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아웃케이스 없음
이윤기 감독, 임수정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우연히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곧 개봉하는 전도연, 공유 주연의 남과 여 때문이었다.
핀란드라는 미지의 세계(나에게 완벽한 미지의 세계는 아니다. 나는 핀란드를 다녀온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미지란 것은 먼 북쪽 나라이자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는 나라인 핀란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년에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북유럽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아쉬웠다. 다녀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마음껏 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고, 어떻게든 실재가 그 상상을 뛰어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를 배경으로 한 남과 여의 사랑. 아, 이미 내가 밟아버린 땅이라는 게 아쉽다.
아무튼,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보다가 감독이 멋진 하루와 여자 정혜의 이윤기감독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본 그의 두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지만, 완전히 구별되는 영화이다. 오히려 동일한 감독이 아니라, 비슷한 성향의 두 감독이 각각 만든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러고보니 두 영화에 대한 리뷰를 내가 쓰지 않았다. 멋진 하루를 보면서 하정우라는 배우에 대해 감탄하고, 역시 전도연이구나 하고 느끼며 원작 소설까지 찾아보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언젠가 포스팅해야지.
이윤기 감독의 영화 중 러브 토크는 엄청 보고 싶지는 않은데, 이 영화와 한효주 주연의 아주 특별한 손님은 참 궁금했다. 아마도 주연 배우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이미 수많은 포스트로 인해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데다가 이윤기 감독의 스타일과, 예고편을 보았을 때 대략 어떤 식으로 흘러갈 지 짐작은 되었지만. 그러다 오늘, 보게 되었다.
비도 안 오고, 이렇게 화창한 날에, 이렇게 영화 내내 비가 오는 영화가 보고 싶어지다니.
나도 내 마음 상태가 궁금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어떤 개인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 오늘이...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갑자기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는 차 안에서 시작된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남자는 운전을 하고 있고,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
여자는 일 때문에 일본에 갈 예정이고, 남자는 김포 공항에 그녀를 데려다 주고 있다.
남자는 도심에 있는 작업실을 정리하고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작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업이 있을 때마다 집에 들어오지 못했고, 함께 있을 시간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부실한 기내식을 먹어야 하는 여자를 걱정하고, 외국에 가는 김에 좀 더 기간을 연장하여 놀고 오지 않는 여자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무심히 여자의 남자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칭찬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여자가 입을 연다.
집을 나갈 것이라고. 헤어지자고. 당신도 알고 있는 일 아니었냐고.
화면이 바뀌고 비가 내린다.
남자와 여자가 살고 있는 집 안. 여자는 집을 청소중인 것으로 보인다.
청소중인 것으로 보였는데, 짐을 정리하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맛있는 커피를 타다 주고, 아끼던 그릇을 싸주는 남편.
거기에다가 둘이 함께 마지막으로 먹는 식사를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에 저녁을 예약했다.
꼬치꼬치 캐묻지도, 소리지르지도, 욕하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너무 착한 것일까, 지은 죄가 많아서 차마 따질 염치가 없는 것일까, 그냥 바보인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설명이 없기에, 보는 사람은 스스로 상상하며 과거와 현재의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연애했고, 결혼한 지 5년이 되었고, 아이는 없다.
남자는 건축 관련 일을 하고 있고, 여자는 출판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원래 남자는 설계를 하고 싶어했으나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이며,
여자는 요리책을 출판했던 적이 있고, 현재 불륜 관계의 남자는 아마도 일 때문에 만난 사진 작가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에게 만들어 선물했던 인형, 둘이 함께 보고 파스타를 만들었던 요리책 등 짐을 정리하면서 둘 만의 추억이 계속해서 나오고, 끝까지 '나이스'한 모습을 보이지만 언제 폭발하지 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휴화산 같은 남자와, 그것을 참지 못해 살짝 폭발하려다 말다가 하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작은 활화산 같은 여자의 모습이 보여지던 중, 갑자기 빗속에서 길을 잃은 고양이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남자의 손에 상처를 남기고 집 안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이윽고 부부의 집을 방문한 고양이의 주인 부부는 쏟아지는 비로 시내로 나가는 다리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아마도 여자의 애인이자 영화 시작할 때 차안에서 남자가 일부러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남자 동료는 아직 정리할 게 남았냐고 여자에게 묻고, 비가 많이 와서 다리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자에게 그럼 내일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는다.
