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쪽까지 읽고 쓴다.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친구가 말하길, 나는 관계의 갈등 상항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스타일, 이라고 했다. 맞는 것 같다. 나는 그런 편이다. 인간관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해야만 하는 일을 후딱 해놓은 뒤, 편안히 쉬는 스타일이 아니고, 미루고, 미루고,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다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후다닥 해치우는 스타일이다. 갈등이든 혹은 부담이든, 뭐든 미루는 스타일이다. 해야 하는 일을 미뤄두고 이 책을 읽었다.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하기는 박테리아에서 시작된 진화의 역사가 인간에게까지 이르고, 인간 정신의 극한 바흐까지 이르는 과정을 설명할 듯하지만(책소개는 그러함), 앞부분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제일 중요한 생각은 ’이해력 없는 능력competence without comprehension’이다.
인간 반응의 중심 특성이자 우리 종에게만 고유한 특성 중 하나는, 상대에게 스스로를 설명할 것을, 그리고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얻은 설명과 정당화를 바탕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보증하고 반박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활동은 순환적인 "왜" 게임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자기 역할을 일찍 깨치고, 종종 그 역할을 과도하게 수행하면서 부모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한다. "널빤지를 왜 잘라요?" "문짝이 망가져서 새 문짝을 만드는 거란다." "새 문짝은 왜 만드는데요?" "그래야 우리가 외출할 때 잠그고 나갈 수 있으니까." "왜 외출할 때 잠그고 나가야 하는데요?" "모르는 사람이 우리 물건을 가져가면 왜 안 돼요?" …………… "우리한테 물건이 왜 있어요?" 이 상호 이유 점검 reason-checking에는 우리 모두 참여하며, 또 모두 능수능란하게 이것을 해낸다. 이 사실은 상호 이유 점검이 우리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 이유 점검 활동에서 적절히 대응하는 우리의 능력은 책임의 뿌리다. (91쪽)
저자는 인간 반응의 중심 특성이자 우리 종의 고유한 특성이 ‘이유’와 ‘설명’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비생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등 존속persistence이 차등 재생산reproduction으로 점진적으로 변하는 과정(99쪽)을 설명하면서, 이유를 찾는 인간의 특성을 다시 한번 지적한다.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진화에는) 전혀 이유가 없다. 무엇을 위해? 라는 질문은 무용하다.
그가 제시하는 예 중의 하나는 흰개미 성과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파 밀리아성당의 놀랍도록 비슷한 구조다. 흰개미 성의 구조와 형태에는 이유들이 있지만, 성을 건축한 그 어떤 흰개미도 그 이유를 표상하지 않는다. 그 구조를 계획한 흰개미도 없고, 왜 그러한 방식으로 성을 지었는지 눈치챈/이해한 흰개미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이해력 없는 능력competence without comprehension’이다.
그들(다윈과 튜링)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탁월함과 이해력은 궁극적으로는 이해력 없는 능력으로부터 발생하고, 이 이해력 없는 능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층 더 능력 있는 ㅡ 따라서 이해력을 갖춘 ㅡ 체계로 합성된다. 이는 실로 기묘한 뒤집기로서, 전 다원주의적인 창조론의 '마음 먼저 mind-first' 관점을 전복시켜, 지성적 설계자는 가장 나중에 나온다고 말하는 우리의 궁극적 진화 이론인 '마음 나중mind-last' 관점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113쪽)
이를 논증하기 위해 저자는 이 책의 첫 문단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박테리아는 자신들이 박테리아라는 것을 모르지만, 분명히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생존하며, 자신의 환경세계 내에서 그들이 식별하는 것들을 피하거나 추적하거나 끌고 갈 능력을 지닌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필요가 없으면서 말이다. (145쪽) 대자연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무 생각 없었다. (149쪽) 저자는 이러한 이해력 없는 능력이 지구 생물의 압도적 다수가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이것이 기본 전제(154쪽)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상 생물 대다수의 생존법, 이해력 없는 능력. 그것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공통 조상에게서 시작해 지난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온 진화의 최종 산물,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고,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한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전제일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존재하는 것? 그것으로 인간 존재는 만족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결론을 예상하고 이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뇌는 우리 몸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단백질 덩어리이고, 자아와 정신, 영혼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뇌는 곧 마음. 내 마음이란 곧 내 뇌의 신경세포 사이 전기신호의 변화를 뜻하며, 종교란 인간 세계의 결속을 위해 지어낸 가장 세련된 거짓말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죽으면 끝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다일까?
진화를 설명하는 과학에 대항하는 가장 큰 방해 요인, 인간 중심주의와 목적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 목적 없이, 목표 없이, 방향 없이, 어떠한 기대 없이 이루어진 진화의 과정에 동의 (동의라는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다)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인간 삶의 무의미함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든 것의 종국이 소멸이라면, 그것이 결과로써 삶의 궁극이라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지금, 나는 살아있는가.
의미에 대한 강박, 목적에 대한 집착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 원자들의 합으로서만 존재하고 싶지 않은 나. 느끼는, 생각하는, 현재의 ‘나’가 다시 책을 펼친다. 결투하며 읽겠다. 피 튀기는 소리가 멀리멀리 울려 퍼지고, 목적을 찾아 헤매는 나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