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원정대
배상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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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프다' 라는 요즘 말이 있다. '웃기다'와 '슬프다'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웃프다' 라고 해야 하나. 대한민국의 청춘들이 왜 이렇게 비열하고 남루하고 찌질해져야 하는지.이야기는 IMF에서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신자유주의 광풍을 맞은 때에 웃픈 청춘들의 이야기다. 그야말로 돈 없고 빽 없고 인생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겪어내는 이야기는 웃기기 보다는 슬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 단어만 겨우 외워 자신들이 그 광풍의 직격탄을 맞아 일자리나 직업도 없이 밑바닥 삶을 산다는 것을 겨우 아는 이들,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미국에서 바람이 불었는데 태평야 건너 조그만 땅덩어리의 나라 그것도 조용하게 살고 있는 시골 구석의 그들에게 '서브프라인 모기지론' 이 날아와 가슴에 꽂힌 것일까.

 

저자의 책은 처음인데 냉철한 사회적 시선이 결코 웃고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안녕 할리>, 할리 하면 거친 남성의 힘을 대변하듯 가끔 타는 이들을 만나면 시선이 머무르기도 하는 거대한 오토바이.우리의 로망은 'S'에 담겨 있기라도 하듯 S대,S전자,S라인의 여자를 로망하던 나는 S전자도 아닌 그 아래 전자에서 S부장에게 사표를 과감하게 던지고 나왔다.할리 데이비슨과 그 복장으로 무언가 도전적인 모습으로 말이다.그러나 그가 사회에 나와 차린 '할리'라는 오토바이가게는 그의 생각만큼 흑자를 내주지 못하고 가게문을 닫게 되고 겨우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인 할리로 퀵배달을 해보지만 그 또한 퀵에는 어울리지 않는 덩치만 큰쓸모없는 오토바이다.자신과 같다. 왜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져야 했는지.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할리도 짝을 찾아 나가서 짝을 찾았건만 그의 도착할 마지막은.

 

<조공원정대>, 시골에서 그와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석과 칠성,그들은 나보다 더 떨어지는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직업이랍시고 가지고 있던 것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광풍으로 그 일자리마져 잃고 그들은 백수의 길로 접어 든다. 미선과 붙어 지내던 나는 미선이를 임신시키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미선과 결혼하여 애도 낳고 한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무언가 뜻 있는 일을 하고 싶다.자신이 원했던 일을 말이다. 그러다 그들이 좋아하는 '소녀시대'를 떠올리고 미선이 애지중지하는 루왁커피를 훔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그들,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에 나서지만 소녀시대가 떡하니 그들앞에 나타나줄리가 없다. 고향 선배의 옥탑방에 빌붙게 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서울에 널린 '토니,제리,티파니' 가 되어 서빙일을 하게 되지만 친구들은 고향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다. 나는 미선을 생각하고 내려가려던 찰나 그녀가 아이를 지웠단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단다. 이 서글픈 청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때문에 그의 인생도 그야말로 여기저기서 광풍을 맞아 온전하지 못하다. 여자에게 버림받든 한 웃픈 청춘이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토니,제리' 로 살아간다고 그들의 인생이 고속도로처럼 광속으로 발전하진 않을 것이다.

 

