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의 힘 - 신제도주의 경제사 시각에서 본 국가의 흥망
김승욱 지음 / 프리이코노미스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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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 이사의 저서라 탐탁지 않았는데, 신제도주의 경제사에 대한 학부1학년 수준의 개설서로는 괜찮은 듯싶다. 논쟁적인 학문적 저서라기보다는, 개설서로 논증보다는 설명에 치우쳐져있다. 예를 들어 독일이 영국을 추월할 수 있었던 요인을 제도개혁과 이에 따른 기술혁신 및 기업가 정신이라 주장하는데, 그 근저에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나 다른 변수들을 바탕으로 논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각국의 흥망성쇠의 원인은 시장실패 요인의 제거에 성공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서구에서는 시장경제가 작동하도록 법과 질서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화폐제도가 발전하면서 자발적 교환이 촉진되고 시장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기업제도의 발전으로 자발적 협동이 더욱 촉진되고 시장이 확산되었다.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각종 시장경제제도의 발전은 더욱 기업활동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이 제도의 발전이 서구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238)과 같은 결론이 쉬이 동의되지는 않는다. 이는 18세기 이후 서구의 상황일터이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식민지가 값싼 식량생산의 기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포메란츠 등의 캘리포니아학파가 제시했던 중국같은 제도적 합리성을 갖추었던 나라들이 왜 발전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논의들도 전혀 검토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나 지중해에 대한 근거로 시오노 나나미를 인용하는 것도 어이없기는 하다. 그럼에도 제도가 경제발전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원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학도 학문의 발전에 따라 점점 융복합적 학문이 되어가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신제도주의 경제사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 성장의 근원에는 제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고전주의적 경제학의 한계가 온전히 합리적 인간과 시장을 가정한 데에 있다고 하며, 문제는 실제 국가들 중 어떤 국가는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 다른 국가는 왜 그렇지 못하는가를 답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식민지 착취는 비용보다 이득이 적었다고 하며, 결국 효율적인 제도가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이 효율적인 제도는 거래비용이 적게 드는 제도로서,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적 수익이 사회적 수익에 근접하도록 사회적 유인체제를 조직”(85)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사를 보면 두 번의 경제혁명이 있었다. 이는 거래비용의 크기를 줄이는데 가장 중요한 제도인 재산권 확대의 역사이다. 첫 번째는 신석기혁명으로 정착생활과 농업의 시작이다. 이 때 농경의 시작은 배타적 공동재산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렵채취 경제의 재산권이 공동재산권이라면, 농경은 노동을 투입해 농사지은 것을 노동 투입자의 것으로 인정해야 했다는 것이다. (109)

  

두 번째는 19세기 말 독일과 미국의 경제혁명으로 지적재산권의 확립, 그리고 기업(주식회사)이라는 제도의 창출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멜서스의 덫을 뛰어넘는 생산력 발전이 가능해진다. 지적재산권이 확립되어야 사람들이 기술혁신에 유인된다. 또 기업이라는 위계조직은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으로, 가격 메커니즘의 대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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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미스터리
에르난도 데 소토 지음, 윤영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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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에르난도 데 소토, “자본의 미스터리”, 윤영호, 세종서적, 2003.

재미있다. 명확한 비유를 통해 ‘자본’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제3세계는 명확한 재산권 체제가 확립되지 않아서, ‘재산’을 ‘자본’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페루 태생의 경제학자답게, 페루를 비롯한 ‘제3세계’의 상황을 분석한다. 제3세계 빈민들의 부의 총합은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이것이 국가의 자본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이들은 합법적인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 단위 또는 이를 넘어선 단위에서 문서화되지도 못하고 합법적인 거래의 단위도 되지 못한다. (물론 그 지역 소규모 집단 내에서는 나름의 규칙에 따라서 이는 거래 될 수도 있지만, 국가 단위 또는 국제법에 근거해서 보호받는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광범위한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자본, 즉 잉여가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재산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재산과 자본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저수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저수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거기서 물 떠먹고 그 풍경을 즐기는 것으로만 사용한다면 이는 재산이다. 그런데 이 저수지의 물에너지를 바탕으로 수력발전을 해서 전기를 만들어서 그 전기를 팔아서 그 전기가 다시 다른 산업생산에 도움이 되게 하면 그것이 바로 자본인 것이다.

