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홀릭 - 백야보다 매혹적인 스칸디나비아의 겨울 윈터홀릭 1
윤창호 글.사진 / 시공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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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올해 여름은 정말 덥다 덥다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거기에 장마가 정말 대단했다. 입추도 지나고 처서인지만 아직도 덥다. 우리나가가 아열대성 기후로 들어서서 '스콜'이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소리도 나오고 점점 아열대성 기후로 접어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렇게 나가다보면 겨울이 그리운데 그렇다고 겨울이 오면 또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사람이란 정말 간사해서 추우면 더운 것을 원하고 더우면 추운 것을 원한다. 해가 나면 비가 오길 바라는 것과 같이 그래서였을까 덥길래 겨울 이야기와 같은 이 책을 꺼내들고 사진만 죽죽 넘겨 가며 보아도 정말 시원하고 좋은 것이다. 난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추운것을 잘 이겨내지 못하지만 눈을 좋아해서 눈이 오면 밖을 밖으로 나가고만 싶어져 혼자서라도 뒷산에 올라가 설경을 담곤 하는데 직접 눈으로 보는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은 어떨까 정말 기대되서 얼른 읽어 나갔다. 정말 이쁘고 멋진 사진집이다.

 

프롤로그에서 처음 글로 접한 '중독', 하얀 겨울을 보고 있으면 정말 힘들지만 중독일 될 듯 하다. 피요르드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중세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뭔가 장중하면서도 눈과 함께 하는 몽환적인 느낌에 기다리는 자에게만 행운을 가져다 주는 '오로라'까지 정말 중독이 아니고는 북유럽의 겨울을 만나기 힘들 듯 하다.하지만 이곳은 모든 여행자들이 떠나가기라도 한 듯 텅텅 빈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그런 가운데 무언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준 듯 하다. 게스트하우스에 주인장도 없고 여행객도 없고 혼자서 텅텅빈 게스트하우스를 혼자 독차지 하고 과연 맘 편히 잠이 올까? 한편으로는 그런 시간을 언제 또 누려볼까? 난 여행할 때 여행객들이 북적북적한 곳보다는 한적할 때를 더 좋아한다. 가끔 으스스 하면서도 한적함에 더 많은 것을 담고 사유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많으면 밀려 다니며 덜 보고 덜 느끼는 듯 하다.하지만 몇 시간씩 달려도 주유소도 가게도 보이지 않는 한적함에 영어가 아닌 자국어를 너무 사랑한다면 여행객들은 힘들지 않을까.

 

북부 지역 역시 가는 곳마다 숨 막히는 절경의 연속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하다 싶었다. 생에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여행이 어디 별스러울 수 있을까. 세상은 그저 다 비슷비슷한 것들로 만들어져 있을 뿐인데,하지만 아이슬란드는 달랐다.꽁꽁 언 땅에서 김이 올라오고, 때때로 화산이 폭발하는 섬, 게다가 실수로 조금만 더 북으로 나아가도 빙하와 맞닿을 듯한 이곳에선 고립된 채로 오랜시간을 견뎌온 고독의 냄새가 났다.

 

그가 발을 옮긴 곳은 아이슬란드,핀란드,러시아,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다. 많이 들어 본 나라도 있고 많이 들어봤어도 잘 모르는 곳도 있는데 사진을 보며 읽어 나가다 보면 몰라도 빠져 든다. 인공온천인 '블루라군' 사진을 보니 정말 이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몽환적인 색의 온천에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이 몸을 담그고 있는데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온천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겨울의 황량함 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서일까 여유가 느껴진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고 여행객도 그렇고 모두가 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즐기는 것처럼 설경속의 여유가 더위를 날려준다. 이런 겨울은 내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기 보다는 남의 것을 훔쳐 보는 것이 더 재밌다.

 

겨울은 겨울 그대로의 묘미가 있는 듯 하다. 여행객이 없어 불편한 점은 있어도 설경이 주는 피요르의 아름다움이 얼마전에 본 '설국열차' 를 보는 듯한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오로라를 만나기 위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동 거리며 기다려도 꼭꼭 숨겨두듯 잘 보여주지 않는 오로라,그것을 핀란드에서 잠깐이지만 만난 그 희열은 아마도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여행서를 읽다보면 간접적으로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데 오싹 오싹 하면서도 왜 끝까지 가고 싶어지는지,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보다는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기대되는 것은 뭘까. 오로라 뿐만이 아니라 소설 속의 그곳도 만나보고 멋진 여행을 많이 했지만 역시나 여행은 낯설고 멋진 풍경도 좋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일 것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이를 다른 곳에서 반갑게 만나기도 하고 카페에서 만났던 이를 또 다시 찾아게 만나게 되는가하면 헤어졌던 이의 목소리마져 반갑게 들려오지 않을까.