<어느 추운 날의 스쿠터>,배달의 생명은 '속도'다.그런데 요즘은 그 속도보다 더한 '쿠폰'이란 것이 있다. 다른 집과 차별화 하여 저 저렴하면서도 빠르게 배달해준다고 하면 고객들은 빛의 속도로 단골을 바꾼다. 나부터도 한집만 단골할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새로운 것을 맛보려 한번씩은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소비자의 입장에서 한가지의 혜택이라도 더 주어진다면 당연히 움직인다.사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움직인다. 번듯한 대학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마치기는 했지만 달리 일자리를 얻지 못하다 피자배달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과 경쟁을 할 업체가 바로 앞에 생겨 그들의 밥줄을 끊어 놓듯 고객을 다 뺏어간다. '삼십준에 OK'라면 우린 그보다 더 빨리 배달을 해야 한다. 사장은 다른 것으로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보다는 '속도전쟁'을 외친것이다. 그런데 빨리 가야하는데 민방위훈련에 걸렸다. 경찰은 바로 앞에 있고 시간은 흘러가고 어떻게 해야하나? 정말 난감한 상황에서 '법'을 어기는 이들이 있어 그도 그와 같은 일을 하려다 덜미를 잡혔 지구대에 가게 된 나,그런데 그곳엔 외국인 두 명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그들의 욕이 섞인 언어를 어느 정도 알아 듣는 나,그들도 피자배달을 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 까지 와서 밑바닥 삶을 살고 있다.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때문이다. 왜 우리는 모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때문에 일자리도 잃고 집도 잃고 거리에서 헤매야 한단 말인가.자신이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그들이 더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곳까지 와서 도둑질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헤드기어 맨> 아버지가 물려 주신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인 '헤드기어' 그것을 하나 남기고 엄마도 판자집과 같은 곳에서 헤드기어 때문에 돌아가시고 만다. 자신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헤드기어만 쓰면 슈퍼맨과 같은 힘이 넘쳐난다고 생각하는 그가 택한 직업은 밤업소 사장이 거래하는 일수 돈을 받아 내는 일, 고객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자해를 하듯 하며 돈을 토해내게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몸은 망가져 가고 아이까지 가진 아내와의 아파트 이사 약속은 멀어져만 간다. 그와 함께 일했던 이와 일을 함께 하며 '헤드기어'만 쓰면 힘이 솟는다는 비밀을 이야기 해주기도 하는 헤드기어맨은 더이상 권투선수처럼 머리를 벽에 박을 수가 없어 철거용역으로 일을 바꾸게 되고 자신이 이제 가해자가 되어 그들의 편에 서서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을 괴롭히는 일을 하게 되다 사장이 놓은 덫에 걸려 그도 철거지의 주민이 되고 피해자가 된다. 용감무쌍하게 총대를 매듯 앞에 서서 지금까지의 노하우로 철거용역인들을 막아내던 그,그리고 그와 함께 일했던 형과의 술 한잔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다.

 

저자는 IMF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신자유주의 광풍의 직격탄을 맞은 청춘들이 상실,이별,청년실업,빈곤 등을 그의 힘들었던 시기를 되새김질 하듯 웃프게 그려낸다. 처절하게 빈곤하고 바닥까지 몰려 더이상 내려갈 바닥도 없는 밑바닥의 삶을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개그적이게 풀어낸다. 얼마전 뉴스를 보니 청년실업이 50대 실업보다 더하다고 하는데 정말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날로 청춘들은 비싼 등록금 때문에 부모의 등에 빨대를 꼽기도 하고 자의가 아닌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사회에 나와 할 수 있는 일이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힘들다. 주변에서도 '취업' '취업'하니 나 또한 이제 딸들이 졸업을 하면 어떻게 될지 그 미래를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어떻게 되겠지가 아니라 너무도 주변에서 들려오고 보여지는 현실이 어두운 이야기가 많으니 늘 녀석들을 붙잡고 하는 이야기가 '취업'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부담을 안겨주듯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세대들은 우리의 노후를 생각해야할 시기에 청년실업을 걱정하고 그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있다.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던 것이 이제 내 앞에도 닥친 것이다.

 