식민지 시대 토지조사사업도 이와 연관되어 해방 후 한국사 연구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데 소토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시대 토지에 대한 권리는 ‘자본’이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관리들은 수조권을 ‘국가’로부터 이양받은 것이며, 경작권은 농민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토지를 ‘근대적’으로 관리하여 세금을 거두고 ‘착취’하기 위해서, 일본 총독부는 근대적 형태의 소유권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경작권’이 조선시대에 어느 정도의 권리로 인정 되었는가이다. 이영훈 등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소작농의 토지에 대한 물권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과전법은 경작권을 보호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경작권이 보호되었는가? 보호되었다면 이 ‘보호’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가?

사실 ‘근대적’이라고 하며, 서구 중에서도 일부 서구의 근대만을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조선시대 토지에 대한 경작권과 수조권이라는 이중의 권리의 현대적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현재 어떤 건물이나 상가의 매매권과 임차인들의 점유권 등, 임차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와 법들을 적극적으로 사유해볼 때, 이것이 수조권/경작권 등의 이중성과 매우 다른 것 같지 않다. 독일에서 거주의 목적으로 아파트를 임차하는 경우, 그들의 권리는 매우 강하게 보호된다는 점에서, ‘서구 근대’의 물권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 헌법’이 타당하다면, (물론 논리적 비약이지만) 경작권/수조권의 이중적 권리라는 전통적 물권 개념에 비추어, 임차인들의 점유권은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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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김학동 지음 / 일조각 / 198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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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김학동(1935~ )1958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해방 후 대학교육을 받은 1세대 한국현대문학 연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실증적 자료 고증과 비교문학적 방법론의 도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는 그의 비교문학적 연구의 일환으로, 한국시와 1920년대 초를 중심으로 프랑스 시(베를렌, 보들레르)의 이입과 영향, 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 한 하이네 시의 이입과 영향, 1945~1950년까지의 미국문화의 이입과 영향, 그리고 최남선, 김영랑, 김상용과 외국문학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초창기 백철, 김병철, 송욱 등의 연구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고 평가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연구의 한계는 뚜렷하지만, 초기 한국문학 연구의 방향설정에의 고민, 당대의 사상적 전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자료이다. 일단 이 연구의 한계부터 지적하자면, 무엇보다 조선과 서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김학동도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많은 경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을 매개로 하여 서구문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대 많은 식민지 문학도들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글들을 읽고, 그 방향성 속에서 길항하며 서구문학을 수용했다. 따라서 그들의 서구문학 수용에 대해서 올바로 평가하기 위한 실증적 기초로서, 그들이 어떤 책을 보았고 그 책을 왜 보았는지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매개자로서의 일본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는 근래 심원섭, 구인모, 최태원 등의 연구로 보완되고 있다.

두 번째로, 김학동은 영향 및 차용원천에 있어서 그 유사성도 중요하지만차이성도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수신자 나라의 역사, 사회환경, 수신자의 개성 및 지적 수준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인이 바로 국문학의 특질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글은 반복적으로 한국문학의 서구문학에 대한 수용을 영향관계가 심층적인 차원까치 전개됐다기보다는 詩的發想法이나 詩語내지 이미지의 어느 한 局面의 영향에 머문 한계성을 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귀결한다. 이러한 판단은 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분석되지 않고, “당시의 전신자의 입장에서 서 있었던 역자들의 어학능력이나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판단력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한계성만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 여기서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소거되어 있다. 왜 수용했는지를 밝히려고 하지 않으니, 논의는 서구문학은 원래 A라는 맥락에서 a라는 의미인데, 조선에서는 b로 번역되고 수용되었으니 이는 어학능력이나 판단력 부족이다같은 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러한 판단에는 당대 가용 가능했던 조선어의 어휘나 식민지 검열제도와 같은 제도적 압력 등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어떤 표피적 수용이다. 잘못이해했다. 도착언어의 한계. 가용가능 자원.) 3가지.

이 글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놓는다고 할 때, 그럼 어떠한 생산적 관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의 한계점이라고 지적했던 질문들을 이 글에도 적용해야 한다. 즉 왜 이 글은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이 글이 현재 가용 가능했던 조선어(한국어), 그리고 학문적 전통으로서의 자원은 어떠했는가? 어떠한 제도적 압력이 존재했는가? 했다면 어떻게 작용했는가?

