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는 책을 19권 읽었다. 이제 점점 윤아가 긴 책을 읽어서 윤아와 함께 읽은 책 권수는 꽤 줄었다. 윤아가 집에 오는 저녁 5시 이후에는 공부를 거의 안 하고, 그냥 잡히는 책을 읽고 있다. 어짜피 공부 안되는데, 책이나 읽자라는;;;;

1월 읽은 책 중 추천도서


1. 이현혜, "좋아서 껴안았는데, 왜?", 천개의 바람, 2015.
기존 아동 성폭력 교육이 '안돼요'라고 소리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책은 (잠재) 가해자에 대한 교육을 중시한다. 이 그림책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해서 껴안은 한 남자아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목 그대로 "좋아서 껴안았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것에 대해서, 모든 것에는 '경계'가 있고 그 경계를 침입하는 것은 상대가 용인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상대가 '무반응'이라고 해서 그것이 허락으로 승인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유치원~초2 정도 수준. 물론 이것도 모르는 50대 아재들도 수두룩하다만...)


2. 밴스, "힐빌리의 노래", 흐름출판, 2017.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면, 미국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 지리상으로 멀지만, 정치, 문화, 경제 상으로 미국은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 혹자는 '천조국'이라 칭송하기도 하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나라이다. 계급, 인종의 불평등. 총기, 마약 등의 범죄...
하버드 대학 교수인 퍼트남의 "우리 아이들"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요즘' 미국의 아이들이 교육 기회에서 멀어지고 있는지를 통계와 인터뷰를 통해 조명했다면, 이 책은 자서전적 성장담을 토대로 미국 내에서의 지역, 계급불평등을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다. 늘상 바뀌는 아버지,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아래에서 미국 빈곤층 백인 (힐빌리/레드넥)의 삶이 어떠한지, 왜 이들은 이렇게도 몰락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자서전적 수필이고, 저자는 그러한 배경 속에서도 해병대 복무 후 오하이오 주립대를 조기우등졸업하고 예일 로스쿨을 나온, '개천에서 용난' 사례이기 때문 정부 정책보다는 개인과 집단의 문화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 김성은, "도대체 뭐라고 말하지 우리말의 숫자와 시간", 한솔수북, 2013. (초1~3 수준)
섯달, 동짓달 등 음력에서 기원한 달. 예순 아흔 등 복잡한 나이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외국인들을 위해서도 유용할 책.






4. 요시타케 신스케, "이게 정말 나일까?", 주니어김영사, 2015.
(초1~3 수준)
아이들을 위한 철학동화. 어려운 개념이 없어도 아이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주인공은 숙제나 어려운 일 등을 대신해줄 로보트를 구입한다. 로보트는 주인공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며 질문을 시작한다.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가?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 주인공은 '자아'라는 것 자체가 다면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 전혀 어려운 말들을 안 쓰면서 질문을 던지게끔 구성되어 있다.


5.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
아픈 존재들. 죽어가는 존재로서의 사람. 또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존재로서의 사람.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 오래된 친구들과 옛날 이야기를 하다보면, 조금씩 어긋나는 기억들과 내가 몰랐던 사건의 다른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의 나는 특정 측면에 머물러 있었다면, 언제나 사건은 그 이상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 과거의 일들이 더 풍성하게 다가오는 것은 때로는 무척 서글프다. 




6. 톰 니콜스, "전문가와 강적들", 오르마, 2017.
현대 민주주의의 반지성주의, 전문가 혐오증에 대한 명쾌한 해설. 결국 대중이 전문가를 감시하는 한편 전문가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 민주주의/공화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도 하게 해준다. 간접 민주주의는 아포리아를 지닌다. 자신을 대신해서 정치를 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만을 지니고, 이 선출직 공무원들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받아 국정을 운영한다. 그런데 이 전문가들을 대중들이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면? '대중지성'은 언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인가?