청년실업은 비단 어느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다.사회적 문제이고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이며 청년들이 살아나야 사회도 발전할텐데 고급 인재들이 백수니 신용불량자니 하는 말로 포장되니 같은 세대끼리 모이면 하는 이야기가 노후도 걱정이지만 취업 또한 우선순위로 거론되는 문제이다. 그들이 자라면 이 사회를 짊어질 가장이 되는데 가장들이 흔들린다면 사회가 온전할까? 아버지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청춘실업으로 보았던 이야기를 보다 넓게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사회문제들이 문어발처럼 연결된다. 사회의 기둥이 되는 청춘들이 잘 되어야 하는데 왜 점점 어두운 면만 들리고 보게 되는지 그들 청춘에게도 밝은 미래가 꼭 오기를. 청춘의 대변인처럼 그가 더이상 슬픈 자화상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젠 밝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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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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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야만인' 왜 '나르시스 펠티에' 그가 흰둥이 야만인이 되어야 했을까? 이 이야기를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나르시스 펠티에라고 하는 인물이 실제 겪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그는 19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흰둥이 야만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흰둥이 야만인,백인이지만 그는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지 못했고 바람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며 옷이라고는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섬을 지나는 이들에게 발견되었다.발견될 당시에도 야만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섞여 있었으니 그가 섬에 남겨진 후 얼마나 그들과 환경에 잘 적응하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나르시스 펠티에' 그는 구둣방을 하는 아버지와 형과 누이를 둔 집안에서 구둣방은 형에게 물려질터이니 자신은 다른 일을 선택해야 해서 뱃일을 하게 된다. 사춘기 나이에 홀로 거친 뱃일에 뛰어 들게 되고 원양어선도 타게 되었나 보다.그런 그가 왜 야만인들이 사는 섬에 홀로 남겨지게 된 것일까?

 

소설은 나르시스 펠티에가 섬에 남겨지게 된 경위와 섬에서 그를 발견하여 물과 먹을 것을 주며 함께 살아가는 야만딘들과의 생활이 그려지는 한편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의 편지와 함께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그가 배를 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문명인이었던 문명생활을 했다. 뱃일을 하니 거친 그들의 삶을 잘 보여주듯 항구에 들러 여자들과도 밤시간을 보내는 일들이 표현되기도 하고 배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죽어 나가는,그야말로 거친 뱃사람으로의 일들과 함께 그가 발을 딛게 되는 섬에서는 물을 구하고 바로 떠나려 했는데 그만 혼자 남겨져 죽음도 삶도 아닌 시간 속에서 야만인과 같은 노파의 도움으로 근근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는 혼자 남겨졌기에 당연히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것이라 생각을 한다. 실제 펠티에는 사춘기 나이에 섬에 들어와 17년간을 로빈훗 아닌 로빈훗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현대판 로빈훗이 아니라 그야말로 야만인아니 원주민들과 어울려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듯 자연을 배우고 익히며 그곳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

 

문명인에서 야만인아니 자연의 삶으로 돌아간 그에게 그가 간직했던 '문명'이란 것은 겉옷처럼 다 벗어버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 듯 그렇게 그들의 삶을 익혀 나가야 했다. 나르시스의 시선에서 보는 '섬에서의 삶'은 그가 어떻게 원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살아갔고 어떻게 견디어 나갔는지 작가의 입장에서 그려 놓은 것인데 사실감 있게 다가온다.그런가 하면 시드니 해변에서 발견되어 지리학자 옥타브의 손에 넘겨져 그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한,부모 형제를 찾아 가기 위한 길과 자신의 뿌리를 찾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17년 전에 죽은 생명과 같은 남과 같은 존재,거기에 문명을 모두 잃어 버려 야만인과 같은 존재이니 가족에게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가족에 돌아간다는 것도 고향에 남겨진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상태가 된다. 지리학자 옥타브가 그에게 유아와 같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면서 그의 기억 저 편에 남아 있는 문명이 다시금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게 되지만 결코 '섬'에서 '야만인'들과의 삶은 밖으로 꺼내려 들지 않는 나르시스,그에게 섬에서의 삶은 무엇이고 왜 자신의 야만의 삶을 꺼내 놓지 않으려는 것인지.

