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 「허무주의의 초극과 현실에 대응하는 전복적 시적 인식의 두 얼굴 -70년대 시 동인지론」, 민족문학사연구소 현대문학분과 편, 󰡔1970년대 문학 연구󰡕, 소명출판, 2000.
 

꽤 괜찮은 글인데, 제목과 제일 처음 인용방식이 마음에 안든다. 1970년대 <<70년대>>와 <<반시>>, <<자유시>>를 ‘민중시와 무의미시의 양극화 현상’이나 ‘순수/참여’의 경직된 구도로 파악하는 것을 지양하고, 70년대 후반 시인들의 근원적 고민을 파악해보겠다는 시도이다.

우선 <<70년대>>는 60년대 <<현대시>> 동인과의 대타항을 통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조합에 자족적인 만족만을 만들어내는 미적 기능 대신에 형이상학적인 인식적 기능’을 부여하려 하고, 이를 통해 난해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내용의 핵심적 주제는 죽음, 허무였고, 이 허무를 피하지 않고 응시하여 이에 대응하는 힘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주체가 환멸에 몸을 맡긴 채 언어유희에 빠지고 말았던 <<현대시>> 동인’과의 차이점이다.

궁극적으로 이 논문의 핵심은 <<반시>>와 <<자유시>>의 비교이고 <<70년대>>는 일종의 전사로서 다루어졌다. 다음과 같이 이 둘을 비교해 놓았다. “<<자유시>> 동인들의 경우는 ‘언어의 자유’를 꿈꾸고, <<반시>> 동인들의 경우는 ‘언어로써의 자유’를 꿈꾼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언어가 현실을 드러내 줄 수 없다는 절망을 기반으로 일상 언어의 파괴를 통한 현실로부터의 가상적 자유인 ‘언어의 자유’를 꿈꿀 수 있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언어가 현실을 드러내줄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언어를 통해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부조리함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근저에 가지고 있는 것은 훼손된 세계 속에서 훼손된 인간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당위”(351)였다는 것이다.

역시 <<자유시>>보다는 <<반시>>가 더 구미에 맞는데, <<자유시>>는 ‘소통이 단절된 인간소외 현상과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 상황을 고발’하며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한 분열’을 전제하는 모더니즘적 세계관 속에서 세상의 부정성을 드러낼 뿐이다. 즉 ‘억압받고 있는 주체 내적인 상황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러면서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저항하고 비판하면서 유토피아적 희망을 길어 올리는 것’. 사실 이들 시쓰기의 ‘목적’을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하면, 이들의 시는 말도 안되는 것이 된다. 보다, 주된 ‘목적’이란 결국 자아의 근원적인 상처, 세상과의 단절감 등이 될 것이고, 시쓰기를 통해 치유나 세상과의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해는 되는데, 읽거나 연구하기는 꺼려진다. 아직 ‘미성숙’한 느낌때문일까, 이는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반시>>는 민중지향적이며, ‘언어 세공 중심인 난해시의 관념적 세계인식을 거부한 채 현실의 구체적인 진실에 충실하려 한다’. ‘위대한 단순성’을 표방한 쉬운 시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유시>>는 이미 파괴된 공동체 속에서의 의사소통을 포기한 채 개인적인 내면적인 육성을 발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제로 시를 선택했으며, <<반시>>는 공동체라는 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쉬운 시로 현실의 모순을 공유하는 의사소통의 기제로 시를 선택했다.” 이 지점이 문제적인데, 결국 <<자유시>>도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어떤 층위에서든 ‘의사소통’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적 차원에서, 한 자폐적 세계가 다른 자폐적 세계를 공감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러나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간 것이 <<반시>>적 인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정말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한 분열’을 전제한다면, 어떻게 ‘시쓰기’라는 실천이 가능하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모더니즘’에 대한 공감과 공부가 부족하다.

마지막 <<자유시>>와 <<반시>>의 한계에 대한 박지영 선생의 지적은 새겨둘만 하다. “<<자유시>>의 경우 이들의 시에서는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다. 단지 괴롭다는 상황만이 존재한다. 그 불투명한 현실 인식은 <<70년대>> 동인들로부터 줄기차게 이어오는, 7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막연하고 일반적인 불행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은 그 환부가 치료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근원이 불명확한 불행의식은 그들의 시에서 절실성을 삭감시키고 있다. <<반시>>의 경우도 안타까운 면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에게는 <<자유시>>동인의 시에서 결여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 적극적인 실천이기보다는 김명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떠남’과 정호승의 시에서 드러나는 ‘기다림’과 같은 막연한 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 역시 이들의 사회적 인식이 분석적 인식이 아니라 정호승의 ‘슬픔’과 같은 정서적 인식에 가깝다는 데서 파생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그들이 표방했던 ‘위대한 단순성’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한데 이는 그들이 현실모순의 핵을 바라보는 시선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표제아래 지나치게 단순화되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이러한 원인을 ‘70년대 현실의 모순’이 ‘너무나 순식간에 중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극복의지가 ‘이 충격과 그로 인한 상처에 눌려 다소 소극적이고 관념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80년대에 가서 “<<반시>>의 경우는 좀더 이론적으로 무장되고 시적 경향도 좀 더 견고해졌으며, <<자유시>>의 경우도 문학과 사회와의 연관성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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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 2009-07-0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뭔가 전문적이고 심오한 내용이라 3문단 읽다가 마우스를 스크롤 해버렸다 -_-;
낼 아침에 시험보러 갈 것보다 시험보러 가는 길에 아침으로 에그맥머핀을 먹을까 소시지에그맥머핀을 먹을까가 더 고민된다. 맥모닝 3000원 할인 행사가 끝나서 안타깝다.
기인도 주말 사랑하는 마눌님과 함께 잘 보내셈~~

2009-07-05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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