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엘리엇 전집 - 시와 시극
이창재 지음 / 동국대학교출판부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로고스는 공통적이지만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지혜를 가진 듯이 산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하나이고 같다

 

 

 

 

 

1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모두 미래의 시간 속에 현존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어떠한 시간도 되찾을 수/구속(救贖)될 수 없다.

있을 수 있던 일은 추상으로

영원한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다,

사색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가리키는데, 그 끝은 항상 현재다.

발자국 소리가 기억 속에 메아리 친다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 아래로,

우리가 열어본 적이 없는

장미원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내 말은 울린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잎 그릇에 먼지들을 흩트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울림들이

정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새가 말했다, 그들을 찾아봐, 그들을 찾아봐,

모퉁이를 돌아서. 첫 번째 문을 지나,

우리의 첫 세계 속으로, 우리

지빠귀의 환영을 따라갈까? 우리의 첫 번째 세계 속으로.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위엄있게, 보이지 않게,

압력 없이 움직이며, 죽은 잎들 위로,

가을 열기 속에서, 활기찬 공기 사이로,

그리고 새가 불렀다,

관목숲 속에 숨겨져 있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반응하여,

그리고 보지 못한 눈빛이 교차되고, 왜냐하면 장미는

응시되는 꽃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그들은 우리의 손님이었다, 환대하고 환대받는.

그래서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정형적으로 움직였다,

텅 빈 골목을 따라, 한 복판 안으로,

마른 연못을 내려다보기 위해

마른 연못, 마른 콘크리트, 물가가 갈색이 된

그리고 햇빛 속에서 연못은 물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연꽃이 조용히, 조용히 떠오르고,

수면은 빛의 중심에서 반짝인다.

그리고 다른 메아리들은 우리들 뒤의 연못에 반사되어 있다.

그때 구름이 지나가고 연못은 텅 비었다.

, 새는 말했다, 왜냐하면 나뭇잎은 웃음이 머금고 흥분한 채로

숨어 있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 , , 새는 말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감당할 수 없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가리키는데, 그 끝은 항상 현재다.

 

 

 

 

 

 

엘리엇의 번트 노튼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을 제사로 사용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원성과 통일성이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이러한 대립물들을 통일하는 것이 로고스임을 강조한 철학자입니다. 이 제사는 의미심장하게 이 시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하나이고 같다는 역설적 표현은 초월적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모순이 아닙니다. 길에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정반대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 그 길은 하나입니다. 관악산을 오르다 마주치는 내려오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나는 올라가고 있는 길이지만, 내려오는 사람들에게는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를 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결국 하나의 길입니다. 이러한 역설과 초월적 시선은 이 시에 지배적입니다.

 

시작부터 엘리엇은 이러한 역설을 제시합니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어쩌면 모두 미래의 시간 속에 현존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미래의 시간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인과율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로 보일지 모릅니다. 특히 물리주의적 입장에서, 결국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만약 미래의 시간 속에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모두 현존한다면, 반대로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그대로 성립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남습니다. 양자역학과 같은 미시세계에서, 입자의 존재태가 확률로서 제시된다는 차원.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문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서로에게 포함되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됩니다. 태초부터 시간의 종말(그런 것이 있다면)까지는 모두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아침에 계란을 먹을까 우유를 마실까 고민하는 것도, 사실은 이미 답은 태초부터 정해져있었고, 또는 제가 고민을 할 것조차 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초월적인 시선,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런 것은 아닌지 엘리엇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의 구속의 문제, 구원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어떠한 시간도 되찾을 수/구속(救贖)될 수 없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즉 미래 속의 과거가, 과거 속의 미래가, 그리고 현재가 현존하고 있다면, 결국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있을 수 있던 일은 추상으로

영원한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다,

추측/사색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던 일들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합니다. 애초의 전제를 더 밀어붙인다면, ‘사색의 세계조차도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 사색의 세계를 인간의 자유의지와 같은 공간으로 열어두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는 출발합니다.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있을 수 있었던 세계, 영원한 가능성의 세계, 추측의 사색의 세계로서의 시를 쓴다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예정된 시간 축을 탈출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기억 속에 메아리친다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 아래로,

우리가 열어본 적이 없는

장미원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내 말은 울린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잎 그릇에 먼지들을 흩트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았던, 걷지 않았던, 열어본 적이 없던 장미원으로의 기억이 서술됩니다.

