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모든 문화는 인류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즉 인간의 대표로 긍정되는 자기들 자신과 거의 인류의 자격을 갖지 못하는 타자들이 그것이다. (64쪽)
다른 인간, 다른 문화, 다른 세계를 자신과의 ‘차이’를 바탕으로 ‘외부’로 규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문화와 문화의 접촉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출생 직후 (아기) 인간은 자신을 실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의 처음과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한다. (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을 구체적인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 주 양육자인 어머니는 최초의 ‘외부’이며, 남자아이와 똑같이 여자아이도 이 외부를 욕망한다. 어머니와의 원치 않은 분리, 혹은 분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나’ 이외의 바깥 세계를 인지한다. 먼저는 가족 구성원, 그다음은 친척, 친구, 또래 집단.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나’를 구체화한다. 외부 세계의 인식을 통해 서서히 나와 구별되는 세계와 그 세계 속의 ‘타인’을 인지하게 되는데, 이런 판단의 근거는 ‘차이’다.
([제2의 성] 우상이자 하녀,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996615)
자신과 다른 인간, 자신과 다른 문화, 자신과 다른 세계를 접한 인간의 반응 중 하나가 인종 말살이다. 인종 말살에서 ‘타자들’은 절대적으로 나쁜 자들이기 때문에 멸절시키는 것이다(62쪽). 그에 반해 민족 말살은 타자의 위치가 극단에까지 내몰린다. 그들을 멸절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기 때문이다. (62쪽) 그렇기 때문에 인디언 살해를 범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타인에 대한 인간의 거부감 혹은 불편함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문화권에 속해 살았다 할지라도 집안마다 각각의 독특한 문화가 존재한다. 가장 일상적인 식생활 문화를 살펴본다면, 오래 삭인 밴댕이 젓갈의 냄새를 ‘향기롭다’고 말하는 문화가 있는가 하면, 굵은 멸치에서도 ‘비린내’가 난다고 말하는 문화도 있다. 온 가족이 고기를 좋아하는 집이 있고, 각종 야채를 즐기는 집이 있다. 서로 다르다는 건 나쁘다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음, 저건 좀 이상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다.
내가 궁금해하는 지점은 이렇다.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자의 자리에, 어떤 사람들은 종속의 자리에 위치시키는가. 서로의 생김새가 다르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동일한데, 왜 어떤 사람들을 타자를 동물로 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타자를 신으로 여기는가.
<인종과 역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그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 민족 말살의 현상을 다루면서, 백인들은 토착인들이 인간인지 아니면 동물인지를 물었던 반면, 어떻게 서인도제도의 인디언들은 스페인인들이 신인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물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62쪽)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이런 의문의 한 축이 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질문.
그렇다면 어째서 양성 간에는 이런 상호성이 세워지지 않았고, 두 항 중 하나가 자신의 상대와 관련해 일체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상대를 순수한 이타성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만을 유일한 본질이라 자처하게 된 것일까? 여자들은 왜 남성의 지상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가? 어떤 주체도 자신을 단숨에 자발적으로 비본질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타자로 규정하는 타자가 주체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주체로 확립하는 주체에 의하여 타자는 타자로서 설정된다. 그러나 타자가 주체로 반전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타자는 이 낯선 관점에 복종해야만 한다. 여자에게 이러한 복종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가? (『제2의 성』, 30쪽)
그리고 보부아르의 답.
성의 대립은 근원적originel공존의 한가운데서 그 형태를 나타냈으며, 여자는 이 대립을 분쇄하지 못했다. … 즉 여자는 두 항이 서로에게 필수 불가결한 전체의 한복판에서 타자다. (『제2의 성』, 32쪽)
역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의문과 질문은 섹스에 대한 문제로 갈 수밖에 없는가. 그런 의미에서 적대적 모순 관계 속에서의 섹스를 설명한 ‘톰과 제리’ 비유는 가히 혁명적이다. 정확하고 적확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죠. 톰과 제리는 섹스를 하지 않아요. ‘재벌’하고 ‘알바’는 섹스를 안 해요. 그런데 남성과 여성은 적대적 모순관계인데, 섹스를 합니다. 이게 바로 이성애제도죠. 그 때문에 섹스가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20쪽)
어제는 빨래를 2회 진행했는데 아침에는 수건과 교복, 실내복 등 기타 등등이었고, 오후 늦게는 아롱이 여름 이불을 빨았다. 어둠이 시작되려는 즈음, 이불을 건조기에 넣으러 들고 가는데 하늘이 참 예뻐서 한 장 찍었다. 이른 저녁, 초승달 혼자 우아하게 지구를 내리비치고, 풀벌레 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아, 가을인가. 사진 계속 누워서 올라가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