 

시원하면서도 정말 멋진 구경을 한여름에 하니 더 좋다. 겨울여행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정말 힘든 여행일텐데 덕분에 시원한 여행을 했다. 추운 겨울만 담은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아름답고 삭막함 보다는 풍성함이 느껴지는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여행이었다. 요즘 북유럽 추리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더 찾아 읽고 있는데 얼마전에 읽은 <스노우맨> 생각도 나고 타우누스 시리즈도 생각나면서 그가 러시아에서 찾은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주는 여운도 있지만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가 더 생각나는 것은 뭘까. 이 책은 겨울에 봐도 정말 좋을 듯 하다. 겨울에 보면 겨울이 주는 그 묘미를 또 다시 느낄 듯 하다. 여름엔 시원하게 읽을 수 있고 겨울엔 그 아름다움을 더 느끼며 볼 수 있는 북유럽의 겨울이야기다. 겨울에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그가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을 잊지 못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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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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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은 <신데렐라 카니발>로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장르소설을 좋아해서인지 그의 다른 책들도 다 읽어봐야할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을 인터파크에서 연재한다고 해서 앞부분을 조금 맛보기로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나나니 더 궁금하고 빨리 읽어보고 싶은데 어찌하다보니 미루게 되었다. 하지만 올해를 넘기면 안될 듯 해서 얼른 집어들게 읽게 되었는데 무겁다.아니 가슴이 아프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가 발로 뛰면서 취재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라 그런가 더 절절한 듯 하다.

 

아동성매매와 장기밀거래,얼마전에 뉴스를 보다보니 어린 소녀가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장기가 적출된 이야기를 보고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그런가하면 어느 곳에서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인 '아동성매매' 아동성매매 뿐만이 아니라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거나 그로 인해 죽음까지 이르는 일들이 가끔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일들,출산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12살의 카를라는 이제 초경을 막 시작하여 그 느낌이 익숙하지 않은 소녀다. 친구가 주말에 있는 파티에 가자고 하여 가게 된 그 날부터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백팔십도 바뀌게 된다. 모범생이며 성적도 우수했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친구와 파티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빠져들다 그녀는 성매매의 표적이 되게 되고 가족과 떨어져 마약과 알콜 그리고 성매매로 인해 점점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가족은 그녀를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인 파트릭은 그녀를 끝까지 찾고 있었던 것,하지만 그녀를 빼내려던 순간에 죽음을 맞게 되고 그녀 또한 반년 후에 마약과 알콜로 인해 죽고 만다. 아들과 딸을 잃은 가족은 찰나의 시간에 와해되고 아내는 영혼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되고 아버지는 그런 그들을 잊을수가 없다.아니 그들이 단란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영원히 잊을수가 없다.

 

백합 열두 송이가 제 앞으로 배달되어쓴ㄴ데,12는 아주 비범한 숫자죠.게다가 흰 백합은 무덤에 놓는 꽃이기도 하고요.은퇴한 목사인 아버지 말씀으로는 12는 우주의 질서를 표현하는 신비로운 숫자라더군요. 둥근,닫혀 있는 완전한 같은 뜻도 담고 있고요. 이 편지를 쓴 사람, 범인이 틀림없는 이 사람에게는 우주의 질서가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나봐요.

 

이 소설은 율리아 뒤랑시리즈라 율리아와 그녀의 파트너 프랑크가 한조가 되어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며 범인을 찾고 살인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발로 뛰게 된다.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율리아에게 쪽지와 백합꽃이 전달되고 지역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저명한 인물들이 하나 둘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된다. 왜 누가 무엇 때문에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음독으로 죽게 한 후에 남자의 성기를 잘라내고 목을 긋고 그 피로 이마에 666이란 숫자를 남겨 놓는가 하면 살인 현장에는 백합 한 송이와 성경이 담긴 쪽지를 남겨 놓는다. 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명예까지 거머쥐고 있는,겉으로는 먼지 하나 찾을 수 있는 이들이 왜 살해를 당해야만 하는가?

