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크리스틴 델피의 노동에 대한 가설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0-서문, 9)

 

1) 가부장제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 체계다.

2) 이 체계는 경제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3) 이 기반은 가정 내 생산이라는 생산 양식이다.

 


가부장제는 경제적 기반, 즉 가정 내 생산이라는 생산 양식을 통해 여성을 종속시킨다. 물리적 폭력과 종교, 이념, 문화라는 정치적, 사회적 기제뿐 아니라, ‘경제적인 체계를 활용해 여성 종속을 강화하고 유지한다.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정 내 생산 활동을 무급노동으로 간주하고, 그 노동의 수행을 여성의 본성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특히, 육아와 양육을 여성 고유의 특성과 합치, 고정시킴으로써, 가정 내 생산 활동과 가사 노동, 돌봄 노동을 여성의 일혹은 여성만의 일로 만든 것이 주효했다.

 


사회를 사유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인 마르크스적 개념 가운데 저자가 주목한 개념은 계급이다. (0-서문, 69)

 


계급 개념은 나아가 사회적 지배를 설명의 핵심에 놓는다. 우리는 사회적 지배의 동기(경제적 착취)에 관해 논의하거나, 근본적인 도식을 바꿀 필요 없이 이러한 동기에 반대하거나 이를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이분법적 개념이며 따라서 한계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급 개념이 광범위하고, 위계적이고, 마찬가지로 이분법적인 분류에, 특히 (여성/남성, 성인/아동, 백인/비백인 등)과 같이 주어진 사회의 내부에 위치한 계층화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볼 수 있다(「계층화 연구 속의 여성 참조). (0-서문, 69)

 


, 저자는 여성 억압의 주된 요인으로 자본주의하에서 계량화되지 않고 있는 가정 내 부불노동을 지목한 것과 동시에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함을 주장하였다.

 



 













여성들은 집 밖에서 임금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계속해서 집에서 "무보수로" 가사 노동을 도맡아 했다. 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지 오직 경제적인 견지로만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모든 여성은 똑같이 여성이라는 계급, 즉 제1 (남자라는 성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제2 (여자라는) 성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사회에서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 할당된다고 결론지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51)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성 계급에 따른 차별 때문이라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유물론적 페미니스트)의 주장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조를 밝히는 데 있어서 설득력 있는 이론을 다수 제공했다. 여성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하나의 요소로만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나라에서는 인종과 성별이, 어떤 환경에서는 계급과 성별이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델피의 문장으로 읽으면 이렇다.

 


















프랑스에서 25세 이상 여성의 10퍼센트 미만만이 독신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보면, 모든 여성이 일생의 어떤 시점에는 결혼할 확률이 매우 높고, 따라서 모든 여성이 특정한 생산 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생산 관계에 확실하게 영향을 받는 집단으로서 여성들은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계급에 속하도록 운명 지어진 범주로서 보자면 여성들은 하나의 카스트를 이룬다. 결혼 관계에 깃든 노동 전유와 착취는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 공통의 억압이다. (1-주적, 5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합동 작전이 가장 극명한 장소는 가정이다. 가정 내 여성의 노동은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무급 노동으로 간주되었는데, 가부장제의 원칙에 따라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는 차남이나 막내의 경우 가정으로부터 독립 혹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임금을 보존 받는 경우가 있는 데 반해,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무급 노동으로 남아있다. 여성의 무급 노동이 급여로 전환되는 건, 여성이 그 노동을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수행했을 때다. 그런 경우, 가정 이외의 장소에서 생산활동을 담당한 여성에게는 약간의 경제적 독립이 주어지지만, 가정 내 육아를 비롯한 기타 가사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여성을 기다리는 건, 이중, 삼중의 노동이다. (1-주적, 43)

 


 

여성의 지위, 특히 가족 내 여성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의 위치가 노예/하인과 다름없음을, 읽고 확인하는 일이 가히 유쾌하지는 않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자각은 여전히 뼈아프고 한결같이 곤란하다.

