각에서 쉽게 환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보다 세밀하게 그 수업의 내용과 취지를 분석하고, 실제 수업에서 이주 노동 활동가들과 교강사의 상호작용들을 따져봐야 한다. 물론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는 제국-식민지 관계를 떠올리게 하지만, 가르침을 섬세히 의미화하지 않는다면 가르침 자체는 모두 제국적인 것으로 환원될 위험성이 있다.

 

 

 

3. 한국의 60~7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종종 오해되어 비판받는 상상의 공동체개념)이 유의미해지고 급진화되는 계기는 한국에서는 90년대이다. 동구권의 붕괴이후 북한민족과의 연대도 의미가 퇴색되고, 다국적 기업과 자본의 전 세계적 이동이 요청되며,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폭력들(젠더 등의 소수자),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불철저했던 이론틀(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이 반성되었고,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본질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미디어 등에 주목됨으로서 탈신비화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60~70년대, 또는 20~30년대를 바라볼 때 마찬가지의 시각에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미 학계에서는 상식이 된 이야기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그치며, 오히려 당시의 사회적, 담론적 배경 속에서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의미를 탈맥락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 예를 들어, 남정현의 분지를 비판하면서 이것이 미국 제국주의의 미러링이라고 하면서 비판하는 것(248)은 일부분은 옳다. 그러나 미러링 자체가 유의미한 전술일 수는 없었는가?3) 오늘날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유의미한 전술이라고 한다면, 60년대 분지의 미러링 속에 나타난 가부장적 민족주의적 폭력성만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새로운 발견도 가능하지 않게 하며4), 당대의 사회적, 담론적 맥락을 말소하여, ‘지금-여기’ ‘후래자의 시선에서 간편하게 섹슈얼리티적 문맹으로 판정하게만 한다.

 

한국에서 20-30년대 또는 60-80년대를 바라볼 때, 보다 섬세하게 당대 담론들과 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그 속에서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론은 작가론을 참조해야 하고, 주제론은 작가론을 아우르며, 작품의 한 요소의 의미만으로 자신의 주장에 맞게 성급히 재단하면 안 된다. 결국 문학연구는 지금-여기의 시선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매개로 지금-여기의 시선을 반성하고 이를 재구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0~30년대, 또는 60~80년대 민족주의는, 소수자들의 저항의 거점을 어떻게 형성했고 이는 어떠한 효과를 야기했는가, 당시의 담론적, 사회적 가능성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초과되었는가를 섬세히 추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타자에 대한 폭력은 어떻게 반성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한다. 계속 이미 서구에서 구성된 지금-여기의 시선으로 과거를 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재구성할 수 없고, ‘지금-여기는 끊임없이 서구에서만 재구성되고 물밀 듯이 변화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붉은 여왕처럼, 끊임없이 지금-여기는 흘러가버리고 말 뿐이다.

 

또 민족이라는 공동체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는 앤더슨의 논의는, 모든 특정 수 이상의 집단이 스스로를 공동체라고 믿을 때 해당되는 것이다. 민족은 그 내부의 다기한 집단들, 그리고 때로는 서로의 이익이 상충하기도 하며, 민족 내부 어떤 집단이 이러한 모순을 봉합하기 위해 더 민족주의를 유발하고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젠더도 마찬가지이며, ‘세대등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직도 가장 근본적인 집단은 계급’(최종심급)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민족, 젠더 등과 함께 중층결정된다. 민족(인종)이라는 개념을 버릴 것이 아니라, 젠더와 계급, 세대 등과 함께 사유하며 이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더 섬세히 볼 수 있는 하나의 변수로 봐야한다.

 

이 책도 인종, 국적, 계급적 착취의 사실들은, 젠더적 성적 프롤레타리아화와의 동시적인 과정에 의해 항상 이미 혼합되고 복합화”(393)되며, “근대 한국의 트랜스내셔널한 역사기술은, 근대 한국의 구성 자체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던 민족의 범주를 필연적으로 다른 국민국가들의 틈새에, 그리고 인종, 섹슈얼리티, 젠더, 계급 같은 다른 연관된 것들과 민족 범주 사이의 틈새에 놓아야 한다.”(402)라고 결론 내린다. 문제는 텍스트 분석에서의 섬세함인 것이다.