 

1. 왜 이 글은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사실 이것이 김학동에게는 자명했기 때문일 수 있다. 서구문학은 발전된 것이고, 조선근대문학은 없거나 있더라도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당연히서구문학을 수용 이입해야 했다. 이는 김학동의, 그리고 당대의 서구(문학)과 근대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근대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근대성은 보편적 가치로 이미 설정된다. 서구에서 발흥했다고 믿어지는 근대성이 과연 보편적인지, 이것이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그 근대성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시간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빨리 수입하여 근대성을 획득하는 것이 먼저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象徵派詩詩論의 도입은 우리 近代詩史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1920 년을 전후해서 출발하는 한국 근대시의 서구적 지향이 그 본질적 속성이라면, 그 시대 이와 함께 유입된 西歐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또는 어느 文藝思潮보다도 프랑스 象徵派詩의 영향이 컸었음은 否認못할 사실이다. (81)

 

이처럼, “1920년을 전후해서 출발하는 한국 근대시의 서구적 지향이 그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은 논증되지 않고 전제된다. 이는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 책이 1981년에 쓰여졌다는 것은, 박정희의 군부개발독재와 전두환의 쿠데타, 광주항쟁 직후라는 의미이다. 이 당시의 개발 이데올로기나 새마을 운동과 김학동 본인이 얼마나 친연성이 있는지는 더 탐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글이 왜 식민지 조선의 문학도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수용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김학동에게는 자명하기 때문이고, 계속 서구(문학)의 우월성과 조선(문학)의 한계를 결론을 내리는 것 또한 이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담론적 효과는, 조선근대문학의 후진성을 파악하고, 당시의 문학에게 이를 넘어설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제대로 서구문학을 공부하고 파악하여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이글이 함축하고 있는 문학사적 교훈이고 당대 문학장에 보내는 전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속 이제까지 懊惱舞蹈의 연구는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모두가 皮相的인 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와 같이 선행연구들을 비판하거나 분석하지 않는 태도도 이해된다. 이 책 어느 곳에서도 선행연구가 비판되고 분석되지 않는다. 김병철 선생의 연구만 긍정적으로 언급될 뿐이고, 기존 연구들이 왜 피상적인지, 어떤 지점을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구 이론가, 특히 워렌과 같은 이들의 논의만이 본문에 길게 서술되며 이에 대해 반응하며 문제의식을 명료화한다. 물론 이는 당대 한국문학 연구의 식민성/사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이 글 저류에 있는 김학동의 학문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서구(문학)의 우월성과 조선(문학)의 한계라는 도식이 연구의 측면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2. 이 당시의 가용했던 학문적 자원은 어떠했는가? 당대 담론장은 어떠한 논의들이 있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김학동의 글은 1981년에 출간되었지만, 1960년대에 이미 완성된 인식틀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 1960~70년대 창비를 중심으로 제3세계 문학이나, 문지를 중심으로 구조주의가 소개되고, 루카치를 비롯 하우저 등의 문학사회학 등이 담론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내재적 발전론 영향 아래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1973)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학동은 이들과 표면적으로는 전혀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影響硏究의 문제는 점차로 소외되고 있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 近代文學의 경우, 이 방법으로 解決되지 않으면 안 될 側面도 없지 않다고 본다. 近代文學史再構에 있어서 영향연구는 필요불가결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本稿는 그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여 韓國近代詩解釋을 위한 기반을 影響源泉의 연구에서 찾아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4 로 구성되어 있다. 韓國近代詩에 미친 西歐詩의 영향문제를 다룬 것들로, 發信者受信者의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다· 모두가 移入를 근거로 추출한 영향요소로서, 局面의 해결이 없이는 한국근대시의 實相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다루어진 試論들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근대시에 미친 서구시의 영향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한국근대시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전제는 확고부동하다. 따라서 다른 논의들과 전혀 대결할 필요가 없다.

