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겨울잠에 폭 빠진 동물들 씨앗 톡톡 과학 그림책 6
미셸 프란체스코니 지음, 카퓌신 마질 그림, 이정주 옮김 / 개암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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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미셸 프란체스코니 지음, 카퓌신 마질 그림, "긴긴 겨울잠에 폭 빠진 동물들", 이정주 올김, 개암나무, 2015.

 

겨울잠에 대해서 몰랐던 사실들을 잘 알려준다. 개구리, 뱀과 같은 냉혈동물이나 곰은 겨울잠을 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박쥐, 오소리, 달팽이들이 각각 겨울잠을 잘 때 어떻게 신체가 변화되는지, 겨울잠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곰은 오히려 겨울잠 때에 신체적 변화가 가장 적다는 것 등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박쥐는 평상시에는 1분에 500회로 심장이 뛰는데, 겨울잠시에는 5회 정도로 뛴다던지, 오소리는 5~8도 정도 체온을 낮춘다던지 하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마지막에 이것이 인간의 수술이나, 우주비행 관련해서 연구하고 있다는 것도 쓰여 있다. 18도로 체온을 낮추면 피가 아예 멈춰서 혈액 손실 없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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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호 띵똥 아저씨 - 환경이야기 (층간 소음, 배려) 노란돼지 창작그림책 27
이욱재 글.그림 / 노란돼지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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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욱재, "901호 띵똥 아저씨", 노란돼지, 2014.

층간 소음 문제를 역지사지로 생각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 온 별이와 산이, 1001호에서 신나게 뛰어노니, 901호의 무서운 아저씨가 띵똥 누르면서 올라온다. 매번 발소리를 낼 때마다 올라오는 아저씨가 무서워 최대한 소리 내지 않게 걷는 연습을 하다가, 사촌들이 와서 뛰어놀아서 아빠랑 띵똥 아저씨랑 대판 싸우게되고, 아빠는 애들이 지금 가고 없다면서 층간 소음이 다른 집 소리 아니냐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1101호에 엄청 시끄러운 아이들이 이사 오게 되서, 1001호는 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901호 띵똥 아저씨가 올라오는 것보다, 1101호의 시끄러운 층간 소음이 더 싫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중에 실수로 901호 아저씨에게 케익을 드리게 되면서 901호 아저씨네 집에 초대도 받고, 아저씨 부인이 교통사고로 몸을 못 움직여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고, 1001호 가족은 조심하게 된다. 1101호 집에도 케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맺는다.

 

이웃 간의 층간소음으로 인한 피해를 역지사지 해보자는 이야기인데, 여러가지 사안에 확장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사실, 이 동화의 해결방식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하다. 피해자가 먼저 가해자에게 케익을 건네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인 1101호는 아이들이 난리를 치는데, 올라가서 항의하니 아이들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은 방에서 킥킥대면서 웃고 있다. 하지만 1001호도 할 말은 없는 게, 자신들도 901호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1001호가 먼저 1101호에게 케익을 건넨다. 이는 소수자 운동에 대한 유비로도 읽힌다. 1101호의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1001호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소수자 운동도 이렇게 해야하나? 혐오를 멈추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수자/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것이 가해인지도 모른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며, 선물을 건네며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우리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동화를 읽으면서 미러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너희가 하고 있는 짓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 역지사지는 동서고금의 황금율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 1101호 위에 1201호에 방방 뛰는 아이들이 왔다면 1101호는 아, 1001호도 힘들었겠구나.. 하면서 방방 뛰는 것을 삼갈까? 그렇다면 사람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미러링이 상대를 변화시키는 전략으로 적절할 때는 상대가 사람일 때 만이다. 사유하지 않고 소수자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그럴 때 소수자/피해자가 먼저 케익을 건넨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 대응일까. 근래까지 미국에서 동성애운동의 주류 방향성 중 하나가 우리도 인간임을 계속적으로 이성애중심 가정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도 인간이라는 것은 우리도 이성애중심 가정들처럼,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아픔도 있고 등등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도 사람이다. 너라면 이러한 차별을 받는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역지사지하게 하는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너희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차별(교정)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 앞에서 이러한 역지사지 전술은 무력하다. (그렇다면 뭘 어쩌자는 것인가?)