 

문명인들은 야만인들을 만나면 문명으로 야만을 흡수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야만 야생성이 사라진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도 우리 가까이에서도 그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고 야생성을 잃은 이들은 야만도 아닌 문명도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혹시 나르시스는 그들의 그런 삶을 존중해서 지켜주려고 더 함구한 것일까? 자신의 과거가 고스란히 묻혀 있는 정글의 삶의 문을 잠금으로 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그곳을 그들만의 세계로 남겨 놓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이야기를 읽다보니 나르시스의 삶은 정말 누구도 두번 다시 겪지 못할 희한한 삶을 살았지만 정말 인간의 작은 실수에 의해 또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문명에서 야만으로 그리고 다시 문명으로. 인간이 얼마나 환경 적응에 탁월한 존재인지 몸소 그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명인으로 뱃사람으로 나르시스가 야만에서는 그야말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고양이 눈을 가지고 야만에 잘 적응한 반면에 다시 문명으로 나오게 되면서 다시 자신의 몸에 저장된 문명인의 삶을 하나 하나 끄집어 내는가 하면 문명 속에서 야만인의 삶을 발휘하여 누구보다 밝은 눈으로 정교한 도구를 만들어 식량을 확보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야만에서의 능력 또한 가진 두 문명의 함께 공존하는 전천후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나르시스에게서 야만에서의 삶을 끄집어 내고 싶었던 옥타브,그는 나르시스의 후견인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문명으로 다시 돌아 온 그에게서 야만의 시간을 끄집어 낸다는 것은 어떤 아픔을 들쑤시는 일과 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미지의 세계였던 부분들이 더 많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나르시스 또한 문명에서의 삶이 좀더 야생성을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옥타브가 아니었다면 그는 '구경거리' 로 삶이 마감되었을 수도 있다. 온 몸에 야만인의 문신을 하고 자신의 모국어도 잃어버린 그야말로 흰둥이 야만인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슈가 되었을 듯 하다. 그런가하면 나르시스와 함께 했던 뱃사람들 또한 그가 섬에 남겨지게 된 일을 은폐하려던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그가 문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문명과 야만의 세상은 그의 존재 하나로 모두 시끄럽게 되었지만 인류학적으로는 큰 족적을 남기지 않았을까.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나와 다른 반문화를 받아 들이고 인정하길 꺼려 하는 이들이 있다.선입견이나 오만함에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던가 나와 다른 것은 한낱 구경거리로 밖에 여기지 않는 이들 속에서 나르시스가 과연 문명으로 돌아 온 삶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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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권정생 소년소설, 개정판 창비아동문고 14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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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몽실'의 삶으로 옮겨지듯 해방과 함께 다시 한국전쟁의 그 중심에서 몽실의 삶은 참으로 고난의 연속으로 그려진다. 가난이 싫어 가난을 벗어나듯 몽실의 엄마는 몽실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간다. 배곯지 않게 하려고 택한 어머니의 선택, 갖은 학대와 험한 말도 모두 참아내며 속으로 삭이며 몽실의 입에 밥숟갈이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어머니,그런 어머니에게서 오래 견디지 못하고 고모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오지만 그 삶 또한 온전하지 못하다. 자신의 친 아버지인 정씨 아버지는 새로운 어머니를 맞이하게 되는데 착하지만 어머니에겐 깊은 병이 있다. 폐결핵, 병으로 인해 몽실이 동생을 낳고는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북촌댁,그가 낳은 딸 난남이를 전장에 간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냥젓을 물리듯 동네에서 쌀을 얻어 생쌀을 씹어 암죽을 끌여 먹이고 밥을 동냥해서 동생의 배를 곯지 않게 하지만 어른도 이겨내기 힘든 전시에서 어린것이 어미 젓도 얻어 먹지 못하며 온전히 크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래도 동생 먼저 먹여가며 피붙이를 향한 몽실의 정성은 난남이를 온전하게 자라게 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듯 몽실은 두 엄마와 두 아버지를 두게 된다. 친 아버지인 정씨와 어머니가 몽실을 배곯지 않게 하기 위해 재취로 들어간 김씨 아버지,그 사에에서 영득과 영순이 동생을 보게 된다. 두 동생도 살들하게 챙기며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의 자식이니 동생으로 받아 들여 정성을 다하지만 김씨 아버지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몽실 엄마를 대신하여 영득이와 영순이게게 새 엄마를 들이고 서울로 이사를 간다. 전쟁의 아픔처럼 두 엄마는 모두 심장병과 폐결핵으로 핏덩이와 같은 어린 자식들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전쟁이 지나고 어린 생명들은 스스로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며 살아야만 한다. 어른이라고 돌아 전장터에서 돌아 온 아버지는 병을 얻어 몽실이의 새로운 부양자가 되고 어린 몽실이게는 난남이도 힘든데 병자인 아버지까지 건사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데 부친 일이다. 힘들어도 그녀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어디에 못하고 이겨낸다. 난남이도 포기를 못하지만 아버지 또한 포기를 할 수가 없다. 고모도 모두 전쟁으로 잃었다. 부모를 잃거나 자식을 잃거나 정씨 아버지처럼 몸이 전쟁으로 인해 병을 얻거나 피폐해져 모두가 힘든 시기이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할 순간에 동네 할머니가 알려주신 부산에 있는 자선병원을 찾아 아버지를 낫게 하겠다고 모시고 가지만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어린 자식들만 남겨 놓고 아버지는 허망히 먼저 가시고 난남이와 몽실이만 남겨지게 되고 그들은 어디 한 곳 의지할곳도 먹을 것도 없다. 겨우 의지하게 된 곳에서 난남이는 어쩔 수 없이 양딸로 보내야 하고 몽실이는 힘들게 살아간다. 새엄마인 북촌댁이 남겨 놓은 핏줄인 난남이를 그녀가 어린 나이에도 엄마처럼 키웠기에 버려진 아이를 보고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생명을 그러안아 보지만 애석하게도 싸늘함으로 돌아오는 허망함.그런가하면 가난을 어찌할 수 없어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했던 어머니를 그녀는 이해하고 용서하는가 하면 어머니가 낳은 아이들을 자신의 동생으로 받아 들인다. 분명 그들도 어머니의 자식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반 핏줄이라도 핏줄을 핏줄이다. 난남이가 자신의 동생이듯이 말이다.