 

물론 문학사에서 쟝르나 文藝思潮, 주계 및 형식의 이동변이가 이루어지는 요소로서는 전통적인 것도 있겠고, 이와 함께 외래적인 것도 있겠지만, 특히 우리 근대 문학의 경 우는 外來文學的영 향요소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사의 연구에서 외래문학의 영향문제는 가끔 國文學硏究法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을 부분적으로 해결해 주는 利點도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프랑스의 비교문학이나 國文學硏究法인 실증적이고 역사적 방법이 요구되고 있다. 적어도 影響源泉의 문제롤 포함한 文獻學的硏究와 이에 수반되는 문학연구의 요건이 확립될 때까치 필요한 것이다. 이 실증적이고 문헌학적 방법으로 해곁돼야 할 基礎資料가 정리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세운 假說들이 무너질 위험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증적이고 역사적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한 國文學硏究가 어느 정도 본격적인 軌道에 올라설 때는 문학연구의 본령을 되찾아 文學理論批評울 기저로 한 審美的領域으로 전환·수정돼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6)

 

두 가지 지점이 말할 것도 없다’. 첫째, 근대문학은 전통적인 요소보다 외래문학적 영향요소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둘째, 실증적이고 역사적 연구방법으로 국문학연구가 궤도에 오리면 문학연구의 본령인 문학이론과 비평을 기저로 한 심미적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 자명함이 결합됨으로서, 근대문학의 실증적 연구로서 비교문학 영향관계 파악이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논증하지 않는다.

 

 

3. “영향관계가 심층적인 차원까치 전개됐다기보다는 詩的發想法이나 詩語내지 이미지의 어느 한 局面의 영향에 머문 한계성을 노정했다는 귀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에 따르면 영향관계는 심층과 표층을 나눌 수 있다. 표층은 시적 발상법, 시어, 이미지의 한 국면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고, 심층은 이를 아우르는 총체성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총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을 심층적영향이라고 한다면 1. 그러한 영향은 새로운 시인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고넨을 창출하는 것이다. 2. 다른 언어로 그러한 영향이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할 때에도, 이는 시로서 성공할 수 있는가? 즉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가?

여기서 김학동은 거의 정확히 같은 것을 심층적 영향으로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베를렌과 김억을 비교하며, 베를렌은 "落葉과 같이 표류하는 영혼이 내면화한 시적 율조를 타고 흐느끼는 것" 이지만 "외형의 고정된 악성만을 표방한 나머지, 영혼은 별개로 유리되고, 작자는 가시형상에 머물러 애상하는 것이 김안서의 시세계라고 평가한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내면화한 시적 율조가 분석되어야 하는데, 이는 분석되지 않는다. 단지 자유시형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프랑스 시사의 맥락에서 자유시의 의미가 식민지 조선의 상황(프랑스어로 쓰인 정형율 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자유시의 의미가 조선에서는 불가능했던 상황. 조선어에 대한 연구 및 가용 가능한 어휘들의 폭 등) 가능하지 않았던 역사적 배경을 따져야 한다. 그리고 김억이 서 있는 전통의 맥락 속에서 왜 차이가 났는지를 따져야 한다. 김억 초기시를 살펴보면, 프랑스 상징주의적 어휘가 한시의 구조 속에 담겨져 있다. 베를렌을 읽는 선비와 같은 모습이 김억 초기시이고, 이는 한국 근대시 형성의 중요한 이미지이다.

 

프랑스 상징파의 시와 시단을 논의하고, 그것을 전범으로 시를 썼으면서도 그 본질적인 핵심의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 시대 상징주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해가 수반되지 못했던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그 수용과정에서 실패를 자초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한국 근대시에 미친 프랑스 상징파 시의 영향문제는 이러한 한계성 위에서 해명돼야 할 것이다. 상징주의의 영향하에서 그것을 표방하여 시를 썼으면서도 그 내면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어나 이미지 및 발상법의 어느 한 국면을 모방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133)

 

즉 김학동에 따르면 온전한 수용이 아닌 것은 수용에 실패한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내면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고, 이를 한국시에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표였던 것이다.