7.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창비, 2017.
록산 게이의 책도 그렇고, 리베카 솔닛의 책도 어렵지 않고, 페미니즘 책을 한 두권만 읽었어도 모두 친숙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친숙한' 가부장제적 폭력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은 '멘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으로, 명명되지 못했던 현상을 집어내는 능력이 있다. 이 책에서도 여러가지 개념들을 만들어내며,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대학교 새내기들에게 추천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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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
아이유 (IU)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아이유, 가을아침을 들었다. 여혐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인데, 매우 흥미로운 가사다.

 

이병우 작사. 아이유 노래. (원곡 양희은)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눈 비비며 빼꼼히 창밖을 내다보니

삼삼오오 아이들은 재잘대며 학교 가고

산책 갔다 오시는 아버지의 양손에는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수가 하나 가득

 

딸각딸각 아침 짓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엉금엉금 냉수 찾는 그 아들의 게으름이

상큼하고 깨끗한 아침의 향기와

구수하게 밥 뜸드는 냄새가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응석만 부렸던 내겐

 

파란 하늘 바라보며 커다란 숨을 쉬니

드높은 하늘처럼 내 마음 편해지네

텅 빈 하늘 언제 왔나 고추잠자리 하나가

잠 덜 깬 듯 엉성히 돌기만 비잉비잉

 

토닥토닥 빨래하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동기동기 기타 치는 그 아들의 한가함이

심심하면 쳐대는 괘종시계 종소리와

시끄러운 조카들의 울음소리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응석만 부렸던 내겐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뜬구름 쫓았던 내겐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아이유/양희은이 불렀기 때문에 화자가 여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가사 자체는 이병우의 작사이고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이 가사의 내용 자체가 '어머니''아들'의 대립을 바탕으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화자가 남성-아들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외부에서 '여성-가수'가 부르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거리가 도입된다. 이는 추후에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남성(아들)화자를 중심으로 이 가사의 의미에 대해서 논의해보기로 한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지만, 여기서는 어머니의 분주한 가사노동과 아버지/아들의 한가로움이 이항대립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나마 아버지는 산책을 갔다가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수라도 떠오지만, 아들의 게으름한가함딸각딸각 아침 짓는 어머니의 분주함토닥토닥 빨래하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대비되고 있다. 이렇게 가사노동하는 어머니와 뒤늦게 일어나서 냉수 찾고 기타 치는 아들은, 이런 가을 아침이 커다란 기쁨이고 커다란 행복이라고 노래한다.


이 때문에 이 가사가 불편하고, 여성혐오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아들/아버지와 열심히 가사노동하는 어머니를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해명되지 않는 것은 그렇다면, 이러한 가을아침커다란 기쁨/행복이라고 말하는 아들이 계속 반복하고 있는 응석만 부렸던 내겐”/“뜬구름 쫓았던 내겐이라는 한정어가 왜 계속 붙어있는가이다. 한가한 아들과 분주한 어머니를 대비하며, 이러한 가을아침이 응석만 부렸고, 뜬구름 쫓았던 내게는 커다란 기쁨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이와 대비되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응석과 뜬구름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물론 이 가사가 내내 강조하고 있듯이 아들과 이항대립적으로 놓여있는 어머니의 분주한 가사노동이다. , “가을 아침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가 아닌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라고 하여 내겐을 강조하고, 또 다시 응석만 부렸던 내겐”, “뜬구름 쫓았던 내겐이라고 한정하여, 그렇게 응석을 부리고 뜬구름 쫓았던 가 아닌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를 여성 가수가 부름으로써 다시 이 가사에 거리가 생긴다. 게으르게 늦잠자고 일어나서 한가하게 기타치는 아들에 대해서 양희은(91년 발표 당시 40)이라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거나, 아이유(2017년 발표 현재 25)라는 누이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이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더 확보된다.


가을 아침은 양가적이다. 햇살 가득 눈부시지만, 냉기는 서늘하다. 이 둘의 통합으로서 가을 아침이 존재하듯, 한가한 아들과 분주한 어머니, 그리고 내겐가을아침이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하면서 응석뜬구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화자에게 서늘한 냉기는 물리적인 온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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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Breath Becomes Air (Audio CD, Unabridged)
Paul Kalanithi / Random House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Paul Kalanithi, "When Breath Becomes Air", Random House, 2016.