 

계산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에, 나는 태업으로 임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용기를 주었다.



 










안타깝도다펜을 들려고 시도했던


여성은 주제넘은 종으로 여겨지고,


그 과오는 결코 속죄될 수 없다네.


그들은 말하지우리가 성과 그 역할을 잘못 알고 있다고.


자녀 양육유행의상사교,


이것이 우리가 선망해야 할 소양이라고.


글을 읽고 쓰고생각하거나 질문하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이며우리의 미를 가리고,


꽃다운 우리를 정복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반면 노예처럼 집안 살림을 돌보는 무미건조한 일에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능력을 써야 한다고. (<자기만의 방>, 109-110)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내 에너지를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집중해서 쓰려고 했다. 아이들은 낮에는 엄마가 뭐하고, 자기들이 돌아오는 시간에 청소기를 돌리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할 시간이 없었다. 자기들도 노느라 바빴으니까. 하지만, 이것조차 한가한 말이라는 걸, 나도 안다. 아내폭력의 가해자들이 피해자 폭행의 이유로 꼽는 첫 번째 이유가 집안일을 잘 못해서이다. 집안일을 대충이라도 아니, 흉내라도 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집안일은 끝나지 않는다. 집안일을 등한시하고, 반찬을 사다 먹고, 집청소를 대충 해도 모른 체하는 남자랑 살았기 때문에, 나의 태업은 가능했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냥, 그때, 그 순간에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읽는다. 이성애의 작동과 결혼제도의 합작으로 탄생한 4인 핵가족의 아내이자 엄마인, 내가 읽는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스위트홈 찬가를 제법 크게 불렀던, 내가 읽는다. 다시 일하게 되어, 늦은 출근과 이른 퇴근에도 집에 오면 1시간을 바닥에 붙어있다가 간신히 일어나 빨래 돌리고 청소기 돌리는, 내가 읽는다. 손쉬운 비판이나 감정 상하게 하는 편 가르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속에 감춰진 억압과 모순을 밝혀내기 위해서 읽는다. ‘페미니즘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기혼 여성들에게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유연한 단어로 페미니즘을 설명하고 싶어서 읽는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읽는다. 내가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사랑 속에 후회와 원망이 전부였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읽는다. 내 딸을 위해서 읽는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내가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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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4-12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진 후기 감사합니다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4-04-12 22:49   좋아요 2 | URL
읽어주시고 귀한 댓글 달아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달자님!!

청아 2024-04-12 2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자기만의 방>읽었는데 저 문장 신선하게 느껴져요ㅋㅋㅋㅋ
여전히 읽는 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단발머리님의 글! 이 시간에 잠이 확 깹니다^^

단발머리 2024-04-13 14:36   좋아요 1 | URL
네네 ㅋㅋㅋㅋ 저도 읽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바야흐로 울프를 다시 읽을 시간이 돌아왔나봐요.
잠이 확 깨셨다가 편안한 밤 되셨는지요~
여유롭고 즐거운 주말 되시길요^^

은오 2024-04-13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은 진짜... 멋있는 분...♥️

단발머리 2024-04-13 16:28   좋아요 1 | URL
은오님은 진짜… 고마운 분… 💕

책읽는나무 2024-04-16 10: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크리스틴 델피의 ‘서문‘편 읽으면서 무급 가사노동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여성주의 책을 읽는 이유가 뭘까? 늘 생각하곤 하거든요. 오늘 읽다가 문득 그래도 나는 내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반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단발 님이 나열하신 이유들에 제가 더 용기를 얻게 되네요. 전 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읽는다!!! 가 되겠군요.ㅋㅋㅋ

단발머리 2024-04-17 11:13   좋아요 1 | URL
사실 전업주부들이 가정에서 해내는 그 수많은 일들은 돈으로,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으니까요. 그게 우리 일이라서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읽는다!! 너무 멋져요. 책나무님은 살림고수셔서 더 많은 임금을 받으셔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우리 그 돈을 모아모아, 알라딘에서 또 책을 사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책탑 똭! 책장 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