 

 

4. 양가적이고 중층적인 개인과 단일하고 투명한 국가와 제국

 

나는 또한 군사 노동이 본래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위치- 즉 국가의 죽음정치적 권력의 행위자인 동시에 국가의 잠재적 희생자 자신이기도한 역할-를 지니는 것으로 탐구한다. 한편으로 군사 노동은 적(궤멸되어야 마땅한 운명의 사람들)을 정보하고 굴복시키는 국가의 의지를 수행하면서, 또한 병사들-특히 주로 낮은 지위의 병사들-은 스스로가 적에 의해 궤멸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일단의 주민을 잠재적인 소모용의 군사 노동자로 동원할 능력이 국가에 있는 한, 나는 국가가 이미 그들을 그 자신의 죽음정치적 권위에 예속된 주체로 구성함을 논의한다.” (93)

 

여기서 국가라는 것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이는 행정 권력의 중심으로서의 정권의 의미를 넘어서며, 국민의 대표라는 의미나 헌법과 법체계를 공유하는 집단도 아니다. 박정희 시대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국가는 박정희와 그의 의지 하에 움직이는 지배계층과 그들의 힘들, 그리고 그 힘들에 포획된 피지배계층을 의미한다. 국가에서 피지배계층은 일방적으로 지배계층의 힘에 따르는/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로 전제된다.5) 따라서, 이러한 국가 개념은 어떠한 균열 가능성이나 저항의 징조를 포착할 수 없다. 저자가 개인에게서는 이데올로기적 호명과 이의 균열을 섬세히 포착하려 함에도, 국가라는 장치에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미국 제국과 한국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일방적으로 미국 제국의 전략에 동원되는 수동성으로만 포착되고 미국 제국은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일하고도 투명한 주체성으로 그려진다. 특히 한국의 경우 90년대 이후, 미국의 경우는 60년대부터 국가라는 것이 시민사회의 압력 등으로 일정한 압력을 받고 조절되는 면들은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무척이나 흥미롭고 많은 것을 배웠던 책이다. 하위제국으로서의 한국, 트랜스내셔널한 이산적 접속점으로서의 지금-여기의 한국을 포착함으로써,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들을 적극적으로 전달한다. 또 이를 미국이나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과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암시하는 전략도 (한국의 비판적 독자들에게는) 효과적이다. 일본 위안부문제가 뜨거운 지금, 한국의 하위제국으로서의 폭력성도 동시에 반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가 보여주는 공통점인 것 같은, 문학 텍스트를 자신의 주장을 위해 이용하는 듯한 방법론이 계속 신경쓰였다. 어떠한 연구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논지를 위해 텍스트를 이용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얼마나 텍스트를 섬세히 보고 최대한 텍스트의 목소리를 복원하느냐이다. 이 또한 윤리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서구이론들과의 대화 속에서 생성된 (보편) ‘이론의 목소리로 제국의 위치인 미국 학계에서 한국 텍스트를 재단하고 있는 면면들을 보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 개인의 양가적이고 중층적인 면모들은 섬세하게 파악하려 하면서, 국가단위는 단일하고 투명한 것으로 처리되는 점들은 아쉬움이 있다. 물론 이는 이 책의 전공분야가 문학과 문화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결국 국가와의 상호작용이 초점이 맞추어진 만큼, 국가라는 것의 양가성이나 중층성, 개인과 국가의 상호작용이 개진할 수 있는 상호변화의 공간을 좀 더 포착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성의 노동력이 저평가됨으로써, 여성들을 매춘산업에 보다 더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게 만든다.” (38) 캐슬린 배리. 한국은 OECD국가 중 성별 임금격차 1. ‘성매매의 자발성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 성별 임금 격차라는 사회적 원인을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는 미국에서의 한국학의 기원, 위상, 현재적 의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글을 쓰고 있다.

 

2) 사실 나도 석사논문에서 비슷한 민족주의 비판을 수행했다. 주요한의 상해 독립신문 시절의 시는 그의 일제말기 시들과 거의 같다. , 민족의 범위를 조선민족에서 동양또는 대동아로 바꾸었을 뿐이다. 이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하는 한 용례로 사용되었다. 만약 지금 다시 주요한의 이 시기 시에 대해서 쓴다면, 이 둘 사이의 연속성뿐만 아니라 차이성을 더 생각해보고, 다른 비타협적 민족주의들과의 차이도 고려할 것이다.