 

겉으로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이들,그들은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그런 그들의 뒷모습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상상 그 이상의 행동을 하였으니 살인사건이 하나 둘 일어나면서 서서히 수면으로 떠오르게 된다.남색자라든가 아동성폭생 추악한 그들의 욕망의 끝은 어디인지? 그런 그들의 거대한 조직은 아동성매매 뿐만이 아니라 마약등 독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뭉쳐 거대한 조직을 형성하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그들의 조직에 딸과 아들을 잃은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방법으로 '복수'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더이상 좌초할려고 해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삶,아내는 영혼을 잃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식을 잃고 자신 또한 살아가고 싶지 않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라면 아니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라면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면에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범인과 공범이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누구라도 자신의 아이들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면 복수를 꿈꿀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 정당한 무언가 조사나 사건 해결에 대한 경찰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해도 영원히 그 복수의 마음을 지울수가 없을 듯 하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자신이 몸 담은 조직에 의해 피해자가 되고 살해되었다면 어떻게 잊고 살아가겠는가.그런면에서 범인을 옹호하게 되고 처음 살인은 끔찍하게 다가오지만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자신의 목숨을 살려 달려고 비는 냉혈인들의 몸부림은 동정할 수 없게 된다.

 

살인 혹은 복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처한 일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게 된다.돈을 벌려고 아이와 타국에 왔다가 아동성매매의 표적이 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면,아니 그 아이들이 장기매매에까지 가입이 되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범인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까? 그가 살인이라는 복수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의 자식들 죽음은 그냥 묻혀졌을 것이고 아동성매매 마약거래 장기밀거래등은 수면으로 떠올지 않았고 거대 조직은 뿌리 뽑히지 않고 사회의 그늘에서 그 뿌리를 더 깊고 넓게,뿌리 뽑지 못할 정도로 뻗어 나갔을 것이다. 범인의 응징이 있었기에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고 그들의 뒷모습이 파헤쳐지면서 거대 조직의 그림자도 드러나게 되었고 그들의 손에 의해 죽어간 아이들이나 피해자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누군가는 십자가를 져야 했는데 그는 스스로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메스를 들었던 것이다. 너무도 씁쓸하고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는 현실이라 더 슬프다.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약자가 바로 아이들인데 아이들은 맞거나 학대당하거나 성폭행당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놈들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아이들의 영혼은 죽고 말았겠죠. 그런 아이들은 마약중독자나 매춘부, 남창 등으로 전락하게 돼요. 그리고 다시는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죠. 어린 시절 학대와 강간을 당했던 수치스러운 기억을 영원히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제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면 뭐합니까, 전부다 역겁고 추악한 놈들인걸요! 사람들은 이런 놈들을 성인군자라고 생각하겠죠...

 

어떻게 보면 범인은 누구다라고 지목해 놓고 그가 왜 범행을 저질러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에서 늘 등장하는 트릭과 범인을 추리해나가거나 살인동기를 찾기 보다는 미리 모든 것을 밝히고 그가 범인으로 그들을 왜 처단해야 했는지 함께 하게 만든다. 율리아 또한 마지막 살인이 일어나기까지 그냥 놔둔다. 대부분 추리소설에서 보면 마지막 살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범인을 찾아내서 막는 방법을 택하는데 이 소설은 마지막 죽음까지 모든게 다 벌어지게 놔둔다. 그리고 독자에게 그런 현실을 한번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내 가족이 그런 피해자라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하다. 범인의 입장이라면 정말 하루라도 눈을 뜨고 못 살 듯 하다. 무언가 스스로 찾아 나서고 스스로 해결해야만 할 듯 한 그런 상황이다. 그저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지만 사람 살아가는 일이 내 뜻 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씁쓸하게만 다가온다.온갖 악행을 다 저질러 놓고 자신들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면서 아이들이나 그외 타인의 생명은 파리 목숨처럼 여겼던 이들,그런 이들이 웃고 큰소리 치는 세상이 되지 말아야 할텐데.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마음을 참 무겁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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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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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多의 섬 제주도에서 특히나 여자의 삶은 그야말로 '억척'이라 말할 수 있다. 거센 바람과 돌이 많은 땅을 일구고 바다에서 잠녀들에 의해 건져 올려지는 해산물까지 그녀들의 삶은 억척스럽지 않으면 섬에서 견디어내기 힘든,그것이 나라를 잃고 더불어 가난이 모두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악스럽게 현실과 맞써야 했을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남성 보다는 여성이 더 위기대처에 능수능란함이 드러난다. 식구들 입에 풀칠할 것을 억척스럽게 마련하는가 하면 거기에 자식들 교육까지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은 굶어도 새끼들은 먹고 입히고 교육시키며 그렇게 일으켜세웠다. 자신은 까막눈이어도 자식은 힘들게 벌어 대학까지 교육시키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이었다.그것이 섬 바다 특히나 태어나는 순간 나라를 잃었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잠녀였던 삶이라면 누구보다 더 억척이었을 것 같다.