 

다른 울림들이

정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새가 말했다, 그들을 찾아봐, 그들을 찾아봐,

 

우리가 가보지 않았던 그 정원에는 다른 울림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늘 새는 지상과 천상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나무에서 집을 짓는 동물. 그런 지상과 천상의 걸쳐져 있는 존재는, 나에게 말을 걸며 그들을 찾으라고 부릅니다.

 

모퉁이를 돌아서. 첫 번째 문을 지나,

우리의 첫 세계 속으로, 우리

지빠귀의 환영을 따라갈까? 우리의 첫 번째 세계 속으로.

 

여기서 장미원은 에덴동산과 같은 첫번째 세계임이 나타납니다. 새의 환영을 따라갔을 때 마주치는 것은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위엄있게, 보이지 않게,

압력 없이 움직이며, 죽은 잎들 위로,

가을 열기 속에서, 활기찬 공기 사이로,

 

지상의 존재가 아닌 존재들입니다. 위엄이 있고, 보이지 않고, 중력에서 자유로운 이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본다는 역설 속에, 죽은 잎들 위로 활기찬 공기 사이를 뛰노는 존재들.

 

관목숲 속에 숨겨져 있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반응하여,

그리고 보지 못한 눈빛이 교차되고,

 

계속 역설과 모순은 되풀이됩니다. 들리지 않는 음악에 반응하고, 보이지 않는 눈빛이 교차됩니다. 앞서 이것이 일어나지 않았던 기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는 어떠한 환상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현재적 시간이 아닌 가능성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텅 빈 골목을 따라, 한 복판 안으로,

마른 연못을 내려다보기 위해

마른 연못, 마른 콘크리트, 물가가 갈색이 된

그리고 햇빛 속에서 연못은 물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연꽃이 조용히, 조용히 떠오르고,

수면은 빛의 중심에서 반짝인다.

그리고 다른 메아리들은 우리들 뒤의 연못에 반사되어 있다.

그때 구름이 지나가고 연못은 텅 비었다.

 

마른 연못은 순식간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연못으로 보입니다. 이는 현재의 시간 속에 과거의 또는 미래의 시간, 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가능성의 시간이 겹쳐져있는 모습입니다. 엘리엇이 불교에 심취했던 것과도 연관해보자면, 여기서 연꽃은 어떤 깨달음의 상징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에 모든 시간이 겹쳐져있다는 깨달음, 또는 예정된 시간을 깨고 나오는 자유의지의 시간. 이는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 새는 말했다, 왜냐하면 나뭇잎은 웃음이 머금고 흥분한 채로

숨어 있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 , , 새는 말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감당할 수 없다.

 

그 순간 새는 이제 그만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서 실재는, 과거-현재-미래가 겹쳐져있는 시간이며 동시에 상상세계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엘리엇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립니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있을 수 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가리키는데, 그 끝은 항상 현재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축. 그리고 가능성의 세계와 있었던 일, 모두 현재에 수렴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있으며, 가능세계와 실제세계가 겹쳐져있는 세계. 엘리엇은 우리의 삶을 입체적이고 풍요롭게, 마법과 같은 세계로 탈바꿈합니다. 역사가 현재를 조형한 과거를 밝혀내고, 이를 미루어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면, 문학은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을 그려냅니다. 엘리엇은 역사를 되살리며 동시에 문학의 지향도 겹쳐놓고 있습니다.