 

김학동의 이 연구는 한국문학의 비교문학적 연구에서 백철, 김병철, 송욱 등을 계승하고, 뒤이어 심원섭, 구인모, 최태원 등의 연구로 보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60~70년대적인 문학연구의 사상사를 정리한다고 할 때, 김학동의 연구는 당대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이는 서구적 근대의 보편성을 믿고 또 체험하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었던 세대의 작업이었다. 이렇게 실패한 문학사를 그림으로서, ‘올바른서구문학의 수용을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담론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1930년대생은 모두 이렇게 환원될 수는 없다. 김윤식, 김용직, 백낙청, 조동일(1939~ ) 등과 함께 비교할 때, 이들 세대의 담론적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재선(1936~ ), 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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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라는 사상 - 장병린과 한자권의 언어론적 비평이론 문자.사회.문화 총서 10
린사오양 지음, 서광덕.최정섭 옮김 /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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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린사오양, 󰡔수사라는 사상 장병린과 한자권의 언어론적 비평이론󰡕, 서광덕, 최정섭 옮김,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이 글은 장병린(章炳麟: 1868~1936)의 논의를 修辭라는 키워드로 묶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5.4운동의 주역, 특히 호적과 이의 응원자라 할 수 있는 루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중국의 전혀 다른 국학에 대한 계보를 접하게 되어서 많이 배웠다. 특히 루쉰은 백화문 뿐 아니라 고전 문어에도 밝은데, 루쉰도 장병린에게 사사받았다고 하니 이 연결도 흥미롭다.

장병린은 소학의 대가이다. 소학은 그것을 가지고 본자가 자()를 빌려 변천하는 흔적을 분명히 하는 것”((󰡔장태염전집󰡕 7, 415)으로, 고증학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 (), ()는 대체로 한자학에서 글자의 3요소이며, 3요소에 대응하는 학문영역은 각각 근대적으로는 문자학, 음운학, 훈고학으로 나뉘고 있지만, 전근대에 삼자는 불가분한 것으로서 소학이라고 불리는 문자언어의 학문분야로서 인식되었다. (248)

 

중국 고전은 수천년을 두고 전래되어 왔고, 글자는 원래 의미에서 변하기 때문에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소학에 통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변화된 글자와 뜻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방언과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방언이야말로 옛 음운이 보존된 것이고, 이 시각에 의해 방언이 어떻게 일부의 문자의 발전과 변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해지고, 보다 정확히 고전을 해석하기 위한 입구가 열리기 때문이다.” (154)

이러한 소학자의 입장에서, 장병린은 백화문중심주의(호적 등)를 비판한다. 백화문자들은 문어와 구어 사이의 거리가 너무 큼을 문제제기하고, 인민의 글인 백화문으로 모든 글을 쓰자고 주장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문어와의 단절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방언들의 균질화를 의미했다. 장병린은 이 둘 다를 비판한다. 문어와의 단절과 방언의 균질화는 결국 전통과의 단절을 유래할 것이며, 이는 결국 을 끊어지게 한다.

장병린에게 은 광의의 의미에서의 , ’(축간과 비단)에 드러나는 것 곧 모든 쓰인 문자를 의미한다. (문학총략(1906)) 이러한 문의 --를 통해 드러난다.

 

넓은 의미에서의 은 다음절 글자를 구성단위로 한, 음성의 규율적인 후렴과 변화를 가리킨다(일반적으로 말하는 음악성이다). 다음은 넓은 의미에서의 인데, 이것은 한편의 시에서의 공간성과 시각성에 대한 것이며, 이 공간성과 시각성은 글자의 내부의 최소 의미성분으로서의 의부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은 이러한 글자의 배치, 배열 등에 의한 형식감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는 한자의 정적인 의미, 다소 고정적인 관념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 ‘과 동적 관계성 가운데 있는 이상, 그것 자체도 정적인 채로 있는 것은 불가능하며, ‘’ ‘과 함께 독서의식에서 어떤 시적 텍스트의 정서()가 된다. 따라서 에 대한 고찰은 불안정하며 동적인 것에 다름아니고 사건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글자가 ’ ‘에서 잘라내어 고찰할 수 없는 것처럼, ‘에 대한 고찰도 그러한 글자의 3요소와 독서의식에서 잘라내어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덧붙여 중국의 문학적 작품 특히 근대시, 고전의 운문에서는 리듬초점과 정보초점(즉 본서에서 말한 의()의 초점)이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중국어에서 한자는 음절문자여서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음절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 ‘를 고립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 (248-249)

 

