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한 번 더 읽었다. 원래 읽으려고 해서 읽은 건 아니다. 소박하지만 나도 ‘진도’라는 게 있는데 이번 달에 진도가 지지부진한 관계로 생각 없이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눈으로 빠르게 따라 읽었다. 단어는 찾지 않았고, 당연히 구문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주인공 ‘올리브’의 베프 ‘안’과 올리브가 잠깐 만났던 ‘제레미’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올리브는 제레미와 이미 헤어졌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데 안은 그럴 수 없다며 제레미를 만나지 않으려 한다. 아무리 설득해도 안이 올리브의 말을 듣지 않자 올리브는 안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고서 실험실에 갔는데 저기 복도 끝에서 안이 걸어오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어머, 이를 어쩌나. 올리브는 지나가는 남자 ‘애덤’을 붙잡고 작은 소리로 묻는다. ‘저, 키스해도 되나요?’ 그리곤 대답할 1초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애덤에게 키스해 버린다. No, no, no. 라는 소리를 키스하면서 듣게 된 올리브. 그때의 상황이 바로 책 표지.
여차여차 사정으로 애덤은 올리브의 가짜 연애극에 동조해 주기로 하고. 커피를 주고받고, 고민을 주고받고, 추억을 주고받는 사이 올리브는 애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결국 (당연히!) 가짜 연애극의 전말이 밝혀지는데,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올리브의 룸메이트 ‘말콤’이 안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안은 말콤의 말을 믿지 못한다.
"Nuh-uh. This is a Hallmark movie. Or a poorly written adult novel. That will not sell well. Olive, tell Malcolm to keep his day job, he'll never make it as a writer."
Olive made herself look up, and Anh's frown was the deepest she'd ever seen. "It's true, Anh. I am so sorry I lied to you. I didn't want to, but-"
"You fake-dated Adam Carlsen?"
Olive nodded. (314쪽)
저자 Ali Hazelwood는 신경 과학자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썼다. 실험실을 지키는 새벽, 주말에도 쉼 없이 이어지는 실험, 논문 심사와 탈락, 다음 학기 연구비를 위한 비즈니스 프리젠테이션까지. 끝까지 공부하고 쉼 없이 연구하는 학자, 하얀 가운을 입은 근사해 보이는 과학자의 삶 이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 문단에서 저자는 스스로에게 했던 말을 보여준다. 엉망진창 로맨스 소설이야. 잘 팔리지도 않을 테고. (이 이야기/소설을 지어낸) 말콤(작가 자신)에게 하던 일이나 계속하라고 해.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고. 그래서 바다 건너의 내가 읽게 되었으며. 쩜쩜쩜.
엔딩에서 올리브는 ‘해피’하게도 애덤이 예전부터 자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먼저 자기를 좋아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애덤의 입장에서 보면 짝사랑이 이루어진 셈이고, 올리브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된 셈이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슬픈 짝사랑의 기억을 나 역시 한 조각 가지고 있어서, 나는 이런 사랑의 ‘결실’에 좀 과하게 감동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는 것. 이것처럼 어렵고 힘들고 놀라우며 감격스러운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5-6년 전쯤 일이다. 교회에서는 구역의 형태로 ‘소모임’을 권장하는데, 나도 몇 년 동안 작은 구역을 맡고 있었다. 보통은 근거리에 사는 비슷한 연령대의 교회 식구들을 하나의 구역으로 묶어주는데, 우리 구역은 내가 사는 라인에 몇 분이 이사 오고, 몇 분이 전도되면서 우리 라인에 우리 구역 식구들이 꽤 되었다. 하루는 우리 라인에 사는 구역 식구 한 분이 우리집에 오게 되었다. 집사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이때는 원두가 없어 카누였음) 아니에요, 괜찮아요, 구역장님. 도대체 서운해 내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집사님! 다른 차 드릴까요? (지금은 설록의 제주 난꽃향 티, 스윗부케향 티 등 각종 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때는 현미녹차뿐이었음)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그러면서 이 집사님이 이렇게 말한다. 저는요, 이렇게 구역장님을 보고만 있어도 좋아요. 어머나. 나를 보고만 있어도 좋다니.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서든, 나를 사랑했던 남자에게서든, 나는 이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좋다니. 보고 있기만 해도 좋다니.
이 집사님은 착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기가 국가대표급이다. 나도 예전부터 이 집사님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집사님에게 이런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 나니 너무나 황홀한 기분에 가족들에게 10회 자랑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 후 며칠 동안, 응답 받은 내 사랑은 그렇게나 찬란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도서관 책을 대출해 읽을 때는 ‘반납’이 제일 중요한데, 가까운 친구 한 명은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 오면 얼른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반납일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친구와 정반대인데, 나는 일단 책을 대출해오면 목차를 살펴보고는 대개 책 ‘보관 장소’에 책을 잘 보관한다. 그다음 날이나, 그 다음다음 날 ‘반납 연기’를 해두면 총 21일 동안 이 책은 내 책이 된다. 한껏 여유를 부린다. 그리고 반납일이 3-4일 정도 남았을 때쯤 보관장소에 가서 책을 꺼내 온다. 대출해 주신 정성(대부분 상호대차임)에 감사한 마음으로 한 번은 훑어봐야지. 더한 경우는 반납일 전날 도서관에서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고 책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읽기 시작. 오늘 반납해야 하는 『페미니즘 철학』은 나름 선택 받은 책이라 일주일 전부터 김치냉장고 위에 올려 두었는데, 다른 책들에 밀려 당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늘 반납일을 맞이하여 스르륵 넘겨보다가, 이런 문단을 만난다.
리치는 많은 여성이 사실상 이성애적 관계를 강요받게 되면서 "이중생활을 하게 되는데 다른 여성과 맺는 우정이나 유대야말로 여성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리치는 여성이 서로에게 품는 깊은 감정은 언제나 명확하게 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두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uum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감정이 때로는 명확하게 성적인 경우도 있고, 때로는 여성이 다른 여성과 가깝지만 성적이지 않은 신체적 접촉을 원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차이점은 명확하지 않다. (『페미니즘 철학』, 160쪽)
저자 앨리슨 스톤에 따르면, 에이드리언 리치는 ‘레즈비언 연속체 lesbian continuum’의 개념을 통해 ‘레즈비언’의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나의 감정이 레즈비언 연속체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그리고 눈빛이 내게 전해준 사랑과 기쁨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의 응답은 이렇게나 감사하고 뜨겁고 감동적인 것이며, 사랑의 화살표가 양방향이 되는 것은 새삼 세상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로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시는 모든 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