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중에, 오래오래, 그러니까 책을 읽고 난 후 며칠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머리 속에 잔상을 남기는 단편들이 있는데, 단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강력한 인상을 남겼던 단편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단편 중 하나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의 <블러드 차일드>이다.
다른 단편들은 <윌리엄 트레버>의 <페기 미한의 죽음>, <화성 연대기>의 <2005년 9월, 화성인>, 그리고 <혁명하는 여자들>의 <늑대여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을 읽고 있다. 같이 읽고 있는 책은 ‘새해니까 자기계발서’의 <Grit>과 ‘책에서 사랑 찾는 여인들과 함께라면’의 <라캉, 사랑, 바디우>이다. 두 권 읽다 보면 자꾸 눈이 감긴다. 자간이 좁아서 눈이 금방 피곤해진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눈보다 뇌가 더 피곤한 듯 하다. 눈과 뇌가 동시에 피곤할 때, 옥타비아 버틀러를 읽는다.
이런 인터뷰집이라면 모두 다 그렇겠지만, 질문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나는 질문의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인 경우, 그 질문이 좋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대답하는 이(여기서는 옥타비아 버틀러)에게 ‘내가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당신의 작품들을 주의 깊게 읽었다’는 느낌을 전하는 질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시간을 이렇게나 많이 ‘소모’하는 일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책은 여러 인터뷰를 엮어 낸 것이라, 질문자가 여러 명이고, 질문자의 질문 수준과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흑인 작가라서 혹은 여성 작가라서 SF 분야에 진입하는 일이 더 어렵다고 느끼셨나요?’와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다른 이들도 이미 많이 했음 직한 질문도, 훨씬 더 정교하게, 세련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질문의 질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탈하고 당당하다. 독야청청하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 즉 의도와 해석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다른 <말> 시리즈에 비교하자면 두 배에 가까운 두께인데도 신나게(?) 읽어나갈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분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그 문단을 옮겨보면 이렇다.
케넌 : … 분명히 SF계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논쟁이 이어질 텐데요. 작가님은 그런 논쟁에 휩쓸릴 때가 있나요?
버틀러 : 사실 별로 안 그래요. 그런 논쟁은 1970년대에 크게 타올랐고 지금은 과거에 결론이 난 일 취급을 받죠. 누가 특별히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도 않지만, 누군가가 그런다면 그건 그 사람 일인 거예요…………. 예전에 한번은 제가 일요일 이른 아침 텔레비전 쇼에 출연했는데요, 진행자가 흑인 여성이었고 저 말고도 다른 흑인 여성 작가가 둘 있었어요. 시인 하나, 극작가 하나, 그리고 저였죠. 그런데 진행자가 거의 마지막 질문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다른 두 사람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페미니즘은 백인용이라 여긴다고 했어요. 저는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도 흑인이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러니 난 확실히 페미니스트일 거라고 느낀다고 했어요. (87쪽)
흑인 시인, 흑인 극작가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백인 여성들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흑인 여성들이 왜 이것(페미니즘)은 우리(흑인 여성을 비롯한 유색 인종 여성들)와 상관이 없다고 여겼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이, 인종, 계급, 민족의 측면에서 단일한 집단이 될 수 없는 여성들 간의 연대에 대해 생각한다. 이선균의 사망과 관련된 문제로 영페미와 30분간 대판 싸운, 결국에는 무참하게 패배해 버린, 베트남 쌀국수와 팟타이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던 기혼 여성이 생각한다. 내 자리는 어디인가.
여러 부분에 밑줄을 그었지만, 특히 마음에 공명한 부분은 여기다. 작가들,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해주는 버틀러의 조언 중 일부다.
소설은 종류를 가리지 말고 읽으세요. 학교에서는 고전을 읽으라고 시킬 테고, 그것도 좋아요. 유용하죠. 훌륭한 작품이 많고, 글에도 도움을 줄 거예요. 하지만 또 그런 작품 다수는 낡은 명작이라서 지금 당신이 쓰는 글에 꼭 도움을 준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러니 현재의 베스트셀러를 읽으세요. 새로운 관심사를 갖도록 만들어줄지 모를 책을 읽으세요. (190쪽)
베스트셀러를 읽으세요.
버틀러의 말이다. 제 말이 아니어라.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제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책을 썼죠. 진부한 자기계발서들을요. ‘당하기 전에 먼저 쳐라‘ 같은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1970년대 책은 말고요. <크게 생각할수록 크게 이룬다>* 같은 책을 말하는 거예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진부한 말들이지만, 그런 책들이 제게는 필요했어요. 제 가족이나 친구 중에는 아무도 줄 수 없었던 격려를 대신 해줬어요. 계속 버틸 수 있게 도와줬죠. 전 마치 독실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듯이 그런 책을 찾아 읽곤 했어요. 덕분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죠. - P23
버틀러는 인종과 성별을 활용해 인간의 고독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권력과 초월에 대한 욕망을ㅡ그리고 공동체와 가족,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이런 고독에 다리를 놓고 싶어 하는 갈망을 탐구한다. - P39
작가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작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뭐든 타자기의 먹이로 쓸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끔찍한 일이었다 해도 나중에 써먹을 수가 있죠. - P41
SF는 제가 읽기 좋아하는 장르이고, 제 생각에 작가는 즐겨읽는 것에 대해 써야 해요. 안 그러면 스스로나 다른 모두를 지겹게 만들겠죠. 제가 SF를 쓰기 시작한 건 열두 살 때였어요. 이미 SF를 읽고 있긴 했지만, 이전까지 쓸 생각은 안 했죠. - P43
케넌 : 마지막으로 물어봐야겠는데요. 젊은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조언이 있을까요?
버틀러 : 몇 가지 없어요.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읽으라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책 읽기는싫어하는지 놀라울 정도예요.
케넌 : 아멘!!!!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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