이러한 장병린의 개념은 중국에서 동한, 육조에서 문/필의 대립을 운이나 어떠한 형식성을 지닌 것을 의미한 것과는 다르게 광의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병린은 문자의 本字를 강조하며, 과도한 引伸를 비판하여 하고 그 한다를 내세운다. 이런 점에서 “‘개념은 미를 특권화하여 의 역사성, 윤리성, 비판성을 멀리하는 미학주의를 비판하는 문맥에 있다.”(126)

장병린이 가차를 인신과 동일시하며, 이것을 아네자키의 표상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하고,이를 한자의 비유이론으로서 전개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다”()라는 표현에 있는 내린다라는 말은 본래 인간이 언덕으로부터 내려온다는 의미였지만, ‘인신된 결과 비가 내린다라고 비유하여 말해지게 되었다. (...) 이 자()들은 본래 비유였던 것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미 비유로서 인지되지 않게 되고, 일상언어로서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곧 폴 리쾨르가 말하는 죽은 은유가 되어버린다. (...) 우리의 세계, 어떤 의미에서는 인신이라는 비유적 언어체계에 의해 구축된 세계. 이 때문에 생인(生人)의 사상은 반드시 표상주의 바깥으로 등약할 수 없다라고 장병린은 아네자키를 부연하면서 결론적으로 서술하였다. (165)

 

이러한 관점은, 인지시학, 개념은유도식 등을 논의하는 현대 비유에 관한 이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장병린이 인신을 중시한 것은 언어사상적 시각에서 보면, 자의의 비유성이 운동하는 성질과, 그 활발한 확장성과 자립성에 주목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 장병린은 소학에서의 과도한 자유(孳乳)와 종래의 비평이론에 있는 문식주의표상이라고 보았다. (...) ‘은 분리불가능하기 때문에 질로부터 멀어지는것을 표상주의라 하고, 그것을 문식주의라고 장병린은 규탄한 것이다. 질로부터 멀어짐문사가 더욱 정교해지는것을 인과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167)

 

이러한 관점은 논어와 주자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本末, 文質 논의를 계승한 것이다. 장병린은 문의 질을 결국 으로 보았다.

이러한 장병린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저자 린사오양은 과감한 결론을 내린다. --()과 같은 제3항은 근대의 이원론 주관(인간)/객관(사물)을 비판할 수 있는 매개이며, 타자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이 이원론은 계몽적 폭력이나 한 쪽의 중심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언어라는 타자의 해석이 참여가능한 매개적 항인 언어적 공공공간이 제 3항에는 있다는 것이다. (323) 그리고 이러한 근대의 제3항 말소를 사회구조적으로 개인과 중앙 국가권력 사이에 독립성을 지니고 있던 향리질서의 말소, 문화적으로는 집단주의적 문화의 고양에 의한 다원적인 지역문화의 약체화, 언어적으로는 문언문의 전면폐지를 포함한, 문자언어의 다양성의 말소, 교육시스템에서 본다면 내셔널한 교육체계의 형성에 의한, 서원이라는 전근대의 민간지식인이 자주적,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장 등의 말소” (324-5)와 연결시킨다.

이 서구 근대라는 것이 이원론적이라는 것은, 일부는 맞지는 일부는 너무 단순화했다. 사회구조적으로도, 정치사회-시민사회-시민이라는 3분법이 있다. 문제는 서구발 근대가 식민지나 반식민지에 도입될 때, 도입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근대자본주의, 근대국가관료체제는 도입되지만, 시민사회는 도입되지 않는다.(만민공동회가 이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여러 신문매체는 공론장 형성을 위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민사회의 힘이나 역할은 미진하다.) 이는 도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서구발 근대성의 제국주의적 속성으로 볼 때 서구발 근대성에 이의 형성을 기탁할 수는 없었다.

구어와 문어의 분리가 심각한 중국에서, 백화운동은 문어를 폐지하고 구어의 전면화를 의미한다. 문어는 엘리트층과 인민을 나누는 경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문어는 과거와 오늘날 그리고 중국의 방대한 지역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장병린과 같이 백화문이나 에스페란토어화를 반대했던 지식인은 이러한 문어의 역할, 그리고 문어가 3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 주목했다. 반면에 호적과 같은 5.4운동의 주역들은 보다 평등주의적인 구어로의 변화가 급선무라고 보았다. 이러한 차이의 근본에는 이라는 것의 인식에 대한 차이가 있다.