 

피해자가 먼저 케익을 건네면서, 우리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왜 피해자가 그래야 할까. 아니라면 무슨 방법이 있는가. 우리는 1001호이고 그들은 1101호에 사는데,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층간소음 관련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어떤 선생님은 이것을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변호사의 자문도 구했는데, 이게 법적으로 정해진 데시벨 수위를 측정해야 하는 등, 법적 처리는 매우 힘들다고 한다. 법은 물론 변화할 수 있지만, 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시민들의 의식 변화가 선행해야 하기도 하다. 그럴 때 무엇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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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동양문화산책 4
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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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라 알란,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오만종 옮김, 예문서원, 1999.

 

한문을 배울 때, 나는 해석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해석하지 않고 한국어 어휘 속에 들어와 있는 한자를 반복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만큼 한국어 속에 한자어 어휘가 가득 들어있어서, 수천년의 시간이 격해있는 타자의 문장인데, 거기서 나타나는 개념들을 별 의심없이 그대로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국의 한자어로 이해했던 것이다. 와 같은 단어들은 막연하지만, 애매한대로 그대로 번역하게 된다. 道可道, 非常道.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가 아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고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다. ‘란 무엇인가? ‘상도라고 했을 때, 상도는 무엇인가 등등 따져야할 것이 많다. 그런데 현재 한국어 속에 사용하는 한자어들에 워낙 친숙하다 보니, 이를 묻기를 게을리 하게 된다.

 

미국에 있을 때 미국의 한문 교재를 보고는 깜짝 놀랐었다. 예를 들어 knight로 번역해놓으니, 원문은 이해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번역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비의 모습이 갑자기 풍차로 돌진하는 기사의 모습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되물어보면, 를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는 현재 한국적 맥락으로의 로 이해하는 부분이 컸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라 알란의 이 책은,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이해하기 힘든 타자인 유가와 도가의 사유를 다룬다. 처음부터 󰡔맹자󰡕의 한 대목을 제시하고는, 이것이 왜 서구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가를 설명한다. 한국인 독자로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물에 대한 맹자의 이야기가 서구권 독자들 입장에서는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가 근본적인 뿌리 은유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라코프와 존슨의 '뿌리 은유' 개념을 토대로 고대 한문맥의 개념 안에는 물과 식물 뿌리 은유가 사유체계에 중요했다는 것을 논의한다. 뿌리 은유는 추상적 생각을 개념화하는 데 내재하는 구체적 모델이다. (38) 그에 따르면 서구의 뿌리 은유는 종교적 전통에 기초한 신화적 대화로부터 나왔다면, 동양의 뿌리 은유는 자연 현상의 구체적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다. 서구사상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대립에서 초월적인 변하지 않는 것을 상정했다면, 동북아사상은 전일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자연현상, 특히 물()을 뿌리은유로 해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고대 중국 종교는 조상의 계보에 의해 영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직접 연결된다. 속세가 있고 그것과 근본적으로 대조되는 초월적 실체의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영계의 사이는 연속적이다. 더구나 초기의 의식에서 조상의 영령과 자연 현상의 영령들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 (51) 따라서 그들은 일반적인 원리들이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고, 고대 중국에서 논증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유추는 수사학적 수단 이상이었다. 때문에 서구에서 도덕적 원리가 초월적 존재의 명령에 기초했다면, 동북아에서는 도덕적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윤리적 행동의 원리와 그 원리들을 구현시키는 개념들은 존재한다. (102)

 

고대 한문에서는 지나가는 시간’(Time)을 의미하는 글자가 없다. 이는 영어에 에 마땅한 번역어가 없는 것과 같다. 는 원래 계절의 의미로, 계절에 맞는다, 때에 맞는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서구에서는 기하학적 은유로 시간을 설명한다. 직선이나 원이다. 동북아의 시간관은 원에 걸맞아 보이지만, 실제 동북아에서 시간을 은유할 때는 이러한 도형이 아니라 물과 식물을 뿌리은유로 사용한다.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샘을 원천으로 가진 채 흘러가는 물이 연속성과 무상성의 관념을 위한 모델이다. 일 년을 주기로 하는 식물의 변화 양식은 개념의 모델을 제공하고 재생되는 식물의 연속체는 조상 계보의 개념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 (38)

 