 

여기 그런 잠녀의 역사가 있다.우도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나는 순간 나라를 잃었고 잠녀였으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일본 바다로 출가물질까지 가야했던 구월과 해금 그리고 그들의 다음세대인 켄과 미유까지 이어지는 100년의 역사,우리 근대사와 함께 한 이들의 가족사는 나라를 잃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미야케지마로 이주를 하여 삶이 '여행'이라 생각하며 좀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영과후진,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라고 했다. 나라 안팎으로 사정이 좋을 때도 다른 나라에 가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일제강점기이니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은 더없이 힘든 일이었을텐데 잠녀로 가정 경제도 책임지며 자식을 누구보다 잘 키워내려 했던 어머니들의 삶은 또 얼마나 핍박이었을까.어머니들의 옹이진 삶이 웅덩일르 채워 주었기에 켄에서 미유에게로 삶은 이어지고 시간은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또 그렇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갈 수 있었기도 하다.

 

디아스포라는 정착을 꿈꾸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삶에는 늘 결핍이라는 물이끼가 습진처럼 끼어 있다. 아무리 먹고살 만해도 그들의 가슴은 허기지고,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늘 춥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설명한들 알 수 있을까.아마도 우진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고수한 상잠수 구월과 해금,그녀들의 핍박하고 질곡의 삶을 그 다음세대인 켄(건일)은 외면하듯 한다. 어머니와 멀어지고 어머니가 제주의 잠녀이고 한국인이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세어 나오지 않아야만 자신이 일본사회에서 일본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고 그의 딸인 미유가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길이라 생각한다. 잠녀인 어머니 해금의 유복자로 태어나 호적이 없던 그에게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호적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생사도 모르는 한태주를 가슴에 묻고 일본인 선장 아들인 청각장애를 가진 후쿠오의 양아들로 만들어야 했던 질곡의 삶 또한 해금에게는 또 얼마나 큰 아픔이었을까.자신의 아버지가 전쟁의 피해자였고 그들 또한 전쟁의 피해자로 격랑의 삶을 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동반자였던 한태주와 어머니 구월을 잃고 기둥과 같았던 동생 기영이 북한으로 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시간을 그녀에게 던져 준 후 아들 건일만 바라보는 삶에서 아들의 외면은 그녀가 바다속에 잠수 들어갈 때 그녀의 몸을 가라않게 해 주는 납덩이만큼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그녀가 폐암으로 살 날이 줄어들고 나서야 이제서 자신의 어머니를 바로 보게 된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해금의 아버지인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였던 박상지와 결혼을 약속한 한태주와 동생 박기영은 그녀에게 '고이는 시간' 인 과거이다. 과거의 아픔을 간직하고 그녀는 날마다 납덩이로 자신을 가라앉혀 바다 밑에서 이 힘든 격랑의 시간을 살아가고 견디게 해 줄 생명줄과 같은 해산물을 건져 올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가난을 벗어나야 했고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고 멸시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해금의 시간을 이어준 것은 누구보다 뛰어난 물질 솜씨가 있어 현재를 견디어 굶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었지만 과거의 웅덩이인 옹이를 채우고 현재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시간은 '켄과 미유'이다. 흐르는 시간을 그녀에게 준 사람들,하지만 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미래로 나아가기 보다는 과거에 안주하여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를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받아 들이지 않으며 겉포장을 하고 일본인으로 허울뿐인 일본 이름 '켄' 으로 건일을 버리고 일본인 노릇을 하며 살고 있다. 그것이 온전한 삶일까? 켄은 그것이 자신이 살아갈 길이고 버티어 갈 길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딸인 미유에게도 쉬쉬하며 자신의 그리고 어머니 해금의 과거를 덮으려 한다. 하지만 역사도 시간도 흐른다. 어느 순간 덮어 있다고 저만큼 흘러가서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수면 위로 고개를 들고 나타나게 되어 있다. 자신의 과거의 문을 빗장을 걸고 숨죽이며 살아가려 했던 그에게 어머니의 폐암 판정은 걸어 잠갔던 빗장을 풀게 만들었다. 자신이 잘못 살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일본 땅에서 재일교포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란 것을 많이 접해서 알고 있지만 개인의 역사로 보면 분명 건일에게는 오점이고 오류였다. 어머니와 건일의 관계에 물꼬를 튼 것은 그의 딸 '미유'를 통해 화해와 용서 이해를 하게 된다.

