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괜찮다. 그래서 쓸 수 있다. 쓸 수 있게 됐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핸드폰 저장공간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계속 맘 편히 핸드폰을 혹사시키다가 안 듣는 음악앱(해리포터와 '프렌즈' 음성파일) 1.5. 기가를 지우러 들어갔을 때, 핸드폰이 정지해 버렸다. 그랬던 것이다.

10년 치 정도의 기록이 모두 사라졌는데, 제일 안타까운 건 역시 사진이었고. 그렇게 나는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영영.

제일 먼저 찾아온 건 부정의 시간이었다. 나는 이 모든 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 일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바로 다음 날 용감하게도 애플 서비스 센터를 찾았던 것이고, 도착한지 5분 만에 '공장 초기화'를 시행해 버렸던 것이다. 만 오천 원을 결제하고 내게 돌아온 핸드폰은 완벽하게 모든 데이터가 지워진 새 핸드폰이었고, 그날부터, 바로 그날부터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다. 부정과 후회, 절망과 한탄.

밤마다 심장을 부여잡던 어느 날에는 이런 일기를 썼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나는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내 행복은 얼마나 완전했을 것인가.

내 마음은 얼마나 풍족했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나댔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까불었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나분댔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자랑했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얼마나 오두방정 깨방정...

나는 얼마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마침 그날은 방학 하는 날. 그렇게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 해야 하는 일들을 다 마무리하고, 김부장님이 출근하지 않은 날. 그 좋은 날. 나는 소중한 걸 잃어버리고, 그걸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걸 매 순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가 잃어버린 건 뭘까. 10년간의 사진. 10년간의 기억. 10년간의 추억. 더 어린 아들, 더 어린 딸, 더 젊은 나. 하지만, 사진이 있어도, 지금 사진이 여기에, 내 핸드폰 안에 있다해도 이미 그것들은 다 잃어버린 것들이다. 지나간 것들이고, 흩어질 것들이다. 이미, 이미 나는 모든 걸 다 잃어버렸다.

온 세상에 끝이 온 것처럼, 나라 잃은 백성 마냥 괴로워하는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가지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어차피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어. 네가 그리워하는 건 사진을 찍었을 때의 장소, 사진을 찍었을 때의 시간이잖아. 그걸 돌이킬 방법은 없어. 그니깐, 그 시간을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 사진이라도 갖고 있어야 돼. 난 그 사진이 필요해.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많이 아픈것도 아니고, 누가 다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는건 좀 과하지 않아? 고통에도 위계가 있는 거야? 나는 잃어버렸다고! 나는 통째로 잃어버린 거라고!

정말 힘들었던 건 이게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건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나의 성향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그런 깨달음, 그런 인식이 나를 제일 아프게 했다. 이제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앞으로 저장 잘해 놓으면 되지, 라는 남편의 말이 조금도 위로가 안 되었던 이유다. 128기가를 저장할 수 있는 공간에 127.8기가가 저장된 상태로, 원활한 카톡을 위한 300메가의 저장공간을 확보해달라는 메시지를 받은게 한달 전이데. 그것도 아주 여러 번, 그런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용량이 큰 비디오파일 50여 개를 핸드폰에서 노트북으로 옮겨 놓은 게 내가 했던 유일한 행동이었다. 무슨 일이든 미룰 수 있는 때까지 끝까지 미루고, 항상 간당간당, 분초를 다투며 뛰어다니는 일상을 이어가는 나의 게으름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니, 내 사진을 날려 버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라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왜 아이폰을 썼나. 나는 왜 클라우드를 연동해 놓지 않았나. 나는, 나는 왜. 왜왜왜.

헬게이트 열린 후 일주일이 지나고, 큰애가 브런치 잘하는 집에 먹고 싶은 메뉴가 있다고 해서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내게 '공장 초기화'를 선사했던 건물이 보였다. 아, 나의 사진이여. 나의 공장 초기화여. 그날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일주일 동안 핸드폰을 만지지도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비로소 책사진을 찍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밥도 잘 안 먹고, 책도 안 읽고,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잠만 자던 생활을 드디어 청산하고, 이제 책상에 앉을 수 있게 됐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 『테일러 스위프트』를 다 읽었고,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전체주의의 기원』, 『유대인의 역사』, 『Bad Luck and Trouble』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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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8-06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클라우드는요!? 했더니... 아이클라우드............ 너마저...-_-;;
이 글을 읽는 내내 공쟝쟝이 생각났읍니다... 네 그렇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06 12:27   좋아요 2 | URL
쟝님이 절 많이 위로해 주었고요. 잘 애도하고 잘 보내주라 했습니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님은 떠났지만 나는 아직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질척질척)

잠자냥 2024-08-06 12:35   좋아요 1 | URL
공쟝초기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06 12:38   좋아요 1 | URL
그게 그렇게 큰 일인지 알지 못한 나의 무지여....................

