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필요 없다 - 인공지능 시대의 부와 노동의 미래
제리 카플란 지음, 신동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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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긴 방학이라, 논문 쓰기는 어려워 이것저것 평소에 관심에 두던 책들을 짬짬히 읽는다. 지난 알파고-이세돌 이후 인공지능(저자의 개념으로는 '인조지능')에 대해 관심이 뜨거웠는데, 이에 답할 수 있을 책이다.

저자는 인공지능과 컴퓨터언어학에서 박사를 받고, 스탠포드에서 인공지능과 컴퓨터의 영향, 윤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단지 책상물림인 것은 아니고, 스스로 벤처회사를 창업해서 성공적으로 매각한 경험도 있다.

 

저자는 인조지능이 앞으로 인간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차분하게 많은 예와 함께 설명한다. 터미네이터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기보다는, 인조지능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남몰래 일하며, 심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이 동물원 속의 동물이 되며 인조지능이 자신들의 세계를 끊임없이 발전해갈 세상을 그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와 같은 경우, 단지 자가용이 인조지능에 의해서 운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가용'이라는 것의 의미가 없게 만든다. 이제 개인이 차를 소유할 필요가 없이, 어디를 가든 차를 부르면 몇 분 안에 차가 대기해서 원하는 곳까지 운전해주는 것이다. , '개인용 대중교통'과 같은 시스템이 10~20년 안에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 등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를 통제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조지능의 시스템이고, 이러한 시스템이 여러 층위에서 작동할 때 충돌하여 엄청나게 큰 혼돈을 야기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실제 주식시장에서 초단타매매 프로그램이 충돌하여 수조의 재산이 공중분해된 적이 있었던 역사적 사례를 제시한다. 인조지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다만 인조지능의 해석결과만을 두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그랬을 때, 이제 인간은 자신보다 더 '똑똑한' 아이를 바라보며, 은퇴 후에 모히또나 마시면 되는 것일까? 한글도 못 쓰는 부모가, 양자물리학을 전공하는 자식을 바라보며, 그래그래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몸도 챙겨... 라고 하는 것처럼?... 그것도 좋겠지만,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진리'탐구의 최전방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서글프기도 하다.

 

물론 인류의 미래가 '모히또'와 함께 여유롭지만 왠지 침울한 은퇴한 노년 같은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지난 50여년간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인조지능의 영향으로 이는 더욱더 증가할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빌 게이츠는 로봇에 세금을 부여하자는 등의 주장도 했다. 인조지능의 혜택을 상위 0.1프로가 가져가야 되는지, 아니면 전체 인류가 누릴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자본이 자본을 생산하는 자본주의가 심화될 수록,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민주주의'는 어떠한 해결책을 낼 수 있을까. 또 빠르게 변화하는 직업에 시장과 정부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를 "직업대출"과 같은 제도를 제안한다. 이에 대해서는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피케티, 퍼트남, 카플란이 모두 소리높여, 빈부격차에 우려를 표하고 '평등'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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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티의 양적 방법론으로의 전환, ‘고전’과 이에 대한 정밀한 읽기에 대한 모레티의 (우회적) 비판은, 인문학의 사회과학적 전회 또는 ‘빅데이터 인문학’의 초창기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이는 인문학은 ...‘지금-여기’에서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철학사에서 철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과학문을 낳고 계속 빈약해지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즉 학문이 발전할수록, 철학의 경계는 좁아진다. 탈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자연과학자였고 문학자였으며 사상가이고 정치가였다. 그러나 오늘날 ‘철학(자)’는 자연과학자도, 문학도도, 정치가도 아니라,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철학은 꾸준히 메타적으로 학문들의 임계점, 사유를 사유해왔다는 점에서 당연히도 여전히 유의미하고 연속적이다. (과학철학같은 비교적 ‘새로운’ 철학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모레티 식의 양적 방법론 근저에는 인문학에 대한 불신 내지는 (질적 연구로서의) 인문학이 ‘엄밀한 과학’에 비해 설명력이나 ‘과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다른 ‘과학’에 도움을 받아 혁신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분과학문이라는 체제 자체가 복잡한 대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학문 자체의 필요성과 편의에 따라 발전되어온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분과학문들 서로는 원래 서로의 도움을 받아 세상과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그리고 인문학의 양적 연구도 분명 유의미한 앎들을 산출할 것이다. 그러나 ‘고전’에 대한 (인문학적) ‘면밀한 읽기’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의의를 변호할 필요는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과학의 질적 연구가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고 ‘미국적’ 양적 연구가 주류를 이룬 상황과 대학 내에서 인문학이 ‘고사’ 위기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이러한 변호는 필요성이 있다.

