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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탑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
P.D. 제임스 지음, 황종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일단 알라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의 저자에 대한 소개.
애거서 크리스티와 나란히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추리작가로 손꼽히는 P. D. 제임스는 1920년 8월 3일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딸에게 고등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아버지 탓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고 17세부터 세무사무소 비서, 영화 스태프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41년 군의관이던 남편과 결혼해 두 딸을 두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복무 후 정신병을 얻어 돌아온 남편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1964년 사망할 때까지 병원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이후 영국 국가보건기구(NHS), 내무성 경찰국과 범죄정책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1979년 은퇴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시인 겸 경관인 애덤 달글리시가 등장하는 첫 소설 《그녀의 얼굴을 가려라》는 1962년이 되어서야 출간됐다.
이후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표작 ‘달글리시 시리즈’ 14권을 포함, 20여 권의 추리소설 및 여러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그중 유일한 SF인 《사람의 아이들》(1992)은 영화 <로마>,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2006년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받는 등 지금까지도 ‘역사에 남을 걸작 SF’로 손꼽히고 있다.
P. D. 제임스는 영국 왕립문학회와 왕립예술회 회원이었으며, BBC 운영이사와 예술위원회 산하 문학자문단 단장을 역임했고, 영국문화원 이사, 미들섹스와 런던의 치안판사로 일했다.
영국법정변호사협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의 추리작가협회 양쪽에서 최고의 영예인 그랜드마스터와 다이아몬드 대거 칭호를 받았고, 국가예술클럽의 문학 부문 명예훈장을 포함, 여러 상을 받았다.
영국의 일곱 군데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1983년에는 대영제국 4등 훈장을, 1991년에는 ‘홀랜드 파크 남작 제임스’라는 당대귀족 칭호를 수여했다.
1997년 영국저작권협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2013년 8월까지 직무를 수행했고, 2014년 11월 27일, 옥스퍼드 자택에서 9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본명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Phyllis Dorothy James).
그러니까 보건, 경찰, 정책 분야의 공무원으로도 일했고, 치안판사로도 일했으며,
추리 소설을 포함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 작품 중에서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원작 소설도 있고,
영국 왕립문학회와 왕립예술회 회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 예술 단체에서 임원으로 일했으며
대영제국 훈장을 비롯하여 여러 상을 받았고
자택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인데...
여기까지 읽으면 군의관인 남편의 발병 및 사망으로 자신과 두 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는 부분이 잊혀질 정도로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부와 명예와 장수까지... 다 누린 사람이니까.
상대적으로 한국에 덜 알려져 있는 작가라고 하는데, 나는 그녀의 이력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원작 소설을 썼다는 점이었고, 그 점 때문에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전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달글리시 시리즈의 달글리시가 역시 이 소설에 등장하는데, 은퇴를 번복하고 죽을 위기를 넘기는 등의 내용을 보면 이 소설은 달글리시 연대기의 중간쯤 해당하는 것 같다. 찾아보니 맞는 것 같고.
다른 시리즈에서의 달글리시는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다. 여기에서는 경찰 일에 회의를 느끼고 사건 앞에서도 한 발 담갔다가 뺐다를 반복하는 느낌인데, 소설 전반에 흐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탐정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그들이 나가자 달글리시는 침대에 드러누워, 마치 방금 이 방에 처음 들어온 것처럼 그 몇 평 안 되는 소독된 공간을 둘러보았다. 손을 살짝 대기만 해도 물이 나오는 세면대. 뚜껑 있는 주전자가 놓여 있는, 깔끔하고 낭비가 없도록 고안된 사이드테이블. 비닐이 씌워져 있는 방문객용 의자 두 개. 머리맡에 동그랗게 말려 있는 이어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무늬 커튼이 쳐진 창.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이런 을씨년스럽고 개성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장소에서 죽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이곳은 호텔방과 마찬가지로 잠시 머무를 나그네를 위해 설계된 방이다. 여기서 지내던 사람이 이 방에서 나갈 떄는, 제 발로 걸어나가든 아니면 영구차에 실려 나가든,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들의 불안과 고뇌, 그리고 희망의 기억조차도.