 

내 말은 울린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속에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잎 그릇에 먼지들을 흩트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장미잎 그릇에 먼지를 흩트리는 일처럼, 사소하고 순간적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엘리엇 스스로도 이것이 어떤 목적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먼지들이 흩어지며 장미 잎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한 순간. 또는 그 먼지들이 떠오르는 찰나의 환영. 오래 전에 사라진 과거의 인물(엘리엇)의 말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를 넘어서 독자의 가슴에 울리면서, 과거가 현재에도 겹쳐져 있다는 것을, 있었을지도 모르는 세계가 있는 세계에 울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16. 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

 

오에 겐자부로는 독서를 통해, 특히 문학, 그 중에서도 시를 통해 문체를 다듬어가며 자신의 소설을 쓴다. 엘리엇의 시, 단테의 󰡔신곡󰡕,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얻은 착상들과 삶에서 생기는 경험들은 융합되어 소설에 드러난다.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이 대학시절 은사에게 배운 독서방법을 소개한다. 3년에 한명의 사상가나 작가를 집중적으로 읽고, 원서와 번역서를 함께 꼼꼼히 읽는 방식인데, 본받고 싶다.

 

읽으면서 이미 1940~50년대에 일본은 뛰어난 서구 문학 번역들과 선생들이 있었다는 생각에 부러워졌다. 오에 겐자부로는 번역과 원서를 읽으며 번역에 매료되기도 한다. 김동인이 일어로 생각하고 조선어로 썼다는 고백과 유사하면서도 다르게, 오에 겐자부로는 일어를 기본으로 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의 세계로 갔다가 이를 다시 일어로 옮겨적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일본어 문체를 만든다.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도 주로 사전에 의지해 읽어가면서 제 마음속 혹은 머릿속에, 그러니까 제 언어의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영어나 프랑스어 원서가 메아리쳤습니다. 그것을 일본어로 옮겨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새로운 언어와 만나게 됩니다. 혹은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를 오가면서요. 이렇게 언어의 왕복, 감수성의 왕복, 지적인 것의 왕복을 끊임없이 맛보는 작업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가져다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번역을 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소설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67)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82)

 

오에 겐자부로는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대해서 말하며, 자신의 말년에 대해서 말한다. 계속 그는 자신의 소설이 지인들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한다. 이는 최인훈의 󰡔광장󰡕의 문지판 서문(2010)을 떠올리게 한다.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의 소설. 최인훈(1936년생)2010년에, 오에 겐자부로(1935년생)2007년에 70대의 심경.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 직전에 하셨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 70대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노인의 몸 상태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는 정말 다르다는 말씀.

 

우리는 모두 늙는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병상의 마지막 날에서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싶은 글을 쇠약해서 쓸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말년의 양식. 앞으로 나에게도 40년의 세월이 더 있다면, 오에 겐자부로 식으로 읽는다면 오직 13명의 사상가들, 작가들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일단 이 시점에서 그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무순)

오에 겐자부로

에드워드 사이드

루이 알튀세르

김윤식

조동일

사서삼경

황현산

미셸 푸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istant Reading (Paperback)
Moretti, Franco / W W Norton & Co Inc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15. Franco Moretti, Distant Reading, Verso, 2013.

 

두 번째 읽은 책. 역시 좋은 책은 두 번째 읽었을 때, 또는 관련하여 어떠한 글을 써야 된다는 압박이 있을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특히 ‘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Distant Reading’의 핵심과 앞으로 전개될 모레티 작업의 출발점을 볼 수 있다.

 

모레티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세계문학이라는 체계(시스템)에 도입한다. 중심부-준주변부-주변주라는 도식으로, 세계문학을 멀리서 읽기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문학에 대한 연구는 국민문학 연구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즉 개별 텍스트들을 읽지 않고, 텍스트에 대한 연구들을 토대로 세계문학이라는 시스템을 그려낸다는 것. (조동일 선생의 작업과 본격적인 비교가 필요하다.)

 

그는 문학 연구를 세계문학과 국민문학으로 나누고, 이를 파도와 나무의 비유로 설명한다. 파도가 다양성을 어떠한 힘이 덮어버려서 퍼져나가는 것이라면, 나무는 태초의 같은 기원이 다양성으로 파생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 다 필요한 것이지만, 모레티는 자기와 같은 비교문학자는 파도의 설명력을 더 믿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레티의 대담한 글은, 이미 발표된 지 16년이 지났기 때문에(New Left Review 2000 spring) 한국의 학자들도 어느 정도 이 방법론과 주장에 친숙해지고 이를 적용하기 시작한 시점(황호덕, Wayne 등의 연구)에서 읽어도, 이 책은 여러 사유의 계기들을 던져준다.