 

몽실 자신의 친 어머니가 있었지만 북촌댁을 어머니로 받아 들이고 그녀가 낳은 난남이를 핏줄인 동생으로 지극 정성을 하다며 키우듯 그녀는 모든 상황과 현재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 들이며 용서하고 인정한다. 전쟁이 낳은 아픔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지만 그것을 힘들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이겨내기 위하여 빈깡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더라고 자신이 마땅히 할 일이라 받아 들인다. 전쟁은 자신에게만 아픔을 준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가난과 고통과 아픔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살아 있기에 살아야만 한다. 새아버지네에 갔다가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는 절름발이가 된 몽실이지만 그래도 삶은 포기할 수 없다.절뚝이면서 동생들을 만나러 다니고 밥을 구걸하여 연명하고 그리고 소녀가장이 되어 의연하게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시대 '언니'들이 그랬듯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동생들은 번득하게 키우고 싶듯 동생의 입부터 챙기고 반듯하게 살기를 원하는 몽실언니,절름발이 인생이라 결혼도 포기하려다 자신처럼 곱추라는 아픔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일구고 동생들과 연락을 하며 동생들의 삶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그 시대의 언니 몽실언니의 삶은 굴절 많은 삶이지만 결코 남의 삶이 아닌 우리 바로 위의 부모님들이 살아 온 세월을 대변해 준다. 아무리 전쟁이야기를 해줘도 내가 겪지 않았으면 남의 이야기고 이해가 안가는데 한편의 소설은 저자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서일까 아픔을 함께 겪어 내는 것처럼 생생함으로 다가온다.새롭게 이철수님의 그림이 들어가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고 어느 세대이건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저자의 소설은 다시 읽어도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몽실이에겐 아버지가 둘인것이 어머니가 둘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배다른 동생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잘 살아가는 것이,생을 이어가는 문제이다.그런 그녀가 가정을 꾸리고 동생들과 마지막까지 잘 연결되며 부모아닌 부모노릇까지 하는 먼 훗날의 이야기까지 이어나간 것은 '희망'을 그리고 싶은 저자의 맘이었을 것이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분명 먼훗날에는 부유하진 않지만 그래도 정이 오가는 삶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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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경전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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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고구려>를 읽다 보면 역사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고구려> 뿐만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 역사와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역사란 점점 축소되고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듯 해서 안타깝다. <고구려>를 5권 까지 읽다보니 그의 소설들을 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그 전부터 그의 소설을 많이 갖추어 놓고 있지만 몇 권 읽어보지 않아 한 권 한 권 읽어보려 노력하고 있다.내가 읽은 책으로는 <천년의 금서>와 <1026>과 <고구려> 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읽었지만 오래 되어 이 책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 소설은 '숫자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역사여행과도 같다. 숫자에 숨겨진 비밀 '13의 비밀' 숫자 13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불길한 예감이다. 그러나 진짜 역사에 숨겨진 '13'의 의미도 불길한 것일까? 숫자의 비밀을 찾아 떠날 인물로 그가 내세운 인물은 어린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역사학을 공부하고 인터넷에 밝은 '인서'라는 젊은 남자와 '숫자 13'의 숨겨진 비밀에 관심을 가지는 또 한 사람인 '환희'라는 여자를 내세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나딘'이라는 '수비학자' 가 함께 어울려 숫자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 떠나다 인류를 구원할 '최후의 경전'을 찾게 되는 내용이다.