 

문자가 기억의 매체라고 한다면, 고전문언문과의 자연적인 연속성을 단절하고자 한 근대중국의 배타적인 백화문이데올로기는 공화의 꿈을 꾸면서 처음부터 윤리적 혁명적인 동기를 강하게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문언문을 포함한 다원적인 전근대의 모든 기억과 모든 역사를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한 의지에 다름 아니며, 제로에서 근대라는 새로운 의식,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기 위해 동일하게 새로운 기억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유포하고자 한 의지 그 자체이기도 하다. (333)

 

이러한 지적은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오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욕망에 대한 해석으로도 적절하다. 이광수는 문학이란 하오에서 문학은 literature의 번역어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문학이 외래어의 번역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문학이라는 개념의 외연과 내포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이 글은 그러한 기존의 문학literature라는 기의로 변경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럴 때도, 그는 기존 문학의 의미망에서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기묘하게 의미들을 중첩시킨다. 이는 그의 문사와 수양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즉 한문맥적인 문사라는 자기 이미지가 핵심적으로 작동해서, 서구의 literature와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첩성은 김억이 천리’, ‘사무사’, ‘격조등의 한문맥적 개념으로 자신의 논의를 설명할 때나, 김소월이 정성위음으로 자신의 시관을 드러내고 소식의 글을 이용하여 자신의 시론을 전개할 때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이는 그들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김억은 서구적인 멜랑콜리를 정조로 하고자 하지만, 이는 한시의 구조 속에서 발화된다. 김소월은 영원하면서도 변화하는 것의 길항을 시로 써내고, 이는 곧 그의 시론 속에서 서구적인 것과 한문전통적인 것으로 대별된다. , 한문맥적 사유와 구문맥적 사유가 긴장과 갈등을 이룬 것이 바로 소월의 시적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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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학 - 읽기의 무한에 관한 탐구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조영렬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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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들에게 강추하는 책. 시 연구자는 당연히 강추하고, 소설은 물론 비평 연구자들이 계발될 지점들이 많을 것 같다.

0. 書不盡言, 言不盡意
요시카와 고지로의 방법론은 청대의 고증학을 계승하여, 책에 쓰인 글자가 끝나는 곳의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끝나는 곳의 ‘뜻’을 면밀하게 읽는 것이다. 이는 시를 읽는 방법으로 모든 글을 읽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어와 문어의 격차가 크고, 문어의 압축미를 강조했던 구양수 등의 문체는 이러한 방법론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중국 특정시대 문체에 대한 방법론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존재의의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방법론이다.
그는 역사/철학과는 다른 지점에 문학(요시카와는 문학연구라 특정하지는 않지만, 언어에 대한 연구. 그러나 언어학은 아닌 오늘날 ‘문학’연구와 같은 연구) 연구를 놓는다. 역사가 사실을 중시하고, 철학이 애초부터 보편을 탐구한다면, 문학은 좀 더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개별을 언어를 매개로 탐구한다. 세상은, 사람은 무한히 복잡하다. 언어는 제한되어 있다. 작가들은 이 무한한 복잡함을 제한된 언어 속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독자는, 문학 연구자는, 이 제한된 언어 속에서 그 무한한 떨림을 포착해야 한다. “사실 그 자체를 중시하는 동시에, 사실에 의해 생겨난 저자의 의식, 혹은 의식을 처리하는 저자의 태도를 중시하는 방법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 (98)
이를 위해 요시카와 고지라는 단어 하나하나 어기 하나하나에 주의한다. 십대 때,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문자 속에 있는 쉼표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듯이, 그렇게 시를, 문장을, 역사서를 읽는다. 이것은 과도한 작가 환원주의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라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는 어떤 미세함을 통해 텍스트의 복잡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일본시에서 같은 모음이 겹치는 것은 중국시와 달리 자각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다. 시인의 자각에도, 독자의 의식에도 반드시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의식 아래에 미치는 작용은 미묘하게 존재할 수 있다. (175)” “내가 설명한 그 모든 것을 사마천이 의식적으로 조절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의식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효과가 더욱 미묘해질 수 있다.”(202)

즉 요시카와 고지라가 지향하는 지점은 ‘의식적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 곳에 있다. 계사전의 書不盡言, 言不盡意에 덧붙이자면, 意不盡實이다. 意가 아니라 實을 탐구하고, 이를 재구성해내는 방법론.