 

"나도 조선 사람이고 네 아버지도 조선 사람이었어. 네가 일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있으나 일본인은 아니다. 그까짓 종이 쪼가리가 피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거야. 아무리 일본 이름을 가지고 산다 해도 네 피를 속일수는 없잖니. 그리고 네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순결한 피야.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잊지 마라."

 

제주 우도의 잠녀 구월에서 해금으로 그리고 건일과 미유에게까지의 역사는 제주에서 일본 미야케지마로 뿌리를 내리기까지 격랑의 가족사는 우리의 근대사 100년과 맞물려 역사와 가족사가 씨실과 날실로 잘 짜여진 한벌의 옷이 되어 미유에게까지 와서야 비로소 화해와 용서 속에 몸에 맞는 옷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 과거 식민지였고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굳건하게 자신의 국적을 버리지 않은 해금처럼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 '한류'로 일본 사회를 흔들어 놓고 있다. 건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프로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드라마를 보고 한국을 여행하고 이해 못 할 일이지만 딸 미유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할머니의 고향인 제주여행을 가고 좀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대화를 할 수 있고 해금이 뿌리를 내린 '아리수'를 좀더 한국식으로 가꾸어 자신의 터전으로 삶을 수 있는 것이다. 잠녀로 출가물질을 오던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는 한류가 일본사회를 뒤흔들어 놓아 우리것이 일본사회에 하나 둘 정착하고 있는 시대다. 분명 역사도 흐르고 시간도 흘렀다. 어느 누구의 편에서서 빗장을 걸고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시선으로 역사도 다시 보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고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시기이며 잘못된 것은 꼬집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과거와 미래를 아우룰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해금이 미야케지마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힘이란 정말 위대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활활 태워 자식을 건사하고 그 다음세대까지 아우르며 과거와 현재를 어머니의 힘으로 이어 놓는 가교 역할을 했는가 하면 자신의 과거 아픔을 꺼내 보기 보다는 미래에 투자를 하며 한국의 어머니상을 잘 보여주었다. 언젠가 나카사키의 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모를 곳이고 자신의 반려자인 한태주가 올지도 그리고 동생 박기영이 찾아 올 곳은 미야케지마 아리수다. 그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그렇기에 어머니 해금은 더욱 떠나지 못하고 그곳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제주의 우도와 비슷한 화산섬,우도의 검은 모래인 검멀레가 생각나고 우도 바다에서 물질해서 잡던 전복이며 미역이며 소라가 있고 자신의 어머니 구월이 일구던 터전이고 지신들을 버리지 않고 보듬어 준 바다가 이곳이다.늘 억척일것만 같던 어머니 해금이 폐암으로 쓰러지고 그런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는 아들 건일이 마음의 문을 열 때 얼마나 눈물이 흐르던지.나 또한 아버지를 폐암으로 보내드렸기에 그 순간이 기억나 마지막 부분은 울면서 읽게 되었다.그 순간은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고 더이상 가두어 둘 감정이 무엇이 있을까? 생과 사는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강하게 부정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모든 것은 시간 앞에 굴복하게 흐르게 마련이다. 역사도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지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디엔가 저장되어 있다. 잘못을 했다면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고 포용할 줄 아는,그것이 또한 미래의 역사와 만나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 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검은 모래가 있는 '바다'는 구월과 해금 그리고 건일과 미유까지 그들을 살아가게 해 준 생활터전이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주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도 하면서 그들에게 용서의 기회를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물질하던 미야케지마의 그 바다를 외면하던 건일이 딸 미유와 아내가 미야케지마와 바다를 좋아하며 그곳에 자주 가는 모습을 보며 그도 서서히 빗장을 풀게 된다.그를 살게 해 준 것은 다른 곳이 아닌 이 푸른 바다와 검은 모래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숨을 쉬고 켄의 정원을 가꾸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것도 이 바다고 그들의 삶을 지탱해 준 것도 바다며 바다는 어머니를 품어 주었듯이 모두를 품어주고 용서를 해주었다.우리에겐 정말 아픈 역사였지만 잠녀인 해금의 가족사를 보며 다시금 되짚어 본 역사는 격랑이면서 어쩌면 더 단단하게 담금질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또한 우리네 삶이고 현재의 삶이라면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이며 겸허히 살라하는 듯 하다.겸허한 삶으로 일관했던 해금의 삶이 대단하다. 어느 순간 자신의 삶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을텐데 늘 한결같이 일관한 삶이 현재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 아닐까 한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며 역사 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소설이다.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공존의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책을 읽다 문득 '귀화식물' 을 생각하게 되었다. 귀화식물들은 대부분 우리것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남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면 더 독한 생명력이 그들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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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천재적인
베네딕트 웰스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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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천재적인' 그러니까 천재가 아니라 천재적일뻔한 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천재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제목이 의문을 갖게 만든다.17살의 공부에는 영 자신이 없고 아버지도 안계셔 어머니와 트레일러촌에서 살아 가고 있는 프랜시스,현실은 그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만 같다.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느냐 아니면 사회에 발을 디뎌 자리를 잡느냐 흔들리기도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해 배경이 정말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프랜시스는 현실을 뚫고 나갈 '탈출구' 혹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우울증으로 툭하면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엄마를 대신해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친구가 공부에 열중할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도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아무런 것도 듣거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또한 기대할 곳이 없는 그에게 끈이라고는 이부아버지였던 라이언, 동생 니키의 아버지인 라이언 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도 소원한 관계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소설의 주인공과 흡사한,아니 자신의 자화상처럼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반영된 듯 했다.자신이 남들과 똑같은 방법인 대학을 나오거나 한 것이 아닌 의무교육을 마치고 소설가가 되기 위하여 자신은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했지만 그의 소설은 여러 곳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자신이 친구들보다 더 나은 길을 가리라 생각했지만 여기저기 퇴짜를 맞으니 그 자신이 '루저'가 된 느낌이 들 때 희소식이 날아 든 것이다. 그의 글이 신인 공모에 최종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비로소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저자가 루저를 탈출하는 길이 그의 글이 출판되는 것이라 한다면 소설에서 주인공이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정자의 주인공인 '천재적 아버지'라는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집에서 나와 힘든 시간을 버텨 오다가 아버지도 모르는 그를 낳은 후에 재혼을 하여 라이언과 사이에 니키를 두었지만 그와도 이혼하여 가족력과 같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고 있다.어머니를 찾아 정신병원을 찾았다가 우연하게 보게 된 여자,앤메이를 알게 되고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녀는 왜 정신병원에 오게 된 것일까.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좌절된 모든 꿈과 희망에 매달려 그걸 절대 놓아주지 않는 거야. 비명을 질러도 좋고 애원해도 좋아.하지만 너 자신을 더 이상 믿지 못할 때조차 그것들을 놓아버려서는 안 돼. 만약 놓아버리면 그땐 모든 것이 끝장이야,꼬마야. 그 시점이후로 너의 인생은 허깨비야. 네가 몇 십 년을 더 이 세상을 헤매고 다닌다 해도 내적으로는 이미 죽은 거와 다름없지......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이야."