 

세계는 슈퍼부자 1%에 의해 움직여지듯 '13인'의 비밀결사대와 같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의식을 갖듯 하면서 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한다. 과연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들은 유대인이며 프리메이슨이라면. 이 내용을 터트리면 세계가 흔들할텐데 그와 관계된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던가 기사는 기사화되지도 못하고 바로 사라져 버린다. 왜? 그들이 '자본'으로 세계를 구원하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막아야 한다. 우연하게 인터넷을 접속했다가 '13의 비밀'을 접하게 되었던 인서는 나딘을 만나게 되고 환희까지 그의 모험에 가담하게 된다. 나딘은 13인의 힘을 저지하려고 한다. 숫자 13의 비밀에 들어가기 전에 풀어야 할 문제는 '매미가 왜 땅 속에서 17년을 애벌레로 사는가?' 이다. 왜 일까?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만나는 통도사의 고승이며 그가 알려주는 백두산에 있다는 선인을 찾아 셋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시베리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야 하는 '최후의 경전'은 어디에 있을까?

 

돈으로 세상을 지배하지만,결국 그들은 신의 가르침을 좇는다? 그들은 매우 특이한 집단이군요.

 

이런저런 숫자의 비밀을 찾아 가다가 수메르인이 동양인 그중에서 동이라 불렸던 '한국'인이라 보고 우리 스스로 축소시킨 단군 그 이전의 역사를 아니 누구보다 뛰어났던 우리 역사 속의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저자는 '전세계에 있는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는데, 왜 우리의 고대사는 실종되어버렸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라는 말로 대신한다. 고대 분명 누구보다 뛰어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상이 있는데 왜 실종되어 버렸을까? 13의 비밀을 찾아 미국의 역사가 아닌 좁히고 좁히다보니 '우리 역사' 로 흘러 들어오게 된다. 우리 역사에 대한 저자의 자존감이 대단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가 세계의 중심처럼 여겨진다.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화가 뛰어나지만 우리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무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쎄......우리는 경전에서 주로 레무리아인의 흔적을 찾으려 했는데, 그도 그 부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소. 터너 박사와 나는 레무리아에 대한 연구로는 단연 으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소. 한데 괴인의 수준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있는 듯했소.