 

일단은 모레티의 주장의 허점들을 짚어보자.

    

 

 

1. 모레티의 세계문학의 방법론은 기존 연구들을 토대로 이를 종합하여 일반화된 법칙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도출된 일반화된 법칙은 문학 텍스트 내부에 있는 어떠한 공통된 특질이나 현상이 아니라, 문학 텍스트를 바라보는 연구 시각의 균질성일 가능성이 있다. 즉 문학이라는 현상의 세계적 보편성이 아니라, 아카데미적 시각의 균질성, 서구적 아카데미즘의 세계화. 물론 문학 연구가 문학 텍스트와 상호작용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를 메타적으로 접근할 때 근대-아카데미라는 것의 패권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내 논문의 핵심은 한문맥과 근대시이고 한문맥의 잔존과 이의 영향에 대해서 논의하고, 이는 한국 근대문학이라는 학문장의 형성, 그 안의 권력들의 배치 때문에 탐구되지 못한 면이 있다.

    

 

 

2. 물론 모레티 스스로도 이것을 완성된 이론이라 하지 않고, 포퍼식의 추측과 논박에 열려있다고 했다는 점에서 모레티의 오류라기보다는, 그의 논의를 보충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모레티식으로 근대 이후 세계문학이란 서구의 영향과 지역의 교섭이라 할 때, 각 지역들 마다의 섬세한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를 언어/문자/에크리튀르를 포함한 사유방식을 개념화할 수 있는 문맥’(한문맥/구문맥 등)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동북아의 한문맥, 그리고 그 내부에서의 차이(특히 한중일베트남에서의 차이. 중국 베트남을 양극으로 하여 일본은 보다 중국 쪽에 한국은 보다 베트남쪽에 가까운 문맥의 구성) 는 예컨대 남미 문학에서 원주민 언어의 소실과 마술성, 즉 마술적 사실주의 전통과의 비교 등은 유의미하고 보다 다층적인 논의를 가능케할 것이다.

    

 

 

3. 모레티는 중심 -> 주변으로의 흐름만을 상정한다. 이는 두가지 차원에서 문제적이다. 첫째는 실증적으로 주변 -> 중심으로의 영향도 분명하다는 것. 에즈라 파운드, 고흐 등은 물론 몽고, 아랍 등등.

 

두 번째는 서구 -> 주변부의 영향이 절대적이고 영향의 방향성이 일방향이라 해도, 주변부 문학의 특성이 서구의 보편성을 위협하고, 이의 해석과 수용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사이드는 Representing the Colonized: Anthropology’s Interlocutors에서 유럽 텍스트들이 타자들을 재현하는 방식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한다. 권나영(Aimme Nayoung Kwon)은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주변부 텍스트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근대 보편적인 재현의 위기로 명명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기존 서구의 보편적 가치를 재현한 것으로 여겨지던 고전은 오히려 왜곡되고 파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탈식민적 읽기를 통해, 서구 보편의 서사가, 남성, 백인, 서구, 이성애라는 주변부’(그렇다 서구야말로 주변이다.)적인 비틀림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즉 중심이 주변을 외면하고, 주변은 중심에 절대적 영향 아래 있어도, 그 주변자체가 중심의 의미를 전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조동일 선생의 생극론이 도입될 수 있다. 데리다적인 해체.)

 

 

 

4. 더 나아가 가장 핵심적으로 문제적인 것은, 중심, 주변부, 세계문학, 국민문학이라는 개념틀 자체가, 여전히 국민국가라는 경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체제는 국민국가 단위로 분석가능하다. 물론 이는 다른 단위들 속에서 움직이며 상당한 영향을 주고 받지만, 이는 개념적으로 통계적으로 경계를 지을 수 있고, 연구의 대상을 확정할 수 있다. GDP, GNP 등의 개념들이 그러한 경계를 바탕으로 산출된 개념이다.

