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으면서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는데, 글로 남겨두지 않고 생각만 했던 것인지, 글을 썼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8장 <대륙의 제국주의: 범민족 운동>에는 '공통 기원'의 감상적인 표출인 민족주의(432쪽)을 통해 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국민 공동체'를 구성해가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민족 공동체라는 이상을 통해 내부를 통일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렌트는 범민족 운동이 선민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 주장에서 출발한 점에 주목했다.(435쪽)

범민족 운동의 종족주의와 한 민족의 '신적인 기원'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한 개인의 가치가 우연히 독일인 또는 러시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라는 것이다.(439쪽) 국가는 단지 부차적인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민족'이라는 범민족 운동의 주장에 제일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국가도, 제도도 없는 민족이었고, 그들 역시 '신적인 기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체화했던 것이다.

인종주의자들의 유대인 증오는 신이 선택한 민족, 신의 섭리로 성공을 보장받은 민족이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우려에서 나왔다. 거기에는 결국 모든 외양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에서 마지막 승자로 등장할 것이라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보증을 받았다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민족에 대한 의지박약한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451쪽)

여기에서 밑줄을 그어야 하는 지점은 ‘신의 섭리로 성공을 보장받은 민족이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우려’다. 주체는 누구인가? 그러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인종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신의 섭리로 성공을 보장받은 민족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민족이 유대인보다 우월하고, 유대인들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심 불안했다. 신의 섭리로 성공을 보장받은 민족이 자신들이 아니라 혹시 유대인인 건 아닐까. 쉽사리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놀라운 지점은 인종주의자들의 우려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자기 확신이다.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확신하고, 신화를 통해 이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며, 신의 아들이고, 신의 아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그 자체로 신으로 여겨지고, 일본 역시 신들의 결혼으로 만들어진 나라이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나름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친가는 하늘에 속한 집안(아버지 환웅)이지만 외가는 땅에 속했다(엄마는 웅녀).

유대인 역시 자신들이 신에 의해 '선택 받은' 민족임을 강조한다. 여기는 유별난 지점이 아니다. 특이점은 유대인의 그 말을, 그들의 이웃이, 다른 민족들이 믿었다는 데 있다. 유대인들이 '특별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 주장하는 유대인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증된 사실/진리/미래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주변 민족들의 증오심은 더더욱 강화되었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 책은 반유대주의가 어떻게 죽은 이들을 숭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효과로 살아 있는 동시대 유대인의 시민권까지 박탈하는가에 대한 래디컬한 문제 제기다. 책은 지적으로 풍요로우면서도 신랄하고 유려하다. 융합적 방식으로 공부한다면, 서양사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해설, 정희진, 353쪽)

정희진 선생님의 해설을 숙고하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꺼낸 책을 다른 책들과 함께 쌓아두고, 큰아이에게 내게 주려고 했던 간식을 미리 달라 하니, 김치냉장고인게 너무 티나는데 꼭 거기에 책을 쌓아두고 찍어야겠냐고 묻는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느니. 국밥집에서 스피노자 읽어주는 것이 이 동네의 국룰이거늘, 김치냉장고 위의 아렌트는 사소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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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8-14 13:13   좋아요 0 | URL
찬찬히 읽어요. 막 뛰어가지 말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8-14 13:31   좋아요 1 | URL
넘어지면 일으켜줘요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14 13:39   좋아요 0 | URL
일단 넘어지면 안 되고요. 넘어지면 일으켜 드릴게요. 무릎도 털어드리고, 물티슈로 닦아드리고, 후시딘 발라드리고, 밴드 붙여 드릴게요 ㅋㅋㅋㅋㅋ

수이 2024-08-14 13:45   좋아요 0 | URL
사랑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14 14:06   좋아요 0 | URL
우웅~~ (뽀뽀!) 키보드라 이모티콘 안 나옴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14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렇게 답했을거라는 걸 예상한 쟝님을 칭찬합니다. 모든 종교가 배타적이지는 않잖아요.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지독하게 배타적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것과 더불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인내와 마늘의 화신이며, 웅녀의 후손이여! 같이 해봅시다 ㅋㅋㅋ

수이 2024-08-14 11:58   좋아요 2 | URL
복사하기가 잘못 눌렸는데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8-14 12:2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모든 걸 다아는 그녀는 인터넷 사용에 무지합니다 ㅋㅋㅋㅋ 제 웃음지뢰 ㅋㅋㅋ

단발머리 2024-08-14 12:29   좋아요 1 | URL
나 이거 뭐임요 ㅋㅋㅋㅋㅋㅋㅋ 뭥미? ㅋㅋㅋㅋ 현재 상황 차 안에서 무선 키보드로 댓글 달다가 생긴 불상사입니다.
이건 다 이상기온 때문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8-14 13:33   좋아요 1 | URL
이해하겠습니다 덥습니다 난리입니다 난리 헥헥, 모든 거 잘 알지만 아이클라우드 연동에 게으른 그녀가 잼나 꼭 읽어라 라고 말한 책 빌리러 도서관 왔는데 사람들 왜 이리 많아? 대체? 도서관에? 😱

단발머리 2024-08-14 13:40   좋아요 0 | URL
다 거기로 피신간 거에요. 작년에는 말이지요. 도서관에 사람들 집중되는 시간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니깐 10시부터 1시.. 1시 지나면 좀 자리 빠지고, 3시부터는 좀 한가하단 말이에요. 올해는 ㅋㅋㅋㅋㅋ 5시 50분까지 만차에요. 무더위 쉼터에요, 도서관이 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8-14 13:46   좋아요 1 | URL
바쁘다 바빠 우리 단발님, 아이스바닐라라떼 한잔 드시구요, 댓글 천천히 달아요 ㅋㅋ

페넬로페 2024-08-14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책 위에 올려진 kitkat 초콜릿이 눈에 들어 옵니다.
어제 도서관에서 들은 강의에서 저 초콜릿이 영국의 유명한 테이트 재단 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자본주의의 발전이 핍박받은 유대인을 가해자로 만든 건지는 않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단발머리 2024-08-14 13:58   좋아요 1 | URL
아.. 그랬군요. 오늘 처음 알았어요, 저는요.
<유대인의 역사>를 읽으면서 저도 그 생각을 했었는데요.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 돈을 자신의 불안한 지위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더라구요. 페넬로페님이 말씀해주신 부분을 저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독서괭 2024-08-14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치냉장고 위의 아렌트 쯤이야!!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14 13:36   좋아요 2 | URL
주부 포스 날리고 아렌트 읽기 ㅋㅋㅋㅋㅋㅋㅋㅋ 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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