 

 

3) 이 책 자체도, 주로 4장에서 하위제국으로서의 한국의 상황을 한편으로 미국,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시기 일본의 거울상임을 계속 지적한다. 371, 388.

 

 

4) 물론 그러나 아직도 한국문학사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충분하지는 않다. 한국 문학사의 정전들은 아직도 페미니즘적으로 비판되고 재구성되지 못했다. 이광수 󰡔무정󰡕, 최인훈 󰡔광장󰡕, 김승옥 서울, 1964 겨울등으로 이어지는 현대소설사의 정전들은, 새로운 정전들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5) 이 책은 223면에 가서야 R 마일즈가 의미하는 국가를 각주로 소개하고 있다. “국가는 공식적 경제를 경영하는 정치적 제도라기보다는 (...중략...) 사회적 관계들을 조직화하는 제도적 복합체이며, (...중략...) 그것을 통해 특정한 양식의 재생산을 보증한다. (...중략...) 직접적 힘이나 법, 필요하다고 생각된 특정한 조건들을 통해 국가는 그런 양식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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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단장
김춘수 / 미학사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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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 김춘수, "처용단장", 미학사, 1991.

김춘수의 무의미 시에 대해서, 김수영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쓴 적이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지금 돌이켜보면, 이승훈-김혜순-'미래파' 등에 큰 영향일 미쳐, 결국 한국 현대시의 핵심적인 흐름 중 하나로 된 것 같다.

나는 이게 '전위'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전위의 방향성에 대해서 늘 의심해왔다. 초현실주의에 한 발 더 나아간 어떤 지점에 '무의미'라는 것이 있다. 대상, 의미, 관념은 고정되지 않고, 언어들은 자율적 유희를 시작한다고 할 때, 시가 음악을 또는 시가 미술을 지향하는 것에서, 시는 추상화의 세계로 나아간다. 색과 선의 느낌이 야기한 감각은, 어휘들이 야기하는 감각과 상통한다. 다만 여기에는 기표들 배후의 기의들의 다양한 결합으로 의미는 확정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며 유희하고, 기표 배후의 기의들은 통제할 수 없는 연상들로 확장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표방하는 것과는 달리, 이 시집에는 어떤 누빔점들이 있다. 꿈과 무정부주의, 그리고 일제 시대와 6.25가 그것이다. 전쟁의 참혹한 기억, 식민지의 기억으로 계속 퇴행하며, 화자는 꿈을 꾸고, 이 기억을 반복하여 어떠한 순간에 도달하려 한다. 이는 계속 무정부주의라는 어휘, 또는 무정부주의자가 결코 되지 못한 자신이라는 말로 시가 온전히 무의미로 해체되지 않았음에 대한, 또는 온전히 과거-현재라는 시간축이 투영된 '자아'라는 것도 해체되지 않았음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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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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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올해 읽은 두번째 책이자, 첫번째 시집.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늙은 마초 구 운동권 사내가 보인다.

김사인 시인은 늙었다.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이고, 세상을 떠난 지인들이 많다는 것이며, 죽음을 근미래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화양연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많은 시들은 과거형으로 쓰였고, 특히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만시가 많다. 그리고 그 만시들이 눈물나게 좋다. 늙은 것, 죽은 것, 사라진 것들에 대한 따뜻하고 애달픈 시선. 적어도 우리는 모두 늙는다는 점에서는 공평하고, 그래서 이런 시들은 보편적이다. 또 모든 사람의 삶은 일회적이고 다르다는 점에서 단독적이다.


김태정

(..선략)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 쏨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서 겁 많은 귀뚜라미처럼 살았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달에 오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 초본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하략)

이런 시들은 참 좋고, 눈물 나지만, 어떤 시들은 한국 마초 늙은이의 모습이 보여 못내 불편하다. <엉덩이>, <빈집> 등은 강간범이나 스토커를 떠올리게 한다. 은유라고 해도 이는 소름이 끼친다.


엉덩이

영주에는 사과도 있지
사과에는 사과에는 사과만 있으냐,
탱탱한 엉덩이도 섞여 있지
남들 안 볼 때 몰래 한입
깨물고 싶은 엉덩이가 있지.