 

 

 

곧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는 경건한 마음이 든다. 죽음 앞에 선 단독자가 쓰는 글이 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떠한 진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 또한 마주해야 할 죽음을 앞서 경험하고 진지하게 고찰한 선배의 글을 후배는 경건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36살의 신경외과 레진던트 3년차이자 뇌과학자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스탠포드에서 교수자리도 바로 눈앞에 놓여있었다. 수술실에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폐암 4기를 진단 받게 된다. 그 이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삶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영문학 석사이자 뇌신경외과 의사로서 술회하며 책을 쓴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문학을 탐닉했다. 영문학, 러시아문학, 독문학 등등. 소설, 시를 가리지 않고, 문학이야말로 인간을, 세계를 이해하게 하고,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생물학과 뇌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다. 영문학 석사까지 끝낸 후, 그는 의학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여전히 문학이 삶을 이해하게 한다고 믿었지만, 그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또한 분석하고 싶어 했다. 그는 뇌신경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뇌수술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뇌수술 후유증으로 숫자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환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된 환자 등등을 만나면서, 삶에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저자의 삶과 문학과 뇌에 대한 통찰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이 글의 후기를 읽으면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후기는 저자가 죽고 나서 저자의 아내에 의해서 쓰였다. 저자가 말기암을 진단받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저자가 마침내 뇌에 종양이 전이되었다는 말을 듣고, 괴로워했다는 말을 담담히 적는 아내의 글에서 눈물이 많이 났다. 저자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가 의사로서 담당했던 뇌수술, 뇌종양이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환자로 경험하게 되다니... 그리고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저자의 본문은, 아직 저자가 자신의 뇌에 종양이 전이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아내를 통해서만 저자가 어떻게 느꼈을 지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욱 슬펐다. 또 저자는 결코 읽지 못했을, 사후 저자의 책과 아내의 에필로그라는 점도...

 

 

 

 

결국 마지막에 저자는 더 이상 치료를 거부하고 몰핀을 맞으며 영원한 잠에 든다. 책에서 일관되게 그가 고민했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무엇이 의미있는 삶인가"에 대해서 스스로의 삶/죽음으로 대답한 셈이다.

 

 

 

 

저자의 아내도 술회했지만, 책의 본문만 읽어서도 저자가 따뜻함, 사려 깊음,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 날카로운 과학적 지식과 노련한 의학기술을 지닌 정말 '좋은'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슬프다. 그래도 이 책을 남겼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문학, 뇌수술, 뇌과학, 암투병기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필히 읽어야 될 수필이다. 따뜻한 문학도이면서 동시에 노려한 뇌의학자, 과학자이며 동시에 말기 암환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슬프지만 또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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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감염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중)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넌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귀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없는 타락들로 가득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나는 허수경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들은 좋다고 하니 다시 읽어본다. 나는 왜 허수경의 시가 좋지 않을까. 나와 접속되지 않는다. 추상적이고, 공감하기 힘들다. 오랜 독일 체류의 시인이지만, 그 체험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유와 이미지는 참신하다가도, 급작스럽게 상투적인 것으로 빠진다. 나와 20년 정도 차이나는 여성 시인이라서 공감하기 힘든 것일까? 하지만 오히려 김혜순은 허수경 보다도 10년 정도 연배가 위지만, 김혜순의 시는 짜릿하고 날카롭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허수경의 시를 좋아하고 싶다. 더 읽어봐야겠다. 좋아하고 싶다.