 

소설은 약간 억지도 보이지만 그래도 통쾌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숫자에 대입해서 풀어낸 것이 대단하다고 해야하나. 13의 비밀,유대인,프리메이슨,사라진 왕국,성경,바둑,격암유록,천부경 등 연관지어가는 것이 정말 경이롭기까지 하다. 저자가 이토록 역사를 가지고 능청스럽게 엮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역사에 능통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그의 소설들을 보면 역사를 그의 맘대로 주무르며 살아 숨쉬듯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그렇다고 역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번쯤 '생각'을 해보게 한다는 것이다.정말 우리나라엔 '고인돌'이 그렇게 많은데 왜 고대사가 실종했을까? 왜곡된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왜곡된 그대로 우리 스스로 축소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가 역사소설을 쓰는 이유도 역사에 좀더 관심을 갖기 바라는 이유일 것이다.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각도로 재해석 하여 좀더 폭넓은 역사와 만나야 할텐데 우리가 점점 축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그의 생각처럼 수메르인이 동양인이라면 그들이 교착어를 쓴다면 좁히고 좁히다 보면 다름 아인 동이족 우리의 역사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안에 갇힌 역사가 아니가 세계와 어우러져 어쩌면 '최후의 경전'처럼 자본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조금은 결말이 약하기는 해도 발상이 정말 참신하고 대단하다.

 

저는 당장 인생을 확 바꿔놓는 디지털이나 돈도 중요하지만,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찾는 일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집단으로 프리메이슨이 나와서 조금 식상한 맛도 있었지만 카발라와 짝이 되는 경전,성경에 열쇠가 있는 경전으로 우리의 <천부경>으로 귀결시킨 것을 보면 서양의 자본보다 동양의 인간중심 철학이 더 우세하지 않나 하는 더불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 기분은 좋다. 숫자의 비밀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잊혀진 역사나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었다. 그의 <고구려>도 읽다보면 새삼스러운데 고대사는 또 어떠할까? 무지함에서 우리것을 더 지켜내지 못하고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역사에만 밝아서도 아닌 동 서양의 역사에 대한 깊은 독서가 있기에 이런 소설이 탄생했을 것이다. 세계지도 속에서는 작은 나라지만 분명 우리는 누구보다 뛰어난 역사와 문화를 가디고 있던 민족임에 틀림이 없고 좀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일시무시일,하나가 시작했지만 시작된 하나는 없다. 일종무종일' 검색만 하면 답을 찾아주듯 하는 컴퓨터가 아무리 발달하여 인터넷이 답이 아닌 역사와 문화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소설로 좋은 말을 덤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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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득이네 창비아동문고 118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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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에서 한국전쟁 후 삼십년까지의 세월,그 속을 살아 온 '점득와 점례'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금의 아이들은 한국전쟁도 먼 과거속의 이야기로 먹을 것이 없어 고생했다고 하면 '라면먹지' 라고 한다는 전쟁, 같은 동포가 서로 총뿌리를 겨누여야 했고 어제는 인민군편이 되었다고 오늘은 다시 군인편이 되었다가 아니면 형제간이라도 서로 이념이 나뉘어 가슴에 총을 겨우어야 했던 한많은 세월을 어린 점득이와 점례가 어떻게 살아오게 되었지 하는 생생함 그 속으로 들어가 본다.

 

'권정생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동화와 그의 '글'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강아지똥별'이란 책을 읽고나니 그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다. 받아 놓고 한참 읽을까 말까 망설였던 시간,왜 그랬을까? 친정아버지 살아생전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녹음기를 틀어 놓듯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정말 잊어 버리지도 않고 아버지는 똑같은 이야기를 어려서도 성장해서도 늘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으면 잊지도 않고 그렇게 늘 똑같은 가래떡처럼 뽑아내셨을까? 아버지는 할머니가 젊은 나이게 돌아가셔서 핏덩이와 같은 작은 아버지를 고모와 키우느라 고생하셨는데 할아버지마져 오래 사시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그런중에 한국전쟁 후 그 힘든 고난이 시간을 이겨내야 했으니 한의 세월이셨을 것이다.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시간,여기 그런 시간이 고스란히 점득이와 점례의 삶은 통해 그려진다.내 아버지가 자주 이야기 하셨던 그 고난의 시간들이 말이다.

