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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뭉크의 유명한 그림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집인 <킬리만자로의 눈>에 있는 단편들을 읽으며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담겨 있는 그림 <절규>' 그렇다면 그 그림을 소설로 쓴 것은 어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뭉크는 어릴적 죽은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 대신에 따랐던 한 살 연상의 누이가 사춘기 나이에 죽음으로 인해 '불안' 에 쌓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 주의에 감도는 '죽음'이라는 빛, 그 빛은 도망간다고 하여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친구들과 산책중에 자신 혼자만 느낀 감정, 그것이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 머콤버의...' 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 하다.
이 단편소설집을 읽기 전에 헤밍웨이의 다른 단편집을 읽었었다. <우리들의 시대에>라는 책으로 그 책에 실린 단편들에도 '닉 애덤스' 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그린 이야기가 있다. 물론 '닉 애덤스'는 '헤밍웨이' 자신이며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그려 놓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집에서 '닉'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삶과 모습을 담아 놓은 이야기들,어쩌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헤밍웨이'그를 기억하는 작품으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던가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라는 장편이다. 단편으로 기억하기엔 그의 장편의 힘이 컸다. 장편에 가려져 있던 단편들을 읽으며 그의 삶은 들여다보듯 그의 삶을 조망해 본다. 어느 날 문든 친구들과 산책을 하다가 자신 혼자서 느끼는 감정 '절규'를 경험하듯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두려움'이나 '죽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눈에는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킬리만자로에 쌓인 눈을 눈이라 하지 않고 하얀 코끼리에 비유를 했다. 하지만 킬리만자로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사냥여행을 떠난 '해리'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한순간에 그의 삶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볍게 여겼던 다리의 부상이 점점 그의 삶을 파고 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오른쪽 다리에 괴저가 시작된 이후로 그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고,통증과 함께 공포도 사라졌다. 이제 그가 느끼는 것이라곤 이게 끝이라는 커다란 피로와 분노뿐이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것에 그는 호기심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이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이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써야 할 글이 많이 저장되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꺼내보지 못하고 단순하게 여긴 상처로 인해 무릎을 끓어야만 한다. 죽음이란 가까이가면 갈수록 더욱 살고 싶다는 '절규'를 하게 만든다.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가 없어서 공포와 맞써 싸우는 해리,하지만 어느 한수간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그는 모든것을 놓아 버리듯 킬리만자로의 눈이 덮힌 꼭대기를 향할 수 있었다. 받아 들이면 편안해지지만 그렇지 못하면 고통에 절규할 뿐이다.
해리가 써내려고 했던 머리 속에 담겨 있던 소설과 함께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곳에 사냥여행을 오기 전까지는 그가 그렇게 '죽음'과 맞써 싸우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그리고 무언가 깨닫는 순간에 '죽음'이 닥쳐 온다고 흔히들 이야기 한다. 평생 철이 들지 않아야 오래 산다고 한 이야기처럼 그가 고통과 분노를 놓아 버리는 순간 그에게 찾아 온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그림자, 삶을 희망으로 붙잡을 그 무엇이 없다고 생각한 해리에겐 그저 자신 안에서 아직 산고를 거치지 않은 소설을 쏟아 내는 것,죽기 전에 빛을 보게 만들고 싶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쏟아 내야만 그가 이르려는 그 세계에 도달할 것만 같다. 뭉크가 산책중에 순간에 마주한 '절규'가 그려지는 장면이다. 모든 것으로부터,자신이 간단한 상처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을 귀를 닫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절규하면 절규할수록 통증은 더하고 냄새는 더욱 지독할 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해리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절규했다면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 머콤버는 순간 '두려움'과 맞써게 된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머콤비 아내와 사냥군 윌슨과 함께 사파리로 사자사냥을 간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다. 왜 안그렇겠는가 지금까지 그에겐 그런 모습이 없었는데.하지만 사냥꾼 윌슨에게 지고 싶지 않고 자신의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머콤비는 사자를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그들 모두와 함게 사자사냥에 나서게 된다. 두려운자는 한 발의 총탄으로 저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발을 쏘게 되어 있다. 사냥꾼은 어느 부의를 맞추어야 단명하게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옆에서 알려 주어도 들어오지 않는다.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떻게 하여 사자를 맞추게 되고 어설피 맞은 총알에 사자는 숲으로 들어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가 자신을 찾아 나선 인간들에게 마지막 힘을 다하듯 달려든다. 그 순간에 '두려움'을 느낀 머콤버는 뒤로 도망치고 그런 모습을 차에서 지켜보는 아내, 사자는 결국에 윌슨에 총에 맞아 죽게 되고 머콤버는 두려움에 떨게 되고 밤에는 아내마져 그의 곁을 떠나 윌슨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어진 물소사냥에서 머콤버는 전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두려움을 극복한 듯 물소들의 죽음에 '행복과 희열'을 느끼는 그,그리고 달라진 그를 알아보는 아내. 세마리의 물소는 그들의 손에 죽는다.그런데 첫번째 정말 멋지고 큰 물소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사자처럼 총알을 몸에 박고 숲으로 도망쳐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 그 물소를 찾아 마지막 숨을 끊어 놓기 위하여 나섰던 그들,너무 분기탱천한 달여오는 물소에게 한방을 먹이려던 그를 물소가 그를 덮칠까봐 아내는 물소를 쏜다는 것이 그의 머리를 쏘고 만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에 그는 '죽음'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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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콤버의 삶에서는 사파리사냥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세계도 보여준다. 사파리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사자사냥도 했다.그리고 물에서 힘이 센 '물소사냥'도 했다. 더이상 그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모든 부를 가졌고 이쁜 아내도 가졌으며 사파에서 최강자들을 사냥했다는 자만감,자신 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했더니 남자라는 강위에 여자라는 강이 있다는 것을 그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행복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에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머콤비'의 아이러니한 삶을 행복이라고 해야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한다. 정말 뭉크의 '절규'가 또 한번 그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밖에서 늘 큰소리를 친가.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정말 그럴까? 자신들이 또한 안에서 '여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남자 위에는 분명히 여자가 존재한다. 그것이 누군가 동등한 저울에 올려 놓으면 둘의 관계는 동등해지겠지만 한쪽에서 기울게 한다면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난다.
'이제 머콤버는 마음에 들었다. 더럽게 이상한 친구야. 어쩌면 이제 오쟁이 지는 것도 끝나게 된 것인지 몰랐다.그래, 그건 더럽게 좋은 일이지. 더럽게 좋은 일이야. 이놈은 아마 평생 두려워하며 살았을 거야. 뭐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하지만 이제는 끝났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에 죽음은 나의 것이 되었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삶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런가 하면 메뚜기를 미늘에 꿰어 송어를 낚아 올리듯 삶의 결과물은 어떤 것이 끌려 올지 모르는 것이다. 미끼만 꿰어 먹고 도망가려는지 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것이 올라올 수도 있고 작은 것일까 하는 순간에 끓어 올릴 수도 없이 큰 송어가 올라올 수도 있다.그렇다고 그모든 것을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은 노인처럼 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밥으로 모든 것을 주고 뼈만 앙상한 청새치의 흔적만,기억만 안고 살아갈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삶의 정답일까.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채우기 보다는 '비우기'를 먼저 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여 짧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모든 것을 다 가질수는 없다. 내가 던진 낚시바늘에 무엇이 걸려들지 모르는 것이 삶이고 인생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