고전에 대한 페미니즘적, 퀴어 비평적 비판, 그리고 고전 형성관련 제도적 연구를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고전’ 연구는 한 편으로 역사연구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문학사/이론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 연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일반화와 이론화라고 할 때, 인문학적 고전 읽기는 일반화와 이론화라는 방향성을 포기하지 않지만 동시에 한 개인과 개별 텍스트의 독특성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목표로 한다. 이의 유의미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늘날처럼 ‘인적자원’과 같은 개념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독특성’에 대한 주목은 ‘비용편익’ 분석에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사회생물학의 유전자/생물학 환원주의식의 통섭으로는 절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독특성과 개별성을 이해하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떠한 독특성들이 모여서 전체가 된다. 이 독특성들은 일반화될 수 있는 계기로 나아갈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는 그 독특성들의 합이고, 독특성들을 독특성으로 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타자의 독특성은 내 안의 독특성을 이해하게 한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무수히 많은 종자들로 이루어져있고, 각 개인은 무수히 많고 무수히 다양한 종자들로 이루어져있다. 그 종자들의 결합태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각 개인의 독특성을 이해할 때, 이는 어떤 측면에서 나의 독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즉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하여 이론화하는데 주목적이 있다면, 인문학은 복잡한 현상을 그 복잡함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모레티가 논문을 시작하는 인용구에서 “내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라고 한 것은 상징적이다.)

또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어떤 개인에 대한 이해는 시공간에 제한된 나의 앎을 넓히고, 이를 통해 나에 대한 이해도 심화된다. 여기서 이해의 심화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를 포함하는 동적인 것이다. 역사적 구성물로서의 나에 대한 이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심화된다. 따라서 인문학적 ‘질적’ 방법론으로서의 ‘읽기’는 분명 유의미한 것이고, 대학은 물론 모든 연령대 (유치원부터 성인까지)에, 타자를, 세계를, 그리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 유의미한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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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 (페이퍼백)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태식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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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로버트 D. 퍼트넘, “우리 아이들”, 정태식 옮김, 페이퍼로드, 2017.

 

올해 지금까지 읽은 최고의 책. 미국의 교육/사회 현실을 알고 싶거나, 어떻게 질적연구와 양적연구가 결합되어 매우 대중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글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강추하는 책.

 

하버드 교수인 저자는, 한 학부생이 낸 레포트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10년간의 수십 명의 팀과 함께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60년 전 미국에 비해서 지금의 미국은 얼마만큼 계층이동성이 떨어졌는지가 그 주제이다. 특히 이 계층이동성은 '교육'을 기준으로 탐색된다. 즉 자기 부모가 고등학교 이하 졸업한 이들 중에 자식이 대학 이상의 학위를 갖게 되는 비율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 본인의 1959년도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조사하고 이들과 만나서 심층면접을 진행한다. 놀랍게도 이 때는 빈부격차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서로 이웃에서 살았고, 가난하든 부자이든 모두 "우리 아이들"로 여기면서 지원했다. 그 결과 가난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었고, 이들은 공동체의 지원을 받아 대학을 갔고, 놀랄만한 계층 이동성을 보여주는 전국적 지표로, 정말 "아메리칸 드림"은 참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근 6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극변했다. 더 이상 중상층은 노동자 계층과 함께 지내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는지 여부는, 고등학교 성적보다는 자산과 더 관계가 깊다. 중산층의 6~7%만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데, 노동자계층의 60~70%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고, 많은 경우 부모 중 한명은 감옥에 있고,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중상층이 다니는 '공립'고등학교와 노동자계층이 다니는 공립고등학교는 말만 같은 '공립'고등학교이지 천지차이의 시설과 교사들로 이루어졌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차이를 발생하게 한 원인이 심층적으로 탐색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상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퍼트남은 미국 한 국가만 보고 있는데, 1959년의 미국과 2000~2010년대 미국의 중대한 차이는 미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미국을 봐야 한다.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 후 호황이라는 상황, 그 이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 등을 시야에 있지 않다. 읽는 입장에서는, 퍼트남이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겼는지를, 단지 사람들이 가난한 아이들을 우리 아이들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인식 변화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지점이 아쉬웠다. 어쩌면 1950~60년대의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의 배면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제국주의와 세계의 관계(착취)가 놓여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계속 드는 것이다.