1. 오규 소라이를 ‘대선배’라 지칭하는 태도.
이러한 요시카와 고지로의 태도는, 오규 소라이를 ‘대선배’라고 호명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은 고문과 수백년의 거리가 있는 주자학의 시각으로 고문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문의 자의, 문리를 정밀하게 따지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근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80년대 학번의 학자들만해도 ‘선배’라는 생각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선생과 선배는 다르다. 선생은 나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난 이로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자이다. 반면 선배는, 나보다 먼저 공부에 들어선 자이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나의 문제의식이 연속선상에 있는 존재이다.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만, 선배에게서는 그의 시대 속의, 학문 속의 문제의식을 배우고 공유한다는 의미가 있다. 적어도 그런 감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카와 고지로가 오규 소라이를 ‘대선배’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고전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감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근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도 충분히 숙고해야만 하는 태도라고 여겨진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4.19세대가, 식민지 시기 임화, 최재서 그리고 김억, 김소월의 시대 속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이, 그들을 ‘선배’로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2. 논어 자재천상왈(子在川上曰),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사주야(不舍晝夜)에 대한 다산과 이유원의 해석.
한 가지 요시카와 고지로의 책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고려, 조선의 유학자들의 논의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뿐만 아니라, 다산이나 이유원의 해석, 또는 최한기의 해석과 그들이 놓여있던 문맥을, 요시카와 고지로가 주목하는 오규 소라이, 게이추 등의 문맥이나 깊이와 더 나아가 중국의 맹자, 주자, 왕안석 등과는 어떻게 다르게 울리고 있는지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일 것이다. 특히 다산은 논어고금주를 쓴 바 있다. 이와 본격적인 비교하는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산과 이유원의 해석을 제외하고 조선조 시문에서는 맹자의 해석과 결부시켜 이 대목을 해석한 것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윤선도, 󰡔고산유고󰡕; 이곡, 󰡔가정집󰡕; 이현일, 󰡔갈암집󰡕 등. 󰡔조선왕조실록󰡕, 정조 2년 무술(1778) 12월 15일(신미)에도 시독관 심염조(沈念祖)가 동일하게 논어를 강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여러 주석들을 제시하고 분석하고 있다.

補曰 逝者,人生也。自生至死,無時不逝。【〈魏風〉편002云:“逝者其耋。”】 ○補曰 斯,爲川也。舍,止息也。○邢曰:“見川水之流迅速,且不可追復,故感之而興歎。”
包曰:“凡往也者,如川之流。” ○案 逝者之爲何物,注疏皆不明言,將謂之日月之光陰乎?光陰者,晝夜也。謂晝夜,不舍晝夜,其言無味,將謂之‘天地化生之機ㆍ天體健行之運,晝夜不息’乎?天道循環,無往不復,非如川流之一逝而不反,其喻未切。惟吾人生命,步步長逝,無一息之間斷,如乘輕車而下斜坂,流流乎不可止也。君子進德修業,欲及時也,而學者恆忘此機,此夫子所以警之也。【《孟子》曰:“源泉混混,不舍晝夜。” 別是一義,非此經之所宜引】
王應麟曰:“《楚辭辨證》云,‘洪引顏師古曰,「舍,止息也。屋舍ㆍ次舍,皆此義。《論語》不舍晝夜,謂曉夕不息耳。今人或音捨者非是。」’ 《辨證》乃朱子晚歲之書,當從之。”

다산도 맹자를 참조로 하여, 이를 공자가 학인들에게 경계한 말이라고 풀이한다. 덧붙이는 다산의 말은 우리들의 생명이 간단없이 중지함이 없이 나아간다고 한다.
惟吾人生命,步步長逝,無一息之間斷,如乘輕車而下斜坂,流流乎不可止也. 君子進德修業,欲及時也,而學者恆忘此機,此夫子所以警之也。

흥미로운 것은 如乘輕車而下斜坂라는 대목으로, 수레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 같다고 비유한 대목이다. 이처럼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논어집주에 해당될 수 있는 대목을 떠올려보면, 공부를 계속 하여 익숙해지면, 공부를 멈출 수 없다는 대목이 있다. “說은 喜意也니 旣學而又時時習之면 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하여 自不能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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