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3. 이영훈, "체인지킹의 후예", 문학동네, 2012.

 

매우 흥미롭게 잘 읽었다. 책 말미에 심사위원들이 여러 이야기를 지적해놓았기 때문에, 지적되지 않은 부분만 몇 가지 지적한다.

 

1. 타자의 문제. 타자를 어떻게 이해가능할 것인가의 문제가 전면화된다. 이는 세대 차이로, 개인적 경험의 특수성 등으로 경계가 지워진다. 2012년이면 일베가 전면화되기는 이전이지만, 인터넷 카페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면, 인터넷 카페의 인간형이 주목된다.

 

2. 어린 남성-연상 여성 커플. 남성이 존댓말 여성이 반말을 쓰게 형상화되었다. 남성 반말-여성 존댓말로 영미 소설을 번역하는 경우들이 종종있다. 이승기의 너라고 부를께 누난 내 여자니까라는 가사가 보여주듯이, -여 커플 사이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젠더는 존대어 관계를 전복시킨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남자는 일관적으로 자기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고, 아내는 어린 남편에게 반말을 쓴다. (마지막 암수술 전에만 아내가 남편에게 존대를 한다. 이 때는 남편에게 갈라설지 아닐지를 묻는 시점이라 으로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 해롤드 블룸은 끊임없이 셰익스피어가 근대적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를 통해 비로소 근대적 인간은 어떻게 사유하고 표현하고 연애하는지 알게 되었고, 이를 모방함으로써 근대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영훈의 이러한 형상화도 어떠한 전범으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3. 결국에는 여성이 없는 세계로 귀결된다. 영호---안 이라는 남성들만의 얽히고 설킨 유사 부자관계라는 공동체. 어머니로서의 여성(영호에게도 채연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임이 계속 암시된다)이 사라진 세계에서, ‘형제애로 이루어지는 세상. 왜 여성은 서있을 공간이 없는가? 이영훈의 다른 소설들도 살펴봐야겠다.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라는 작품은, 특히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지 암시를 준다.

 

4. 남녀 관계는 물론 부자 관계에 있어서도 새로운 통찰을 준다. ‘아버지 되기가 근대문학의 중요한 고민이었다. 고아는 어떻게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되기는 한 주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임을, ‘아들-되기와 함께 고민해야 되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백날 아버지-되기를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문제는 구체적 아들과 구체적 관계이다. (이 관계에도 여성이 빠져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나벨 최후의 자손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최욱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 최욱, "슈나벨 최후의 자손", 나무옆의자, 2014.

 

주말에는 최근 동네에 신설된 도서관에 다녀와서 손에 잡히는 데로 책을 빌려서 읽는다. 세계문학상 9회 우수상이라는데, 기본적인 문장이나 스토리 전개가 어설프다. 그래도 좀비라는 소재, 간간히 보이는 이미지들과, 모호한 플롯이 흥미로워서 끝까지 읽었다.

 

슈나벨이라는 것은 페스트를 고치는 의사 집단이었는데, 까마귀 모양 가면을 썼다고 한다. 페스트를 고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역병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이중성과 가면을 쓴 신비스러운 존재라는 이미지를 이 소설에서 핵심적으로 도입한다. 페스트 대신 좀비를 만드는 역병을 소재로 한다. 늘 좀비라는 소재는 좌좀이나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생각없는 비인간적 존재들. 이 존재들은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로, 무리지어서 건물을 파괴하고 인간들을 습격한다. 이 소설 속에서는 정부와 거대기업을 향해 데모를 하는 군중들과 좀비 집단을 겹쳐놓는다.

