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큰 트라우마를 남긴(외상은 거의 없음) 교통사고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부터 심해진 ‘눈물 샤워’ 이야기. 그리고 이후의 우울증 투쟁 과정이 가감 없이 그려진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후에 심각해지는 우울증의 양상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진솔하게 쓰고 있다.
우울증이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나 역시도 그랬는데, 우울증은 ‘울적한 기분’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기 어려울 정도의 극도의 울적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우울증의 징후와 증상 중 주요한 기제는 우울한 ‘기분’이라기 보다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라는 걸 알게 됐다.
저자의 설명을 따르면 그렇다. 자기 능력이 인정받고 더 나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그 기회를 포착해 자신의 또 다른 능력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이 곧 탄로나리라 생각해 크게 걱정한다고 한다. 자신의 일이 실패했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와 단점, 부족했던 점을 돌아본다. 실패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만, 실패를 극복할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하지만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 ‘거봐, 이것 봐!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럼, 그렇지! 내가 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라도 있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성찰에 쏟는 시간을 조절하여 삶을 그냥 살아가는 데 쓰는 시간과 균형을 맞춘다. 이런 정상인들은 요가나 명상을 하기도 하고 목표 목록을 만들 수도 있으며 이따금 자기계발서를 집어 들기도 하지만, 그러고 나선 이탈리아 요리 체인점 올리브 가든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샤블리 와인을 마시거나 브래들리 쿠퍼 영화를 본다.
자, 보다시피 난 정상인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잘 모른다. 그들은 자기 머릿속 최악의 생각에 갇혀 버리거나 몇 년씩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면글면하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들은 나른한 패기로 휙 쫓아 버리겠지. 이건 정상인들에겐 파티에 아무렇지도 않게 참석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본능이다.
반면 우울인들은 한갓진 순간마다 머릿속으로 뛰어 들어가선 우울을 꺼내 과거에 대해 자책하고, 불안을 꺼내 미래에 대해 자책하고, 대체로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질책하는 경향이 있다. (235쪽)
급하지는 않더라도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따로 떼어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시간(친구들과의 만찬)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는 정상인들과 달리, 우울한 사람들은 한가한 순간마다 과거를 자책하고 미래를 걱정한다. 할 일은 너무 많지만 실제로는 자책과 걱정으로 현재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질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울증을 가진 사람의 사고 패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이는 『피로사회』의 한병철의 주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쪽)
하지만,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피로사회』, 92쪽)
자기 혐오와 자기 과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 속에서 불가능을 실현하고 있는 나. ‘할 수 있어’라는 말이 메아리치는 조건과 상황 속에서 실제로는 할 수 없는 나,를 볼 때, 가능하지 않은 ‘나’와 할 수 없는 ‘나’는 결국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울함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지나친 기대, 긍정성의 과잉, 실패의 가능성조차 부인하는 조건이 이러한 우울함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제일 궁금했던 답은 이미 찾았다.
마찬가지로 우울증도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그것에 저항하거나 이겨 내는 힘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꼼짝없이 휘둘린다. 유약하고 순종적인 사람을 무너뜨리는 우울증을 고집과 자존심으로 이겨 내는 사람도 있다. (『한낮의 우울』, 31쪽)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함이 있다. 단순화할 수 없는 면이 존재한다. 하긴 다면적인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 일일까.
드디어 나온다. 우울증을 이겨내는 첫 번째 팁. 개를 키우세요.
나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언어’라고 생각한다. 말이 주는 매력 혹은 말만 줄 수 있는 매력, 말로 건네는 힘에 대해 무한 긍정한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속담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탕감해주고 싶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대상, 말할 수 없는 대상과의 언어가 아닌 다른 소통의 방식, 그리고 그 소통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이 문단을 통해 새롭게 배웠다.
개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우울도 불안도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는 롤 모델의 지위를 갖게 된다. 개의 '오직 현재뿐인’ 삶의 태도를 모방해선 안 되지만 그랬다간 우리의 커리어와 가족과 집이 엉망이 될 테니) 그럼에도 그 태도는 용감하다고 볼 수 있다. 여느 개가 거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놓고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내 말은, 개가 인간에게 하듯이 남을 쓰러뜨리고 낑낑거리며 온몸을 핥아 댈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무례한 짓이다. 하지만 사랑이란게 어떤 모습을 띠는지에 대한 그토록 일상적인 시범을 보는 건 인간에게 유용하다. 특히 우울한 인간에게 이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그것도 깊이 느끼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상기시켜 준다. (255쪽)
라디오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으로서, 우울증의 심연을 직접 겪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의 글은 쉽고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힌다.
우울증을 이겨내는 두 번째 팁도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주말이라 나도 좀 놀아야 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런다 했다. 일하고 놀고. 놀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놀고 놀고. 놀고 놀고 놀고. 놀고놀고놀고놀고. 놀놀놀놀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