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임성모 옮김),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원전, 󰡔飜譯と日本の近代󰡕, 1998)
 

 

 

 



실망이다. 대가들의 대담집은 유용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방향성이 없다. 번역과 근대, 특히 동아시아에서 번역과 근대라는 주제는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관련 논저로 특히 문학분야에서는 김병철, 󰡔한국현대번역문학사 연구 상, 하󰡕(을유문화사, 1998), 조동일,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지식산업사, 1994)를 들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학관: 메이지 시기 일본인의 전통적인 사유구조에서 생물학보다 뉴턴적인 수학적 물리학의 충격이 컸다. 사농공상도 에도 중기부터는 상호의존적인 세포처럼 유기체의 구조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無機的인 뉴턴 역학의 자연은 일본의 자연관에는 없던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대립시켜서 모든 의미성이나 가치성을 박탈하고 보는 시각이 유교나 불교에도 없던 것이었다. 또 자연과학에서의 ‘실험’이라는 것 또한 새로운 것이었다. 동양은 음양오행이라는 선험적인 범주로 이해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험은 존 듀이의 도구주의에 가깝다.

흥미로운 지점은, 메이지시기 번역의 문제를 다루면서, 단 한번도 ‘오역’이나 번역의 질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이 문제로 나름 떠들썩한 한국의 상황과 대조된다. 특히 얼마전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이 일본번역된 칸트를 ‘당당히’ 인용했다고 해서 부럽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 집에 둘러보니 󰡔트랜스크리틱󰡕은 어디있는지 보이지 않고, 고진의 다른 책들을 들춰보니(󰡔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윤리21󰡕) 직접 인용하는 모든 사상가들을 직접 번역해서 인용하는 것 같다. 인용의 출처를 󰡔자본론󰡕과 같이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별로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번역 수준문제의 논의가 생산적이기 이전 시기를 대상으로 논의하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일본번역의 수준도 그다지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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