헤어지기 직전의 남자와 여자에게는 하룻밤이 더 남은 상황.
고양이 주인 부부는 고양이를 찾게 되면 연락해 달라고 하며 떠나고,
남자와 여자는 예전에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파스타를 만든다.
양파를 썰던 남자가 눈물을 흘리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오던 중 다시 눈물이 솟구친다.
파스타를 접시에 담던 여자 앞에 사라졌던 고양이가 나타나고, 여자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괜찮다고.
극한 상황에 도달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주인공, 길을 잃은 고양이, 쏟아져 내리는 비. 여러 모로 한국 영화보다는 일본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 소설을 영화화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멋진 하루도 일본 소설 원작이었는데. 화차도 그랬고.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에 대한 흔해빠진 소개말.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한 소개말이 있을까 싶다. 가까운 것은 당연히 지리적인 것이고, 먼 것은 역사, 풍습, 문화... 셀 수 없겠다.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정서. 관조적인, 냉정한, 절제하는 정서. 흔히 일본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서 극화할 때 실패와 성공을 가르는 결정적인 부분이 이 일본 특유의 고요하고 가라앉은 정서를 어떻게 한국식으로 바꿀 것인가에 사활이 걸려있다고 본다. 흥분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작품에 끌리게 되는 요소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한국으로 가져와버리면 굉장히 우스워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주인공을 바로 옆에서 훔쳐본다는 느낌이 든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멋진 하루도, 화차도, 손예진과 감우성이 출연했던 드라마 연애시대도, 김명민의 출세작인 하얀 거탑도, 주제의식과 내용과 소재는 그대로 가져오되, 그것을 한국식으로 토착화시킴으로써 어딘지 모르게 신선한 느낌이 들면서도 내 직장 동료, 어릴 때 친구, 대학 동창의 이야기처럼 친숙한 느낌을 동시에 주었는데, 이 영화는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실패한 것 같다. 만추나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했던 두 주연 배우를 생각하면 이 영화의 어색함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사람의 잘못 같기도 하고, 동일한 감독에 역시 일본 작가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던 멋진 하루에서 하정우와 전도연의 찰진 앙상블을 생각하면 연기자의 미숙함 때문일 것 같기도 하다.
"폭우로 고립된 집, 갑자기 침입한 고양이, 비 새는 집 등의 상징은 초급자용 퀴즈처럼 영화 여기 저기에 속출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긴시간 미동없는 카메라의 묵직함을 지탱하기 어려워보인다."
이 영화를 평가한 한 잡지의 편집장의 이 문장을 보고 바로 무릎을 쳤다.
P.S. 남과 여의 예고편을 보다가 작년에 다녀온 핀란드 여행 사진을 보게 되었다.
높은 산은 하나도 없고, 큼직큼직한 건물이나 도로도 거의 없으면서 온통 풀밭과 나무로 끝없는 녹색 평지가 펼쳐진 모습이 한없이 아득했던, 착륙하기 전에 점점 다가왔던 핀란드의 모습, 저녁 9시 반에 도착했는데도 백야 현상으로 대낮 같았던 헬싱키 공항, 단 두 시간의 어둠 후 서서히 해가 떠오르던 호텔 앞 호수의 새벽 4시 반의 모습,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 동화책의 그림에서만 보았던, 몸통은 하얗고 잎은 파란, 하늘 끝까지 솟아 있는 것 같은 삐쩍 마른 나무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을 쏟아질 것 같이 눈부셔서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는 돌아다니기 힘들었던 날들. 끝없이 펼쳐진 선명한 녹색을 바라보며 이곳의 겨울은 어떨까 궁금하고 그리웠던 날들. 아, 기억이 생생해진다. 이제 남과 여를 보러 가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