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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노생거 사원
700쪽에 달하는 에마를 읽고 난 직후라서 그런지 짧게 느껴졌다. 술술 읽혀버려 가뿐한 마음도 있었지만, 주인공인 캐서린의 이야기가 좀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 책은 사실상 제인 오스틴의 최초의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성과 감성이나 오만과 편견이 여러 차례 개작을 거친 반면 이 소설은 주인공 이름을 바꾼 것 말고는 거의 처음 상태에서 수정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에 나온 소설에 비해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몇몇 지점이 흥미롭다. 주인공인 캐서린은 당대 고딕 소설이나 낭만 소설에 몰두하고 있으며, 소설을 은근히 경시하던 당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당히 이야기한다. 사교계에 이제 막 진출한 그녀는 사회 경험이 없기에 미숙하지만, 자신이 읽은 소설을 바탕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궁금한 점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간다. 그 과정의 끝은 결국 우스꽝스럽게 끝나는데, 어쩌면 이것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전에 소설 읽기에 몰두했었고, 어느 순간 당대 소설의 전형적인 이야기에 한계를 느끼며,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 글 안에서 구현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그리고 그 소설로 인정받겠다는 다짐이 녹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점 때문에 작가는 나중에라도 이 소설을 다른 소설처럼 전면적으로 개작하지 못한 상태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로 살겠다는 결심이 본격적으로 설 무렵의 소설은 그 누군가보다도 작가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 있기 때문에. 다음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래드클리프 부인의 작품들은 매력적이지만, 또 그녀를 모방한 작가들의 작품도 매력적이지만, 그것들에는 적어도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인간 본성은 고려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침엽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악행이 도처에서 자행되는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에 대해서는 그 작품들의 묘사가 충실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스위스, 남프랑스라면 그 소설들에 재현된 것처럼 공포스러운 일들이 자주 일어날 수도 있었다. 캐서린은 자기 나라 너머에까지 그런 의심을 할 엄두를 내지는 않았고, 자기 나라라도 구태여 말해 보라면 북단이나 서단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중부 지역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부인조차 국법에 의해서, 그리고 시대의 풍습에 의해서 안전한 삶이 확실히 보장되고 있었다. 살인은 용납되지 않았고 하인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며 독약이나 수면제는 대황처럼 약제사한테서 언제라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 지대 사람들 중에는 마음 속에 선악이 혼재된 인물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지역에는 천사같이 흠 하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악마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이 살 터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기질이나 습관을 보면 사람마다 선과 악이, 섞이는 비율은 다를지라도 일반적으로 혼재되어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녀는 비록 헨리 틸니와 엘리너 틸니에게서 앞으로 약간의 사소한 불완전한 점들이 보이더라도 놀라지 않을 터였다.
사람마다 선과 악이 일반적으로 혼재되어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믿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사소한 불완전한 점들이 보여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이 태도는 그녀의 소설과 인간관계 전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랬기에 당시 친척들의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독신 여성의 삶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꾸준히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약하지만 때로 강인하고, 냉정하지만 때로 자비로운, 모순 덩어리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녀의 소설은 전부 여주인공의 결혼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제인 오스틴이 두 번 결혼할 뻔했으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겠지. 만약에 그녀가 결혼을 했더라면 결혼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깃든 멋진 소설을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아마도 그랬다면 오히려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