 

어쨌든 한국도 미국 정도의 격차는 아니지만, 분명 한국도 유의미한 격차를 보일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이나 80년대 세계의 공장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한국은 선진국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갖게 되었다. 명절 때 만나는 친척들 중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일제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보다 나이가 덜 드신 분들도, 요즘 애들은 좋은 세상에 살면서도 그걸 모른다고 탄식하신다. 반만 맞는 말씀이다. 1930년대나 1960년대 1980년대에 비해서 부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나 1980~90년대 사회생활을 했던 세대에 비해서 오늘날의 청년세대의 계층 이동성이 훨씬 떨어지는 것도 참일 것이다. 전망이 없다. 이는 나의 직관적인, 그리고 주변 청년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에 대한 퍼트남 식의 질적연구와 양적연구가 결합된 연구가 한국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퍼트남은 전국적 통계로 밑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심층 인터뷰로 노동자 가정의 학생들과 중상층 가정의 학생들을 대비시킨다. 미국 전역의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다양한 젠더와 인종의 사람들을 가르는 깊은 경계는 무엇보다도 계급이었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보면서 미국의 현실에 경악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연구 시스템에 감탄하게 된다. 퍼트남은 10년간 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의 재단에게 펀딩을 받아서, 수많은 연구원들과 함께 차근차근히 프로젝트를 진행해간다. 한국 인문학도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집단 프로젝트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학진 프로젝트 식으로 해서 그냥 한명씩 소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서 공동연구로서 결과물을 내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규모의 방대함이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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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도 산하작은아이들 45
이자벨 미노스 마르틴스 글, 야라 코누 그림, 최혜기 옮김 / 산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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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그림책을 윤아에게 읽어주다보면, 나는 글을 읽고 있지만, 윤아는 그림의 세부사항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귀로는 내가 읽어주는 글을 들으면서, 그림을 보고 있는 것. 이 책은 그렇게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 보는 책이라는 특성을 잘 살린 책이다.


책이 바다라고 상상하는 소년, 책 속의 소년이 독자를 끌어들이며, 말을 걸고 함께 책이 바다라고 상상해보자고 한다. 그림의 세부 사항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하면서.


요즘 윤아는 혼자도 책을 읽기는 하지만, 내가 읽어주는 것을 아직은 훨씬 더 좋아한다. 적어도 몇년은 더 윤아가 내가 책 읽어주는 것을 더 좋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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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버렸어요 봄봄 아름다운 그림책 46
소중애 글, 고우리 그림 / 봄봄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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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소중애 글, 고우리 그림, “아빠를 버렸어요”, 봄봄, 2015.
19. 버나드 와버 글, 이수지 그림, “아빠, 나한테 물어봐”, 비룡소, 2015.


“아빠를 버렸어요” vs “아빠, 나한테 물어봐”


오늘도 아내는 윤아가 잘 때까지 못 온다고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다. ‘공무원’ 엄마를 둔 가족에게는 흔한 일요일 저녁. “아빠를 버렸어요”는 이러한 회사-육아 현실에 대한 글이다. 매일 늦게 오고, 휴일에는 잠만 자는 아빠가 매번 치킨 사오겠다는 약속을 어기자, 엄마와 딸이 공모해서 아빠를 버린다. 물론 이후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고 다시 아빠를 되찾는다는 이야기. 중간에 반 친구들과 아빠는 역시 버리는 것이 좋다거나 그래도 아빠가 있는 게 좋다는 식의 논의를 하는 대목이 씁쓸하다. 윤아랑 처음 극장에 간 것, 처음 교사와의 면담, 처음 수영장에 간 것, 처음 음악학원에 간 것 등등을 경험하면,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경험하면서 많이 배웠고 감동한 적도 여러 번이다. 반면에 아내는 윤아랑 경험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한국의 수많은 ‘아빠’들이 공유하는 (비)경험이라는 것.


반면에 “아빠, 나한테 물어봐”는 아빠와 딸 사이의 친근한 관계를 대화체로 풀었다. “사랑해”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딸과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 관계인지를 잘 보여준다. 딸은 계속 아빠에게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 꽃, 꿀벌 등등... 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아빠’는 한국에서 얼마나 될까.


곧 대선이 있을 것 같다. 주말에도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후보는 김기춘식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주말의 주중화, 야근의 일상화, 가정의 초토화”. 이보다는 “저녁이 있는 삶”을 내세우는 후보가 필요하다. 야근은 범죄이고, 주말출근은 끔찍한 일이며, 가정의 초토화는 매국이라는 인식이 필수적이다. 사람을 더 뽑고, 일자리를 나누고, 1인가정이든 다가정이든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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