 

소설 이야기는 여러겹으로 복잡하다. 좀비역병이 해결30년쯤 후의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해서, ‘3류 가십지의 기자이며 친구인 3류 소설가를 취재한다. 3류 소설가는 거대기업과 정부가 합작으로 대규모 재개발을 실행하려는 구도심에 살고 있어서, 조금 후에는 여기서 쫓겨날 신세이다. 이들은 어떻게 그 거대기업이 사업권을 따내게 되었는지 의심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소설가는 그 배후에 30년 전의 좀비 역병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음을 고백한다. 이후의 액자 안 스토리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30년 전 좀비 역병을 치료하려다가 오히려 좀비들이 사유하게끔 만들어 반인간 반좀비로 만들었던, 즉 슈나벨의 이중성을 지녔던 G라는 인물의 아들이 C이고, 이 사람이 현재 구도심을 철거하려는 거대기업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C라는 인물은 G라는 인물과 좀비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라서 몸의 절반은 좀비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B급 좀비소설인데, B급 좀비소설 맞다. 여하튼, 마지막에는 이 거대기업에 데모하는 인물 속으로 C라는 기업 회장이 투신자살한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G라는 인물이 좀비 떼에게 잡혀서 죽음을 당하는 30년전과 겹친다.

 

어찌보면 매우 일베스러운 상상력이기도 한데, 작가는 뚜렷하게 데모=좀비=악으로 도식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이란 무엇일까의 문제, 재개발의 문제 등을 어렴풋이 제기하며 80년대 광주나 용산 재개발 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작가는 어떤 알레고리로 좀비물을 쓴 것은 아니고, 좀비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정처없이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물론 좀비라는 소재는 늘 어떠한 상징성이 있다는 말을 첨언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상징성을 더 밀고 가서, 알레고리적으로 서술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지금은 어렴풋하게 이것저것 짬뽕한 애매모호함 속에서 재미있는 이미지들만이 점점이 놓여있는 잡탕같은 느낌이다.

 

또 이 소설에서 액자 밖 서술자는 그 이야기를 들은 소설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기자로 설정되는데, 굳이 이렇게 액자 속 액자 속 액자를 취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 이야기가 모호해진다. 이는 소설 속 핵심적 장치 중 하나인 시계의 형식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 시계도 3중의 장치를 지니고 있다. 소설 속 슈나벨은 시계공 출신인데, 아마 소설가 자신도 스스로를 이러한 시계공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소설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은 액자형식을 도입해서,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와 이 서술자에 반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추리를 하게 한다. 독자는 끝내 이 소설 속 핵심 인물들의 관계를 명확하게는 알 수 없다. 이 또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마지막에 나름 반전을 기획한 것 같은데, 그 반전이 충격적이지는 않고, 중간의 모호한 플롯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아니스트의 뇌 - 뇌과학으로 풀어낸 음악과 인체의 신비
후루야 신이치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49. 후루야 신이치, "피아니스트의 뇌 -뇌과학으로 풀어낸 음악과 인체의 신비", 끌레마, 2016.

 

 

 

 

피아노나 악기를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실제 연주시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피아니스트와 서툰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 사이의 뇌 활동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 등을 실험을 통해 밝히고 일반인이 알기 쉽게 풀어 썼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어떻게 하면 피아니스트처럼 잘 칠 수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해명해서 연주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물론 피아니스트처럼 잘 치는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가 타건하는 방식, 악보를 보는 방식 등이 서투른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와 어떻게 다른지를 세밀하게 지적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을 보면 도움이 된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동북아총서 17
강원봉 외 지음 / 아연출판부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8. 강원봉 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출판부, 2014.

 

내발론은 이미 오래된, 역설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적인 시각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고, 가지무라 히데키와 내발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차승기 선생의 글이 재미있다. (하지만 가지무라 자체의 논의라기보다는 차승기의 해석이 도드라지고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지무라의 논의가 너무 소략하다-, 차승기의 논의도 너무 빨리 짧게 끝나서 아쉽다.) 가지무라 히데키의 시각으로 가지무라 히데키를 읽는 방식. , 역사 속 미발의 계기를 찾아내는 것을 중시했던 가지무라의 방식으로 가지무라 사유의 가능성을 포착한다.