다락방 2024-08-06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기운 좀 차리셨나요. 지금도 순간순간 과거로 잃어버린 시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추억으로 쌓이고 있습니다. 잘 쌓아갑시다, 단발머리 님. 다시 차곡차곡요.

단발머리 2024-08-06 15:27   좋아요 0 | URL
네, 찬찬히 찬찬히 돌아오고 있습니다. 가끔, 잃어버린 풍경이, 놓쳐버린 순간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모두모두 백업 잘 받아두시길 바래요, 여러분 ㅠㅠㅠㅠㅠㅠㅠㅠ 다락방님은 잘 관리하고 계신듯 해서 다행입니다. 오래오래 잘 보관하소서!

독서괭 2024-08-06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오.... 단발님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그 안타까움, 아쉬움, 후회, 자책, 슬픔과 고통과 절망 ㅜㅜㅜㅜ 저도 귀찮은 일은 미루는 편이라 이 글을 보니 불안해지는군요. 저의 아이폰.. 저도 계속 용량이 모자라다는 알림이 오면 일부 지우고 옮기면서 버티다가 결국 폰을 바꿔서 해결했습니다만. 클라우드 연동도 안 해 놨고요.. 최근에는 애들 사진은 아예 몇달치씩 인화해서 앨범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단발님이 앞으로 쌓아가실 추억들은 더 멋질 테니까.... (토닥토닥)

단발머리 2024-08-06 15:32   좋아요 1 | URL
안타까움과 후회와 자책의 시간이 다 지나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아졌습니다. 히잉 ㅠㅠㅠㅠㅠㅠㅠ
위로의 말씀 감사해요, 독서괭님!
클라우드 연동 미리 다 해놓으시고요. 아이들 사진 인화 기립박수 올려드립니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동영상은 네이버박스나 구글포토를 이용하시면ㅠㅠㅠㅠㅠㅠㅠ 저같은 불상사를 막으실 수 있겠습니다.
제가 비교적 최근 자신은 가족들에게 많이 뿌려놓았더라구요. 일테면 2년 전에 작은애랑 도서관 왔을 때 풍경이나 롯데리아에서 모의고사 채점하는 모습 같은 거요. 그래서 뿌려놓은 거 돌려받으며 위안 삼고 있습니다. 제 셀카는 왜케 많이 뿌렸던가요. 울다가 더 울어버릴 일입니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은빛 2024-08-07 0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 어릴 때 사진들은 너무 아까울 것 같아요. 지금 제게는 아이들 어릴때 사진들이 너무 소중한데, 왜 그때는 더 많이 더 자주 사진들을 찍지 않았나 하고 후회하게 되더라구요. 특히 작은 아이가 큰 아이에 비해 자신의 사진은 왜 별로 없냐고 물었을 때 더욱더.

저는 아이폰을 한번도 안 써봤고, 늘 안드로이드만 썼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폰으로 찍었거나 폰에 저장해뒀던 사진들은 구글이 다 모아놓고 있었더라구요. 처음 안드로이드 폰을 썼던 시절부터. 나중에 알고 좀 많이 놀랐습니다.

단발머리 2024-08-08 08:40   좋아요 0 | URL
너무너무너무 아까운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어렸을 때 왜 더 자주 사진을 찍지 않았나 그 마음도 백분 이해가구요. 전 비디오 찍어둔 것도 얼마 없어서 더 그런 맘입니다.

이번 일로 주위 사람들 ‘자료 관리‘ 현황을 조사했는데, 구글 포토 이용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놀랄 일이기도 하고.... 저같은 이런 경우라면 고마워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완전 자동으로 업로드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불편한 마음이구요.

수이 2024-08-07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새로운 삶으로.

단발머리 2024-08-08 08:37   좋아요 0 | URL
네, 그럴게요. 찬찬히 나가볼게요. 고맙습니다, 수이님 : )

psyche 2024-08-10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앜!! 이렇게 된 거였군요. 공장 초기화....십년 치 기록이 다 날라가다니 읽는 제 가슴이 다 아프네요. ㅜㅜ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되겠죠?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 고쳐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ㅜㅜ

단발머리 2024-08-10 22:38   좋아요 0 | URL
프시케님 가슴이 아프시다는 말씀이....... 제게 너무 위로가 됩니다. 저는 실제로 가슴이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다시 알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걸, 가슴의 통증으로 확인했습니다. 몽땅 잃어버린 사진들을 다시 핸드폰에 채워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괴롭기는 하지만, 제 몫인 것입니다ㅠㅠㅠㅠ 일단 외양간을 다시 지어야합니다.

다시 한 번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프시케님! 자주자주 오셔서 저를 좀 ㅋㅋㅋㅋㅋㅋ 위로해 주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