 

문학도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한 나라의 언어로 쓰인 문학이라는 경계는 견고한 듯 보인다. 그러나 문학은 언제나 여러 언어들의 혼합으로서 존재했다. 방언과 방언 사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 언어와 언어 사이. 한글, 한문, 영어, 불어, 일어, 에스페란토어로 텍스트를 읽고 한글, 한문, 에스페란토어, 일어로 글을 쓴 김억. 그가 국()문체(한국어)로 쓴 작품을 국민문학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오늘날 작가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언어만을 하는 작가라 해도, 이미 그/녀는 여러 언어들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김연수는 한국문학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문학인가?

 

문학은 늘 클라인씨의 병과 같은 구조 속에 있다. 외부에서는 경계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길을 잃고 경계는 흩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문학 연구는 늘 비교문학 연구이고 세계문학 연구이다. 또 반대로 세계문학 연구는 늘 비교문학이며 국민문학 연구이다.

 

언어는 화폐처럼 교환되지만,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환율을 바탕으로 교환되고 그 과정에서 환전 수수료가 약간만 부가된다. 그러나 한 언어 속에는 이미 다른 언어가 삽입되어 있고, 한 언어는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모든 것을 잃고 처음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재획득하려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국민문학세계문학’, ‘중심/준주변/주변이라는 개념은 그 경계가 뚜렷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연구자의 시선 속에만 존재한다. 한국의 경제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있는 명제이지만, 한국의 문학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사실 한국의 문학(자본/시장/작가)의 상황이 나쁘다는 말에 불과하다. 문학은 어떠한 국가/언어의 경계를 늘 넘어서 존재한다.

    

 

 

5. 그럼에도 모레티가 말한 중심/()주변의 개념으로 세계문학을 바라볼 수 있다. 일단 경제적인 관점에서 세계문학을 바라본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손쉽게(?)할 수 있는 연구는 전세계 각 국가별 출판시장에서 자국어 출판과 번역출판 사이의 비율과 그 의미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떠한 보편적 논의가 도출 가능할 것 같다.

 

미국출판시장 (2008)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3%, 문학에 한정한다면, 그 비중은 더 낮아져서 전체 문학 중 번역서는 0.7%이다. 제국은 견고하게 동종번식을 하며 이웃에게 무지하다. (유럽인들의 오랜 농담이 있다. 언어를 하나만 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게? 미국인.) 한국은 2008년 통계상 29%가 번역서라고 한다. 2016년 판매량으로 따지면 이것보다도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 출판시장을 바탕으로 중심-주변보다는 각국 사이의 서로 어떠한 네트워크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대학의 교수진이 어느 국가에서 왔는지 검토한 네트워크 망처럼) 그러면 보다 다극적인 (그러나 영어 중심인) ‘문화 체제가 실증적으로 밝혀질 것이고, 이것을 시간축으로 변화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몰락과 맹주로서의 프랑스, 중국의 부각. 한일의 가까움 등등)

    

 

 

6. 조동일 선생의 작업을 모레티나 이브 조하르의 작업과 본격적으로 비교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얼마전 UBCRoss King 선생님도 조동일 선생의 작업이 영미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한 적이 있는데, 모레티와 이브 조하르와 대결시킬 수 있다. 특히 생극론에 바탕을 둔 조동일 선생의 세계문학사를 탈식민주의적으로 다시 읽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 연구도 언젠가 하고 싶은데, 일단 졸업하고... 할 것은 많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야네 말 창비시선 373
이시영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특정 시에서 눈물이 난 것이라기보다, 시들이 계속 쌓이면서 감동이 온다. 이번 버클리에 가서야, 이시영 시인이 내가 정말 좋아하던 시 정님이의 시인이라는 것을 상기해냈다.

 

 

정님이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 매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 있니 맛 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 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시인의 첫시집 만월”(창비, 1976)에 실린 시이다. 당시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간 여성을 생생하게 그린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함축한 존재이다. 서비스 노동(이진경)이야말로 노동의 모순을 집약하고 있는 존재이며, 특히 여성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곧 죽음노동임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이 시는 1970년대 한국 리얼리즘 시가 한국사회를 집약하는 한 정점을 보여준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은 이런 점에서 백화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화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회 모순을 드러내는 이러한 방식은 물론 식민지 시대부터 (특히 백석의 여승이 떠오른다) 이어져 내려온 것이지만, 70년대에 이론적 학습과 비평의 지원과 더불어 본격화된다.