차승기에 따르면, 가지무라의 내재성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근대 기원을 찾으려는 관점이 아니라, “조선 근대사의 특수성에 대한 지배적 설명 방식이었던 외압, 바로 그 외압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내부로부터 다시 되돌려 본다”(253)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사적 연관 속에서 조선을 바라본다고 하는 관점이 종종 근대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전개를 조선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확인하는 결과를 낳는 것과는 달리, 조선 내부의 시각에서 세계사적 연관을 재구성하려는 시각이다. 따라서 그의 내재성론은 결정론적이라기보다 관계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253) “가지무라의 내재성은 어느 특정의 사회-경제적 단위 안에서 그 고유성의 결정 요소 또는 기원을 찾는 작업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참여하고 있는 복잡하고 불균등한 관계망 속에서 그 관계의 성격을 규정짓는 계기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254)

역설적이게도 가지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을 바라본다는 외재의 위치에서 내재성을 사유한다. 이는 조선인을 객체나 대상으로써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자신의 위치를 반성하고, 때문에 역설적으로 조선을 외재적 억압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내재적 계기로서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상징주의 - 문학의 기본 개념 12 문학의 기본 개념 12
김경란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4. 김경란, 󰡔프랑스 상징주의󰡕,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말라르메 전공자로서 국내에서 말라르메 박사 후, 프랑스에서 말라르메로 다시 박사를 하신 김경란 선생님의 간결한 프랑스 상징주의 입문서. 프랑스 상징주의, 특히 시를 중심으로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의 시를 예시로 하여 프랑스 상징주의의 정신, 미학, 언어, 그리고 그 역사적 전개를 다룬다.

프랑스 상징주의는 보불전쟁(1870)의 패배, 사회주의, 실증주의에 대한 환멸 등을 사회적 배경으로 한다.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현실이 아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였다. 앞선 예술적 사조로서는 고답파와 자연주의의 유물론적 태도에 대한 반발로, 정신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지향을 지닌다. 낭만주의가 개인의 자아를 절대시하고 천재와 영감을 중시했다면, 상징주의는 개인적 자아를 초월하고자 하고 언어의 치밀한 조탁을 추구했다. 현실의 세밀한 관찰로 시작해서 초월적인 관념을 상징을 매개로 재현하고자 했다.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교감, 암시, 음악(뉘앙스)를 통해서 구축하려고 했다. 과학이 아닌 직관, 어떠한 신비로 미지에 가 닿으려고 했다. 이를 위해 보들레르는 공감각적 교감을 랭보는 감각의 논리적인 착란을 베를렌은 음악을 통해 모호한 뉘앙스의 추구를 했다. 이는 모두 기존의 굳어져있는 감각을 초월하여 새로운 인식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론이었다. (동북아에서 아편과 술을 통해 했던 것. 초현실주의가 꿈과 자동기술법으로 전개했던 것) 이는 기존의 라는 자아의 경계를 벗어나서 나는 타자’(랭보) 또는 탈인성화/비인칭’(말라르메)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징주의의 근저에는 플라톤적인 관념론이 있다. 현실의 세계는 거짓이고, 이 뒤에 본질이 있다는 것. 하지만 이 현실은 이 본질로 가닿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이 현실을 시인은 상징으로 파악하며, 그 뒤의 어떠한 본질을 암시하는 것으로 재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본질은 기존의 굳어진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기존의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다. 따라서 감각과 언어의 정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본질을 추구하지만, 이것이 현실을 통해서만 가 닿을 수 있다는 태도, 때문에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재련하려 했다는 것.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서처럼, 그림자가 아닌 태양 아래 실재들을 보고 온 사람은, 그림자만 보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시인들은 자신들의 신비스러운 체험이, 그 직관이 본질이라 믿었고, 그 본질은 상징을 통해 암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을 읽을 예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