이런 시도 그렇다. 마지막 2연을 빼고는 무척 좋다. 태아란 일종의 '감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섹스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이상한 비가역적 반응. 폭력에서 또는 사랑에서,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감염. 고독한 화자는, 그 감염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20대, 또는 10대의 화자 같다. 그러나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도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을 갖고 긴 산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약"을 읽거나 "레게음악"을 듣거나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소리에 확 깨고 만다. 나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또는 너무나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조합들로 마무리가 된다... 좋아할듯 좋아할 수 없다..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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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로서, 인간중심주의를 혐오한다. 인간만이 실패하고, 죽음을 깨닫고, 무의식이 있고 등등은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는 (인간에 의해 훈련된) 고릴라를 보더라도 옳지 않다. 의식이라는 것은 뉴런의 연결이 일정 이상 복잡해 졌을 때, (아마도) 언어와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에게도 ‘의식’이라는 것이 생기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혹은 그러한 ‘의식’도 필요 없는 단계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죽음도, 실패도, 무의식도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게 없을 이유가 없고, 이것이 어떠한 ‘위대함’이나 ‘존엄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감능력도,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후회도 사랑도 절망도 간절함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 수도 있고, 인공지능도 개별적이고 독특하고 보편적이고, 그리고 존엄할 수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마침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위대해지는 인공지능을 그렸다. 이는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위대함을 그리고자 했지만, 반대로 인공지능도 결코 ‘단일’하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최우선이자 중심이자 목적이라고 하는 사상, 이것도 사실 몇백년 되지 않은 것이다. 인간 중 일부만이 중심이자 목적이었고, 그 전에는 신이었고, 아니 이 땅에서 몇십년전에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는 태어났고, 오늘날도 인간이 목적인지, ‘고용인적자원부’는 아니라고 한다. 인간과 의식의 탈신비화를 해야 한다. 근대 이후 학문은 계속 이 주술화와 싸웠다. 인간도, 의식도,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이다. 신비스러운 것은 설명이 되지 않은 것을 납득하려 하는 뇌의 원시적 반응일 뿐이다.

뇌 연구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아직 인간의 뇌의 매우 기초적인 수준만 연구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의 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 전에, 인공지능이 인간 뇌의 특정 부분들을 앞지른지 오래이고, 인간 뇌의 집적도 이상의 집적이 가능해지는 일이 생각보다도 빨리 일어날 것 같다. 오랑우탄을 동물원에 가두는 것이 비‘인간’적 행위라는 논의도 있듯이, 인간이 인공지능을 통제하고 이의 ‘생사여탈’을 가능한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권력이 폭력적으로 인공지능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의식’이나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게 또 우리의 삶과 닮았다. 삶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뛰어남’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우리보다 뛰어난 이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타자의 환대. 20세기 윤리학자들의 아우슈비츠 이후 결론은 그렇다. 우리에게 타자는, 공포의 이름이다. 유대인으로, 여성으로, 퀴어로, 다른 색 인종으로 나타났던 타자는, 인공생명으로 나타날 것이다. 데리다는 타자의 환대를 이론화하면서도 동시에 죽음의 위협을 계속 고려했다. 데리다가 암(내 안의 타자)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데리다의 타자의 환대 이론 속에 계속 내재되어 있던 죽음의 위협이 떠올랐다.

터미네이터가 이러한 상상력을 대표한다. 공포스러운 타자.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지양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지향하기 위해서, 타자를 환대해야 한다. 그 낯선 것, 대화불가능한 지점이 바로 그 타자가 타자인 이유이다. 나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절대적 타자로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나타나있다고 생각한다.

아서 C 클락은 “유년기의 끝”에서 인류가 인류를 초월하여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모습을 그린다. 결국 인류의 초월이란 인류가 아닌 그 무언가로 되는 것이었고, 인류는 절멸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인류가 인류를 초월하기 위한 방법은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한다. 위버멘쉬. 정말 초인이지 않은가. 혹은 이는 소크라테스부터 이어져온 오랜 꿈이기도 하다. 육체를 벗어난 지성. 감옥없는 순수한 이성의 빛. (결국 이런 ‘초월’론은 취하게 된다. 니체를 나치가 원용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타자의 환대를 주장하는 것이지, 자살과 학살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알파고랑 터미네이터 팬클럽이라도 조직해야 할 판. 인류를 초월해주삼. 우린 이미 글렀어;; 그리고 케인즈의 명언, “(어짜피) 우린 모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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