이후 , 無爲, , 등의 개념 속에 물의 이미지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3장에서 다룬다. 도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길이고 수로이다. 그것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이고 강 자체이기도 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 물의 흐름이고 스스로 깨끗이 침전시키는 연못과 같다. 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양육시키지만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유가는 도의 자연적 질서를 강조하고 도가에서는 도의 변형체나 무정형성을 강조하지만, 도의 개념을 해설하는 데에서는 둘 다 뿌리를 물의 속성에 두고 있다. (124) 무위 개념의 뿌리에는 행위하지 않으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물이 있다. 무위는 또한 물이 행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무위는 물을 모델로 한 도의 최상의 표현이다. (132) 은 방해받지 않을 때 안정되어 맑아지며, 침전물이 가라앉은 연못의 물과 같다. 또 물처럼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끌린다. 은 일정한 경로에 를 두었던 공자나 진정한 왕이나 선비의 경우처럼 인도를 받는다. 無爲라면 땅의 지형에 따라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물처럼 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겠지만, 사람의 은 자신의 의욕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들을 위해 세워진 도에 따라 어떤 일정한 길을 따르도록 인도된다. 도에 이끌린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그들은 좋은 통치자에게로 가게 될 것이다. (135) 기의 개념은 물을 모델로 한다. 자연계에서의 기는 아래로 흐르고, 안개가 되어 위로 올라가며, 비가 되어 떨어지고, 식물들에게 생명을 주는 물의 순환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호흡으로서의 기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마음의 생명 에너지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도덕적 감각의 근원을 통제한다. (143)

 

4장에서는 , , , , , 自然, 등의 개념들이 식물과 관계된 이미지들과 식물 생명의 뿌리 은유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서구에서는 동물과 식물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은유체계 속에 있다. 그런데 동북아에서는 萬物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한데 묶고, 특히 식물 은유를 통해서 인간을 설명한다. 유대 기독교 전통의 종교 용어에서 개인은 신이 부여한 생명을 갖는 존재였다. 출생과 창조는 하나의 사건으로 개념화되었으며, 최초의 시작으로서 최소한 재림의 가능성을 갖고 죽음과 서로 연관되었다. 개인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죽을 때 신에게 답해야 한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조상 계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생 동안 한 일에 대해 초월적 창조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나 후손 또는 당대의 가족에게 책임을 진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식은 효자로서 행동해야 하며 죽은 후에도 부모가 늙었을 때 보양했듯이 제사 때 음식을 차려 예를 다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으며, 이것이 사회적 도덕과 이상적 유교 국가의 기초가 된다. 사람이 그의 생애에서 이름을 빛냈다면 그 명예는 후손에게 전해질 뿐만 아니라 조상의 지위까지도 드높이는 것이 된다. (155) 󰡔맹자󰡕에서의 은 충분히 발육하여 식물이 될 수 있는 씨나 묘목의 첫 싹에 포함된 잠재력으로 그려진다.

 

5장에서는 󰡔맹자󰡕󰡔노자󰡕가 첨예하게 다른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양자의 우주론은 모두 인간과 자연 세계에서 같은 원리를 발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들이 물과 식물이라는 같은 뿌리 은유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물과 식물 생명을 모델로 한 철학적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의미의 조직망을 형성한다. 는 고립된 개념이 아니며, 그들의 개념 관계는 물의 이미지에 있는 공통된 뿌리를 반영한다. 그래서 수로를 모델로 하는 도의 개념은 의미가 확장되어 물의 여러 가지 형태를 모델로 삼는다. 물의 증기를 모델로 삼는 기나, 의미가 확장되어 얼음에서 움직이는 물, 흩어지는 증기에 이르기까지의 다른 형태들의 물을 암시한다. (186)

 

물과 식물 생명의 뿌리 은유에 근거한 󰡔논어󰡕, 󰡔맹자󰡕, 󰡔노자󰡕, 󰡔장자󰡕의 철학 체계는 사람을 완전히 자연 세계의 전체 구조 안에 놓고 있다. (217) 이러한 물과 식물에 바탕을 둔 개념 구조는 고대뿐만 아니라 전시대를 통해 중국 사상의 뿌리 은유를 대표한다. (219)

 

이러한 근본적인 사유체계의 차이가 근대에 어떻게 작용했을까? 현대에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혹은 이것이 서구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수정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몇몇 답들은 황호덕 선생님의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을 근대시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내 목표인데, 지금까지 근대의 새로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결국 그 새로움이 새로움인지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고전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지속되었을까. 지속은 새로움을 만나서 어떻게 굴절되었나 등 아직 논의되기 시작조차 안 된 것들이 상재한다. 특히 이러한 뿌리 은유에 대한 관심은 시의 해석에 있어서 유용하다. (이에서 더 발전시킨 논의들이 인지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한문맥의 개념 도식 안에 내재한 뿌리 은유는 어떻게 확장 변용되고, 다른 문화권의 뿌리 은유들과 만나면서 굴절되고 상호습합되었는지를 탐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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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 제4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이수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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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수진,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웅진지식하우스, 2013.