 

자살기도를 한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서에서 그가 세상에 나오게 된 사실을 알게 된 프랜시스,천재적인 정자를 기증받아 낳은 시험관아기였다니. 그렇다면 '천재적인 지능'을 가진 아버지를 만나면 현실을 탈피할 수 있을까? 그에겐 공부는 잘하지만 소심한 친구 그루버가 있다. 그는 동부에서 서부로 그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여행에 그루버와 함께 하기로 한다.아니 거기에 앤메이까지 끼게 되어 그들은 뜻하지 않게 미국횡단 여행을 함께 하게 된다. 라이언이 자금을 대주어 횡단여행은 가능하게 되었다. 라이언은 그에겐 이부 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그에겐 역시나 생물학적이고 천재인 아버지를 꼭 찾아야만 한다. 그가 기댈 곳은 '아버지' 인 생물학적 아버지밖에 없다. 정말 천재적인 IQ를 가진 생물학적 아버지는 존재할지.

 

아직 자신들의 정체성에 흔들리고 있는 프랜시스와 앤메이 그리고 그루버는 미국 횡단여행을 통해 실상은 프랜시스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는 여행이지만 그들의 '정체성 찾기' 여행이다. 그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거나 아픔을 가지고 있다.앤메이는 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고 툭하면 자살을 기도하며 남자를 혐오한다.그루버는 늘 소심하게 지하방에 구겨져 있기를 좋아하고 친구도 없지만 프랜시스 아니면 이런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프랜시스도 어떻게든 이 현실을 탈피해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앤메이나 그루버도 자신을 바꾸던가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다. 그들은 횡단여행을 통해 조금씩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좌충우돌하면서 점점 더 서로를 알아가기도 하지만 몰랐던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안아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볼 수 있다.프랜시스와 앤메이는 투닥거리면서도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둘이 되기고 다시 또 하나가 되는 듯 하면서 서로의 마음의 문을 열어 보려고 한다. 과연 그들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가 되지,앤메이."