어쩌자고 벌건 대낮에 엉덩이는 내놓고
낯 뜨겁게시리 뜨겁게시리
울 밖으로 늘어진 그중 참한 놈을 후리기는 해야 한다네
그러므로,
후려 보쌈을 하는 게 사람의 도리! 영주에서는
업어온 처자 달래고 얼러
코고무신도 탈탈 털어 다시 신기고
쉴 참에 오줌도 한번 뉘고
희방사 길 무쇠다리 주막 뒷방쯤에서
국밥이라도 겸상해야 사람의 도리!

고개를 꼬고 앉은 치마 속에도
사과 같은 엉덩이가 숨어 있다는 엉큼한 생각을 하면
정미소 둘째 닯은 허여멀건 소백산쯤
없어도 그만이다 싶기도 하지
남들 안 볼 때 한입 앙,
생각만 해도 세상이 환하지 영주에서는.

<오월유사>, <불길한 저녁>와 같은 역사 해석도 못내 불편하다. 70~80년대를 온 몸으로 견디고 투쟁해온 시인의 세계를 나는 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역사를 후일담식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모두의 경험을 통속화하려는 모습은 씁쓸하다. 이게 씁쓸한 이유는 아마도 나도 점점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알값>, <이대로 좀>도 과도하다고 느껴진다. 타인의 죽음은 어떤 식으로 풍자의 소재로 가져와야 하는가. 타인의 삶, 가난의 낭만화도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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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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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이 한국시에 대해서 쓴 글은 성겨서 읽다가 그만둘까 했는데, 5장과 6장 같은 대목이 나에게는 빛났다.

 

이 책은 일본독자를 위해서 일본어로 처음 출간되었고(2014.5) 한국에서 번역 출간 (2015.5)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대중'독자를 위한 한국시 해설이라고 치면, 어떤 의도로 이런 글을 썼는지는 알겠다. 이것이 한국독자들에게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알라딘의 독자평들을 보면 칭찬일색이다. '역시 시의 힘은 세다' 등등의 평들이 지배적이라, '시'에 대해서 어떤 수준의 글이 읽히는가를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반면에 일본 아마존의 일본어판 책에는 아무런 독자평이 달려있지 않다.

 

이는 서경식 선생의 글이 한국보다는 일본에 훨씬 더 뼈아픈 글이라서이지 않을까? 후쿠시마 사고도 일본의 인류에 대한 가해라고 하는 (놀라운) 주장과 피해자 노릇을 그만하라고 일갈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원폭과 관련되는 기억이기도 하다. 반면에 서경식 선생이 한국에서 이렇게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야만적 폭력적 가해자 일본과 지성적 피해자 (재일)조선인이라는 도식을 한국 독자들의 마음에 심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서경식 선생의 의도와는 먼데, 서경식 선생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방식이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서경식 선생의 글은 분명히 독재 정권과 한국인은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일본 정권와 일본인을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절망적인 독재정권 하에도 그의 형들을 지지했던 따뜻한 한국인들과 훌륭한 시들에 탄복하지만, 이에 대비되어 일본의 좌파나 리버럴들은 재일조선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는 서경식 선생의 경험에서 참일 수 있다. 그의 두 형을 가두어둔 것은 한국의 독재정권이었지만, 그의 울분은 오히려 어린시절부터 그를 차별과 배제하게 한 일본(인)에게로 표출된다. 서경식 선생이 진정 경험한 것은 일본이였기 때문이다. 서경식을 형성한 것이 일본이고, 그의 모어는 일어이기 때문에, 그는 더 깊은 애증을 일본에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일본에서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모국'인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의 일부분은 이것이 '모국'이라고 끊임없이 이성적으로는 주장하지만, 그의 육체는 도저히 이 낯설고 후진 국가를 받아들일 수 없음이 그의 시들에서 잘 나타난다.

 

그 후 두 형들의 투옥을 겪으면서, 그래도 일본의 '선진성', 최소한의 민주주의, 그래도 재일조선인들이 대학교수를 하면서 지낼 수 있게 했던 일본 지성계의 진보성 등을 한국의 야만성과 대비하여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경식은 일본에 대한 날선 비판에 집중한다. 한국의 폭력적인 야만보다 일본을 비판한다. 결국 그가 말을 거는 핵심 독자는 일본인이기 때문 아닐까? 물론 그는 한국인에게도 말을 걸기는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아픔, 식민지의 폭력성 등은 주로 일본(인)을 타겟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경식의 글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이것이 "일본은 없다"가 한국인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방식의 대체품으로 느껴진다고 하면 심한 말이겠지만,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소비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나에게 빛났던 대목은 재일조선인 1.5세인 필자의 어머니 삶에 대한 고백과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서경식 선생의 고백이었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늘 국민의 '타자'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면서, '국가', '국민' 으로의 호명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존재. 정규교육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아 글을 못 읽은 어머니가 자식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글자를 배워나가게 되는 과정.

