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집 나간 책 - 오염된 세상에 맞서는 독서 생존기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4월
평점 :
1. 뱃속까지 보여주는 화끈한 솔직함
서평집은 인지도로 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책을 내도 괜찮은 수준에 이른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나보다 인지도가 높은 분이 숱하게 있다. 하지만 그분들은 너무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하고, 어쩌다 읽어도 서평 같은 걸 잘 쓰지 않는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적당히 인지도도 있으면서 서평도 봐줄 만큼은 써야 한다는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 없는 탓에 내가 서평집을 내게 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2014년 이후로 방송 출연을 거의 못하고 있어 인지도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인물과사상사가 서둘러 서평집을 만들게 된 이유였다. (8쪽)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다. 서평을 쓰는 이유가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라거나, 금전적 이익 때문(5쪽)이라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실제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멋진 모습, 근사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싶은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그 욕망을 인정하고, 자신 안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을, 골몰히 생각해보면 나름 어려운 이 일을, 저자는 참 쉽게 한다. 솔직하게 말한다. 이런 이유로 서평집을 냈노라고 말한다. 그의 이런 솔직함은 저자의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급호감’을, 이미 그의 솔직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의 솔직함이 독자를 무장해제 시킴과 동시에 저자와 독자의 암묵적 거리를 단숨에 단축시킨다.
2. 이런 생각 또 없습니다, 독특한 시선
『유령퇴장』은 작년에 내가 읽었던 책 중 Best 3에 속하는 책이고, 필립 로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70대의 노인이 자신보다 40살이 어린 30대의 유부녀에게 끌린다는 이야기‘ 너머의 다채로운 빅재미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야기가 가장 매력적이다.
내가 매료된 부분은 주커먼과 에이미의 가상대화인데, 에이미의 어린 시절을 묻는 이야기, 그녀가 읽었던 책 이야기, 주커먼이 권하는 책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관심 가는 여자, 유혹하고 싶은 여자에게 독서 이력을 묻는 남자라니. 이런 남자야말로 진짜 ‘뇌색남’이다.
저자의 독특한 시선은 이 지점에서 발휘되는데,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가 재선에 성공한 2004년의 상황을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과 연결지어 설명한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나도 그 생각을 했었다. (은근슬쩍 묻어가기^^)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하다는, 불길한 방송 사고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그 다음날 아침까지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박근혜’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절망. 그 상황을 저자는 이렇게 풀어 쓴다.
발기도 안 되는 노인이 왜 여자에게 집적대는 걸까? 어쩌면 이 장면은 상징적인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발기불능은 영영 집권이 불가능해진 우리나라 좌파를, 노인이 집적대는 유부녀는 이미 새누리당과 결혼한 우리나라 유권자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전히 집적대는 노인에게 유부녀는 그의 발기불능을 상기해준다. ... 책에서 노인은 결국 뉴욕을 떠난 원래 있던 산속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는데, 이는 저자가 한국 좌파들에게 “정치판을 떠나라”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27쪽)
부시가 당선되었을 때 에이미의 절망과 박근혜가 당선되었을 때 2030세대들의 절망은 나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었지만, 발기불능 = 한국좌파, 유부녀 = 새누리당과 결혼한 우리나라 유권자, 의 해석은 정말 창의적이다.
저자만의 독특한 해석, 특별한 독법은 『유령퇴장』을 식탁 위에 두고 짬짬히 읽어가는 내게 이 책의 재독, 삼독을 간곡히 권유한다.
3. 유쾌상쾌 거침없는 매서운 비판 정신
아래 인용은 존 퀘이조의 『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에 대한 글이다.
사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스노가 바라던 안전한 물 공급은 결국 이루어졌고, 이제 웬만한 나라에서는 콜레라 환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정원이 바라는 것처럼 유우성이 결국 간첩이라고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국정원에도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어 국정원을 망치는 더러운 물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결국 스노의 의견을 받아들인 빅토리아 여왕과 달리 우리나라 대통령은 국정원이 깨끗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다. 괜히 간첩으로 몰리지 않게 우리가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다. (87쪽)
정부의 잘못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불만의 토로이다. 누구라도 정색을 하고 물어볼라치면, 은근슬쩍 꼬리 내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부에 대한 비판, 정책에 대한 비판,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글’로 풀어내고 있다. 일전에 고소를 당했을 때,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고, 산더미 같은 자료를 준비하셨던 지혜로운 아내를 두셨으니 망정이지(42쪽), 읽을 때마다 속 시원하고 통쾌한 건 사실이지만,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다. 고소장 한 장에 벌벌 떨면서 “앞으로 글을 좀 부드럽게 써야겠다”라고 자체 검열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도(45쪽), 날선 비판을 멈추지 않는 그의 용기가 새삼 존경스럽다.
저번주 토요일에는 교보문고 명강의 BIG 10에 다녀왔다. 마태우스님의 책은 무척 재미있지만, 강의는 5배 정도 더 재미있었다. 초등학생들이 적지 않게 참석했는데, 이 아이들은 마태우스님의 책을 다 읽었는지, 퀴즈란 퀴즈는 죄다 아이들이 맞혀 좋은 책선물을 많이 받아갔다. 기술이 부족해 마태우스님의 멋진 모습을 잘 포착하지 못 해 아쉬울 뿐이다. 사인을 받을 때, ‘단발머리’라고 써달라고 부탁드렸더니, 그 바쁜 와중에도 단발머리는 아니시잖아요, 라며 깨알개그를 선사하셨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네팔 어린이 돕기 팔찌는 아롱이 선물로 재탄생했다.
간만에 즐거운 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