 

어떻게 보면 프랜시스는 현대적인 유전공학이 빚어낸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없이 유전적 뿌리만 가지고 계획적으로 태어난 아이들,하지만 현대 과학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듯 '천재'라고 생각한 유전공학적 생명체들은 모두가 천재적인 존재가 아니다. 모계의 유전적인 것도 있으니 보통의 아이도 있고 그보다 못한 지능을 가진 아이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것을 비난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비밀리에 벌어진 일이라해도 지속될 이유가 없다.그렇다면 어른들의 '농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의 미래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자신들은 원하지 않은 탄생? 그렇다고 천재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다면 사회에 어떻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프랜시스는 식물로 본다면 뿌리가 없이 땅에 꽂혀 자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뿌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뿌리를 찾기 위해 험난한 여행을 감행한 것인데 그 속에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아니 자신의 '거의 천재적인' '예지몽'을 바탕으로 한판 꿈에 걸어 보기로 한다.생물학적 아버지는 '꽝' 이었다면 예지몽은 그에게 '대박'을 안겨줄 것인지. 거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이제 모두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려 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다시 거머쥘 수 있을 것인지.결말은 독자의 몫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힘들여 고생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를 수 있다고 말하죠.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에서 노력보다는 행운과 불운이 종종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답니다.인정하긴 싫지만 인생은 단순한 우연에 훨씬 더 많이 좌우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소설과 유사한 영화를 오래전에 보았던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를 찾아 떠난 소년이 허름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아버지의 정체, 그가 기대했던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기억이란 확실하게 믿을 수 없지만 이 소설은 현대의 유전공학의 위험성에 경종을 고하듯 이런 소설을 쓴 듯 하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정말 억만장자에 천재적인 지능을 소유한 박사였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그는 그를 '아들'로 인정할 수 있을까? 정자만 나누어 주었을 뿐인 지구상에 여러 명인 아들이나 혹은 딸을 모두 자기 자식으로 인정해야 할까? 정자를 기증한 이의 신원이 밝혀지지도 않겠지만 이렇게 된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다. 여기저기서 '아버지' 하고 나타난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하나.우성의 DNA를 얻으려고 했다가 프랜시스의 경우처럼 돈이나 바라고 정자를 판 이런 오류인 열성 DNA가 나올 확률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그것을 과연 아버지라고 아니 가족이라는 관계로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어디까지가 가족의 의미인지.처음엔 별 재미없이 읽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인듯 해서 저자의 약력을 다시 읽으며 저장했다.우리의 출산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씁쓸하다. 한자녀시대에 부모의 마음은 내 아이가 천재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요즘 우리의 기대치가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런 욕심 보다는 진정한 마음으로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하는 따뜻한 가정을 바라며 스마트폰보다는 가족과 소중한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지.또한 더불어 부모에게 기대기 보다는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청춘으로 거듭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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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의 연인들 - 소설로 읽는 거의 모든 사랑의 마음
박수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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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다양한 '사랑의 마음'을 만날 수 있다.우리 인간사 사랑도 정말 다양하다. 쉽게 표현하는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는 참 많은 마음이 숨겨져 있음을 나이가 들면서 더 깨달아가고 있다. 사랑,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아니 소설 속에 어떤 사랑이 표현되었길래 '서가의 연인들'이란 멋진 제목으로 이루어졌나 작품들을 살펴 보았더니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밀란 쿤테라의 <히치하이킹 놀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사랑과 다른 악마들>, 미겔 데 우나무노의 <더도 덜도 아닌 딱 완전한 남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돈끼호떼>,윤대녕의 <달에서 나눈 얘기>,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강의 <채식주의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윤영수의 <귀가도3>다.

