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자고로... 읽을 때, 생각이 떠오를 때 바로바로 정리해 두는 게 좋다. 나도 아는데. 그대로 잘 안되고. 새로운 책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오고, 작은 생각 덩어리는 어제의 눈송이처럼 여기저기 떠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어제의 눈송이는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파묻힌 여성>과 <세계 그 자체> 페이퍼는 그대로 남겨져.
무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이 책을 읽다가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내 로맨스 소설 인생의 시작점인 <The Love Hypothesis> (<사랑의 가설>)을 떠올렸는데, 상황은 이랬다.
애덤과 올리브는 장소, 시간, 감정의 3박자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특정한 시점에 도달했다. 진한 키스 후 섹스 직전의 상황인데, 자꾸 머뭇거리는 올리브의 기색을 눈치채고 애덤이 말한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사귀는 사이 아니어서 섹스가 좀 그렇다면, 안 해도 돼. 이런 ‘당연한’ 멘트를 날리는 남자가 신사라고 대접받는 사회. 애덤은 신사다. 올리브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 대사가 참 길고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나한테는 성적 끌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나는 널 정말 좋아하고, 또 너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너랑.... (이하 생략)
그렇다면 성적 '끌림’은 특정인을 향한 혹은 특정인에 의해 유발된 꼴림이다. 그 파트너와 성적으로 엮이고 싶은 욕망이다. 표적이 있는 리비도. 음식에 비유하면 이렇다. 사람은 허기를 느끼면서도 먹고 싶은 특정한 음식이 없을 수 있다. 생리적 허기가 성적 충동과 비슷하고, 성적 끌림이 특정요리를 향한 갈망과 가깝다. 사람마다 성적 충동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하는 성적 끌림의 정도도 다르다. (44쪽)
경험하는 성적 끌림의 정도는 다르다. 당연히 어떤 대상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냐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테고.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건 ‘왜 모든 사람이 성적 끌림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는냐’는 것이다. 당연히 떠오르는 필립 로스. 남녀 사이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섹스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말을 통해 그렇게 말하는 필립 로스를 5초간 생각한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비판한다.
강제적 섹슈얼리티의 연장인 섹스 신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빤하다. 섹스는 어디에나 있고, 노래 가사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지나 립스틱이 발린 채 햄버거를 먹는 여자들의 입과 그 목을 타고 흐르는 육즙을 클로즈업한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거기에 푹 절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섹스가 더 특별하고 더 중요하며,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보다도 더 강력한 짜릿함과 완벽한 쾌락을 선사한다”는 믿음이다. 섹스하지 않는 건 쾌락도, 혹은 쾌락을 즐길 능력도 없다는 뜻이다. (71쪽)
그럴까. 섹스는 정말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더 강렬한 짜릿함과 완벽한 쾌락을 주는 행위일까. 그 쾌락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인간이 누리는 쾌락의 속성상, 동일한 상대와의 동일한 행위가 쾌락의 강도를 보장해 주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면 그건 모르는 상대와의 미지의 경험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평생 가장 우선시되고 추구되어야만 하는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일까.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성적 끌림은 육체적 이유로 특정인과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성적 끌림은 순간적이고,내 뜻과 무관할 수 있다. 의식의 고양, 신체의 각성에 정신의 바람이 합쳐진 것이다. 내 유성애자 친구들은 방금 만난 사람에게, 같이 있어도 즐겁지 않은 사람에게,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멋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낀다고 한다. - P42
‘강제적 섹슈얼리티’라는 말이 친숙하게 들리는 건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의 강제적 이성애compulsory het-erosexuality 개념을 빌린 말이기 때문이다. 리치는 1980년 에세이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Compulsory Heterosexual-ity and Lesbian Existence」에서 이성애란 그저 어쩌다 대다수의 지향이 된 성적 지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성애는 학습되고 조건화되고 강화된 정치적 제도다. - P68
성 정치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 페미니즘 담론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활동가 캐서린 매키넌Catha-rine MacKinnon과 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이 훗날 성 부정 페미니즘으로 알려질 운동을 이끌었다. 이성애 섹스는 불균형한 권력 역학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가 없기에 섹스에 대해 진정한 동의를 이루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본 논지다. 이들의 구조 분석은 가부장제 아래의 섹스란 어쩔 수 없이 손상되며 자유롭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런 전통에서 등장한 활동 단체는 포르노그래피와 사도마조히즘, 성 노동에 반대했고 이 모두를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고 상처 입히는 착취의 방식으로 봤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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