죽음의 선고는 달글리시가 늘 상상하고 있던 것과 같은 형태로 내려졌다. 즉, 침통한 얼굴들, 일종의 연극 같은 성실함, 은밀하게 오가는 말들, 하나마나한 것까지 포함된 갖가지 검사, 그리고 달글리시가 강경하게 요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정확하게 얘기해주지 않는 진단 결과와 예후. 그런 식으로 병이 한 고비를 넘긴 뒤에 약간의 궤변을 곁들여 내려진 완쾌 선고는 달글리시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었다. 그토록 분명히 죽음을 선고해 놓고 이제와서 완쾌되었다니, 아무리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 해도 달글리시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아쉬움 없이 자신이 얼마나 담담하게 일과 즐거움을 단념했는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떠올려본들 모두 부질없었다. 그것들은 좋게 말해서 마음의 위안, 나쁘게 말하면 시간과 정력의 낭비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또다시 그것들에 열중하여 그런 것은 소중한 것, 적어도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라고 다시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소중하다고 다시 한번 믿을 수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체력이 회복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생활이 저절로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것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또다시 인생에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일시적으로 뒤틀린 분노와 나태함은 건강의 악화를 구실로 삼을 수 있고, 그 덕분에 잠시동안 쉴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의 동료들도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해줄 것이다. 옛날에는 섹스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말을 다들 공공연하게 떠벌리는 세상이 된 대신, 죽음이 그 터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상에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되기 전에 주위 사람들이 '명대로 살다가 좋은 세상으로 갔다'고 덕담을 할 수 없는 나이에 죽는 것은, 오늘날에는 최대의 악취미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에서만 그런지, 다른 소설에서는 인물의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왠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탐정 달글리시는 시인 겸 경관인데, 이것도 특이하다. 예술과 공직, 양쪽에 걸쳐 있는 모습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이 책을 읽자마자 책에 대한, 그리고 작가에 대한 인상을 규정한 것은 가장 앞에 나오는 작가의 비망록이었다.
도싯(Dorset 영국의 지명)을 사랑하는 분들께, 내가 아름다운 도싯 주(州)의 지형을 멋대로 차용한 것, 특히 토인턴 농장과, 퍼벡 연안에 있는 검은 탑이라는 두 개의 가공 장소를 지어낸 무모함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들의 풍광은 빌려왔지만 등장인물은 순전히 나의 창작에 의한 것이며,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 실재했던 인물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밝히는 바입니다.
때때로 창작의 자유라는 화두가 등장할 때가 있다. 역사 왜곡까지 가지 않더라고, 특정 지역이 언급되거나,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묘사가 작품에 등장할 떄 그렇다.
이 작품은 지명만 가져온 것 같은데, 어쩌면 이런 말을 책을 읽기도 전에 덧붙인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독자로 하여금 책에 몰입하는 정도를 줄여버릴 위험성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넣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공직에 오래 있었던 작가의 이력을 떠올리게 하고, 또 소설의 내용을 상당히 바꿔버린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 대하여 원작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하여서는 예술적 허구와 그것이 실제로 발현되는 현실의 논리에서 확고한 주관을 가진 작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유명한 탐정들-지금까지 읽은 동서미스터리북스를 기준으로 보면 셜록 홈즈, 에르퀼 푸아로, 드루리 레인, 브라운 신부, 피터 윔지 경, 파일로 밴스 등 대체로 공직과 직접 연관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어디에 묶여 있지 않아 자유롭고, 그래서 틀을 깨는 발상을 하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달글리시는... 마지막에 가서야 전모를 알게 된다.
한 명 한 명 용의자에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다가, 이 범죄가 왜 생겼을까 동기를 찾다가, 마지막에 등장하게 된 범인과 동기는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지금까지 읽은 추리 소설의 동기와는 사뭇 멀어져 있다.
그래서 신선하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여운이 남았다.
범인보다는 그 동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