 

나는 80년대 태생 작가들에게 같은 세대라는 의식을 지닌다. 유사한 경험과 고민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것이라 기대하고,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어찌보면 79년생에게 87년생보다는 가깝지만, ‘80~’이라는 숫자 탓인지, 광주라는 기점 때문인지, Y2K 이후에 대학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인지 몰라도, 79보다는 87에 더 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 80년대생 작가들의 소설이 나오면 종종 보는 편이다. 끝까지 읽는 경우는 별로 없다. 너무 장르만화적인 대사나 주인공 설정이 거부감이 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수진의 글은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있다. 하지만 읽고 나니 아쉽다.

 

이 글은 중후반까지는 일베의 탄생이나 그들의 심리를 묘파하는 서사로 읽힌다. 찌질한 남성이 고양이같은 여성을 타자화하고 여혐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여성 작가가 그리고 있다는데에 그러한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후반에 이르면, ‘취향이니까 존중해야 한다는 작가의 장광설이 전면화되면서, 오히려 고양이가 취향의 강요일 수 있다는 남성의 목소리가 전면화되고 만다.

 

생각해볼 면들은 분명 있다. 취향이 대중문화의 전면화 이후에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되지 못하는 면들도 있지만, 여전히 이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포착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기를만한 물질적, 시간적, 심리적 자원이 있는 사람들, 클래식을 듣고 공연을 다니는 사람들 등등.

 

이 글에서는 고양이로 상징되는 취향이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기제로 작동함을 비판한다. 과연 그러한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중요한 문제라면 왜 그러한지, 나는 설득되지 못했다. 환언하자면, 오늘날 특별함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취향에 대한 강조와 인정투쟁이 중요한 문제인지 설득이 안 된다. 오히려 나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평범함에 대한 열망과 그 평범함의 획득 ()가능성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평범하기 위해 죽을만큼 힘을 써야 하는 사회...

 

여러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이들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는 것은 장점이다. 특히 소설가 지망생의 심리는 핍진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작가의 경험이 잘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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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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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실한 기독교도 친구에게, 나와 성별, 성적 지향, 인종, 계급, 장애 여부가 다른 사람보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 제일 멀게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신론자 입장에서, 독실한 기독교도란 그만큼 멀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나와 전혀 다르다고 느낀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존재하는 세계를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 사는 세계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매우 날카롭게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사후세계나, 내 모든 행동을 알고 있는 타자가 있는 세계란 나는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끝끝내 동감되지 않았던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기독교 남성 신앙 공동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깊은 산 속에 숨겨져 있던, 내버려진지 오래된 수도원이 들어나고, 이것에 얽힌 사람들의 과거사가 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어떻게 이들은... 비참하게 죽어갔는가, 그리고 이러한 죽음과 연관된 ‘후’라는 사람이 겪은 인생사가 핵심 스토리이다. 이승우는 매끄럽고 교묘하면서도 박진감있게 소설을 서술하지만 (말미의 정영훈 선생님의 해설은 매우 긴요하다), 끝내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신론자 입장에서 신앙 공동체의 열정은 감탄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끝내 온전히 공감되기는 힘들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내내 남성들 위주의 서사가 이루어진다. 여성은 성폭력 피해자 혹은 성매매를 요구하는 인물로만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도 ‘형제’들인 남성들이다. 여성은 성과 관련된 매매 (성폭력 피해자도 그의 삼촌과 성폭력 가해자 사이의 물질적 거래가 이루어진다)대상이나 주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나에게 소설이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매개이다. 사회과학적 분석이나 환원으로, 자연과학적 실험으로 포착되기 힘든 지점을, 소설가는 공부와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메꾸어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가는 어떠한 종류의 인간상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사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에게 이해하고 싶은 타자 중 하나인 ‘기독교도’를, ‘순교자’를 납득하고 공감하게 해주기에는 이 소설은 부족했다. 세상에서 유리된 남성들만의 기독교 공동체를 “지상의 노래”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지상”이 아닌 것으로 나에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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