 

만주에서 아버지와 함께 힘들게 고향으로 향하기 위하여 추위를 무릅쓰고 도강을 하는 중에 아버지는 소련군의 총에 맞아 강물에 떠내려 가시고 어머니와 점득이와 점례만 살아 남게 되고 그렇게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외갓댁으로 먼저 가게 된다.그곳에서 반갑게 맞아 주는 외삼촌네,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다. 병이 나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점득이 어머니는 그렇게 외삼촌인 오빠네와 함께 그곳에 뿌리를 내고 살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부족함 속에서 함께 살기도 그렇고 다른 곳에 집을 얻어 살게 되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한국전쟁은 아들도 어머니도 가족들을 하나 둘 빼앗아 가버린다. 인민군이 누구를 위해 내려 온 것인지 아직 이념의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죽어나가는 것은 불쌍한 백성들,그렇게 가족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가족이 아닌 이들은 잃은 가족을 챙기듯 서로를 챙기며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게 된다.

 

어머니도 잃고 외숙모 판순이 할머니도 잃고 모두를 잃고 점득이의 눈도 잃었다. 그렇게 점례와 점득이 그리고 판순이는 가족처럼 부산으로 내려가 고아원으로 흘러들게 되지만 고아원 원장의 비리에 더이상 있고싶지 않아 그곳을 탈출한다.그만큼 고아는 넘치고 넘쳐났다. 고향을 향하여 가려던 점례와 점득이와 판순이와 기만이 하지만 아직 그들은 어리다. 피난민들 사이에서 가족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자리를 잡게 되고 힘들게 그들도 돈을 벌어야 살 수 있어 돈을 벌러 나가지만 정말 힘들다. 그러다 점득이는 자신이 가진 '노래실력'으로 돈을 벌게 되고 전쟁이 눈은 가져갔지만 노래를 하면 행복하고 모든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단단하게 묶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꼭 고향에 가고 싶다. 북으로 피했던 외삼촌과 그의 아들과 딸이 혹시나 고향집에 돌아왔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혹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하여 판순이와 헤어져 고향으로 향한다.

 

하지만 완전한 '하나'가 아니라 작은 국토의 중간 허리에 삼판선이 그어지고 그들의 고향은 북이라 갈 수가 없다. 그 앞에서 좌절하듯 했지만 점득이는 노래를 불러 누나를 살릴 수 있음을 알고 노래를 불러 돈을 모아 누나에게 약도 사주고 먹을 것도 사주게 된다. 다시 판순이를 만나러 가보지만 판순이는 처음 있던 국밥집에서 옮겼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에 그들은 어긋나게 되고 그들에겐 삼십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만다.판순은 남편은 없지만 똑똑하고 든든한 아들이 있어 서울로 옮겨와 어엿한 국밥집을 하며 제법 단단하게 살고 있다. 그녀도 늘 점득이와 점례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처럼 점득이와 같다고 느껴지는 이들을 만났지만 그들의 운명은 또 어긋나고 만다. 이산가족들이 그러할 것이다.평생 가족을 기다리고 모두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점득이와 점례네도 판순이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죽음 앞에서야 겨우 내려 놓을 수 있는 이산가족의 아픔과 상실감,통일이 되는 그 날에야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까.

 

저자 또한 일본에서 전쟁을 겪었고 한국전쟁의 아픔으로 몸과 마음이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그래서였을까 생생하다. 자신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는 듯 하다.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서 힘들게 살았던 이야기며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녹아 있어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들에게 실감나는 이야기가 될 듯 하다. 전쟁의 아픔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아픔으로 살아야 했던 점득이네,그 아픔을 누가 구원해주나.작가의 말에서처럼 값싼 동정심보다는 '통일'이라는 것이 단어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야 모두가 다 구원을 받을텐데 그날이 언제가 될까? <몽실언니>와 <초가집이 있던 마을> 과 함께 '6 25 소년소설 3부작'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라는 말처럼 슬프고 절망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굳건하게 일어서 이겨내고 살아왔다. 그들이 일구어낸 것은 '희망'이고 언젠가는 하나가 될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로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을 것이다. 점례가 결혼도 하지 않고 동생 점득이 옆에서 눈이 되고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그 날까지 통일이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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