 

이중에서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4권인데 <백년동안의 고독>은 학창시절에 읽었으니 읽었다고도 볼 수 없다.<돈끼호떼>는 한번 더 읽어봐야지 했다가 아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지난해인가 읽었는데 그 때에도 힘들게 읽었던 작품이라 그런지 내용이 생각 저 언저리에서 가물거린다.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읽은지 두어해정도 지났는데 강렬함이 남았던 작품이었다. 그러니 모든 작품이 생소하다고 볼 수 있다.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늘 '읽어야지' 하면서 바라보는 책 중에 하나인데 선뜻 손이 안간다. 그런 작품과 작가가 있다.밀란 쿤데라가 그런데 그의 작품이 두개나 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작품들을 보고 알았다. 평론가의 글보다 작가의 글을 더 좋아한다. 난해하게 깨부수기 보다는 그저 감정에 진실되게 표현된 글을 더 좋아한다. 거기에 소설속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하여 논한다고 생각하니 처음부터 왜 가시밭길처럼 생각이 되는지.그래서 내가 읽었던 작품들부터 읽어 보았다. 글을 읽으며 겨우겨우 내용을 생각해 보았는데 사랑에 집중하지 않고 내용에 집중해서인가 저자와는 다른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죽음도 따라하는 경우가 있지만 유명한 이의 사랑은 우린 또 흉내내고 싶어한다. 모방하고 흉내내면서 우리도 그들처럼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누구의 포르포즈를 흉내내던가 소설,드라마 혹은 영화의 한 장면을 따라 하는 경우도 있다.그렇다고 그들처럼 사랑이 모두 이루어지거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멋진 사랑은 흉낸고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닮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 '사랑' 이라는 두 글자 속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내포하고 있다. 미움,증오,집착,광기,고독,외로움...사랑을 하면 행복할 것만 같지만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면 더 외롭고 더 고독하다. 그런가하면 우린 사랑을 하면 꼭 상대에게 사랑을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려고 한다 왜? 가슴에 저장해 둔 말을 끄집어 내듯 꼭 '사랑해' 라는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되듯 그 말이 나오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사랑을 재차 확인하면서 수많은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저자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애물단지' 라는 표현을 했다. 없으면 허하고 있으면 또 짐이 되는 그 사랑이 '사랑할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라는 말처럼 사랑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사람을 복잡하고 깊이 있게 만든다. 그러면서 사랑을 하면 또 하나 만나는 마음인 '두려움' 과 마주한다. 선택한 사랑이 옳바른 것인지 내 선택이 최선인지 두려워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게 만든다.

 

사랑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을 견디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에 값하지 못한다.

 

다른 어떤 사랑보다 무서운 사랑은 '집착' 인 듯 하다.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가 상대에게 집착하는 것도 무섭지만 저자는 옐리네크의 <피나오 치는 여자>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보여주는 '집착'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 집착은 어머니가 과거에서 비롯된 것을 딸에게 그리고 그 딸이 또 다음에로 이어지는 '집착'으로 정말 무섭게 표현된 듯 하다. 작품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소설의 전체보다는 '사랑'에 관한한 것을 압축해 놓아서일까 무척 읽고 싶으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머니와 딸은 흔히 애증의 관계라 하는데 그것이 너무 깊어도 문제이고 이렇게 집착으로 이어진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기 보다는 '올가미'와 같지 않을까.그런가하면 <사랑과 다른 악마들>에서 델라우라와 시에르바 마리아 사이의 사랑은 아니 델라우라의 일방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집착은 두사람을 모두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고 있다. '그러고는 끝없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매질하기 시작했다. 시에르바 마라이의 마지막 흔적을 오장육부에서 뿌리뽑을 때까지 결코 매질을 중단하지 않을 만큼의 증오심이었다.' 사랑이 도를 지나쳐 증오가 되고 말았고 그녀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안되지만 모자라도 안되고 과해도 안되고 중도를 지킨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다.

 

실제로 사랑의 감정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대로 열등감,질투,증오심,공포,가학 충동 등 아름답지 못한 정서들을 포함한다.존재하는 모든 빛은 그림자를 거느리듯이 사랑 또한 그러하다. 그림자 없는 물체는 생명이 아니듯,불편한 감정을 동반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변화게 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니 알게 되었다. 불같은 사랑도 시간이 흐려면 서서히 식어가듯 시간은 사랑의 그 색과 깊이를 점점 흐려 놓기도 하고 시간이 흐려면 사랑이라는 그 의미가 변한다는 것을.하지만 사랑의 그 순간에는 알지 못한다. 오르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불꽃만 보이지 그 뒤의 세상의 빛은 볼 수가 없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는 말처럼 사랑이 지난 자리엔 다시 사랑이 그 아픔을 덮어 주고 그런가하면 사랑의 그 형상이 바뀌어 다른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욕심을 쥐고 있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볼수가 없다. 사랑에도 내려놓음이 필요하고 배려 이해와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하지만 뒤돌아보면 사랑의 함정에 빠졌을 때가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은 기회를 만들어 얼른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행복한지 아니 그들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또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는지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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