 

서경식 선생이 강조하지만, 이는 특수한 예가 아니라 1920년대 태생의 일본과 한국에서 태어난 조선여성으로서는 일반적 예일지 모른다. 내 진외증조부,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 중에 관동대지진 때문에 귀국했고 이듬해에 할머니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집에서 여자아이는 학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셨다. 나중에는 한글을 읽으셨는데, 어떻게 읽으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서경식 선생의 어머님은 반대로 1920년대 말에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그 분도 일어를 전혀 못 읽으셨다.

이들이 일본의 전쟁이 지던말던 '어짜피 우리와 상관없으니까'라고 발화했다는 것과 이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해석은 흥미롭다. 국가를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를 내면화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면화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대상일 뿐이다. 이는 3.1운동 관련 새로운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는 '무지렁이'들이 만세운동에 '동원'되었던 방식들과도 상통하는 바이다.

 

이런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담으려는 시도가 소중하고 또 고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할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참 없구나 하고 슬펐던 기억이 난다. 말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한 증언. 그리고 그 증언 자체가 폭력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인정하면서도, 적을 수 밖에 없는 심정.

 

나는 일상적인 타자로서 평생 살아가면서 모국에 돌아가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경계인의 처지를 감히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길거리에 나서면 동양인을 보고 '치노~ 치노'라고 놀려대던 곳에서 자라고,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으면 꺼지라고 했던 백인들 틈 사이에서 느꼈던 '아웃사이더'로서의 심정은 생생하다. 그리고 이것이 내 '소수자'성, 또는 소수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바탕에 있는 근본적 경험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끊임없는, '국민', '민족', '국적', '국어'라는 말이 폭력적이라는 증언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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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식과 실학 - 한국 지성사를 읽다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
임형택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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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을 근대에 대한 지성사적 대응으로 보고 서술한 책. 박지원, 정약용, 이강회, 최한기를 다루었다. 일반인 대상 강연을 책으로 쓴 것이라 주제는 묵직하지만 서술은 평이하다.

내용 정리에 그치는 면들이 많아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14세기 조선의 성립과 20세기 식민지 조선으로의 변화을 세계사의 구도 속에서 보여주려 한 시야가 넓다. 실학을 서세동점의 세계사 속에서 주체적인 대응 모색으로 보고 있다.


개화기 관련해서는 국문체인 <<독립신문>>과 국한문체 <<황성신문>>의 대결에서 후자의 승리로 보는데, 이 국한문체를 기존 한문전통과 주체성을 아우르는 문명개조론의 입장을 반영한 형식으로 보았다.


이강회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배웠는데, 다산의 제자로, 특히 바다에 관한 지식, 배에 대한 지식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을 '삼면이 바다인 해국'이라고 인지하고, 외국선박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이에 대해 탐구했다. 더 나아가 제주도를 일종의 '해외 무역 특구'로 설정해서 무역을 진흥하자는 상공주의적 발언을 과감하게 했다.


최한기는 매우 흥미로운데, 일단 역사를 숭고적이 아니라, 진행적, 어떤 면에서는 '진화적'으로 보고 있다. 시야도 전지구적으로 사유하며, 중국이 중심이 아니다. 지구 모든 나라가 어울리는 '만국일통',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드는 '우내녕정'을 학문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유교의 '친친'이 아니라, 박애에서 더 나아가 천하 인민을 한결같이 생각하고 '물'에까지 미치는 광활한 사랑을 주장했다.(개인적으로 묵자와 불교, 기독교의 영향은 없는지 궁금하다)

대상독자도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수백년 이상까지도) 사람을 상정으로 해서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려니와 말을 하면 천하인이 취해 쓸 수 있고 발표하면 우내인이 감복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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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0-02-2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성사적‘ 이무슨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