이러한 시인은 21세기에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여전히 시인은 짧은 서사를 담고 있는 시들을 주로 쓴다. 과거의 추억을 기억하며, 역사를 넘어설 수 있는 시의 힘을 믿는다.

 

 

() 김정남 선생

 

양재역 12번 출구 앞에서 우연히 김정남 선생을 만났다. 평생을 별다른 직업 없이 살아온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를 한바퀴 돌며 골목을 깨끗이 쓸었다고 하는데, 세상엔 이렇게 그림자처럼 조용한 분들이 있으시다. 칠팔십년대 인권 탄압이 있는 곳엔 그가 늘 뒤에 있었으며 변호사를 대신해 쓴 '변론'만도 아마 수천 페이지가 넘을 것이다. '박종철 사건'도 보이지 않는 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분을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흔히 시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역설이나 은유에서 오는 시적 긴장이나 압축미와 균질미가 야기하는 리듬감을 떠올리기 쉽다. 이 시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가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김정남이라는 개인에 대한 기록이며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알레고리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한 분들이 있으시다그리고 역사는 이런 분을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마치 역사가 잊어버린 정님이를 기록하는 것처럼, 시인은 기록한다. 이를 통해 시인의 고향에 살던 정님이와 김정남 선생은 개인을 넘어서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되고, 또 역사가 된다. 그리고 다시 역사는, 어떤 유형의 사람들은, 생생한 개인으로 살아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추억을 기록하며 역사를 증언하는 한편,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라는 공동체를 부각하고, 작은 우리를 위로한다.

 

 

 

대지의 잠

 

어제 내린 눈 위에 오늘 내린 눈이 가만히 닿습니다. "춥지 않니?" "아니." "어떻게 왔어?" "그냥 바람에 떠돌다가 날려서." "그래. 그럼 내 위에 누워보렴." 둘은 서로의 시린 가슴을 안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정원에서

 

태풍 속에서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한마리가

밤을 새워 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방배3동의 모든 고양이들이 몰려와...

진심으로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이 위로는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것이며 역사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요동호텔에서

 

혁명성지인 중국 연안에 갔을 때다

동굴을 본떠 지은 요동호텔 일층에서 자고 나오다가 그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 동지, 안녕하십네까?” 라고 했다

깜짝 놀란 그가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리시영 동무, 거 앞에다가 경애하는이란 말 좀 붙이면 안되겠습나?”

 

요동은 원래 그러한 곳이다

 

 

내일을 향하여

 

또 한번의 민주정부는 오지 않았다

오늘밤 호남선으로 뻗은 철길 두가닥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다가 잠이 들었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민족이나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또는 민주주의의 말뜻 그대로, 작고 사소한 우리가 바로 민족이나 역사나 사회와 같은 거대해 보이는 것들과 일치하거나 오히려 이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담담하게 쓰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신채호 단편소설선 02: 용과 용의 대격전 신채호 단편소설선 2
신채호 / 작가와비평 / 2013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신채호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국수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의 행보. 한학에서 서구사상까지 비판적으로 흡수해서 자기식으로 바꾸었고, 고전소설, 신소설, 현대소설, 동서양의 신화와 역사를 섭렵해서 자신의 서사를 만든다.

 

꿈하늘(1916)은 문체나 서사가 고전소설이나 신소설과 연속적이고 민족단위의 투쟁을 이야기한다면, 용과 용의 대격전(1928)은 문체도 개혁되고 등장인물에 초점화가 이루어지며, 피지배층의 단결을 주장한다. 서양의 용과 동양의 미르가 각기 서양에서는 악마이자 반역자이고 동양에서는 황제나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 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용이 민중적 세력 동양의 용은 지배세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를 모두 지배세력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보아 비판하고, 왕이나 지배자, 법률, 제국과 식민지 등을 모두 지배세력의 유지를 위한 도구로 보아 비판한다.

 

신채호를 연구한다는 것은, 신채호를 매개로 한학에서 서구사상까지, 유학에서 아나키즘까지, 단군에서 안중근까지를 공부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꼭 연구해야할 대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