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님의 글 [여성과 광기] 사라지지 않으리 를 읽고 쓴다.
https://blog.aladin.co.kr/selfsearch/13213496
328쪽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대다수 여성은 ‘미치지’ 않았다. 미치지 않은 여성들이 ‘미쳤다’라는 판정 하에 정신 병원에 갇혔던 것은 이들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여성적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기’라는 것은, 남자에게 나타나든 여자에게 나타나든 간에, 과소평가된 여성 역할을 수행하거나 혹은 개인에게 부과된 상투적인 성역할을 총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과 광기』, 182쪽)
그렇다면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여성은 어떤 사람일까.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적 역할’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인 여성들이다. 순응하고 침묵한 여성만이 ‘정상성’의 범주 내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작가들에게 무료로 6개월씩 자리를 빌려주는 뉴욕 도서관의 프레드릭 루이스 알렌관 프로그램을 통해 베티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사흘을 베이비시터를 부르고 시내를 오가며 썼다. 점심식사 중 여성에 대한 책을 쓴다는 말을 듣고 조롱하는 작가들을 견디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식탁 위, 거실의 소파에서 원고를 썼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거나 저녁 식사를 만들기 위해 중단해야 할 때는 머릿속에서 이어 쓴 다음,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작업을 계속했다.
나 스스로 내가 쓰고 있는 것, 그 글이 인도되는 방향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장을 마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고 궁금해했다. 그러나 실마리들이 서로 맞아 들어가면서, 과학 탐험 이야기에서 어떤 발견을 해낼 때 과학자들이 느끼는 것과 확실히 똑같은 고요하지만 강력한 확신이 점점 더 강해졌다. (『여성성의 신화』, 44쪽)
자신의 경험과 교외 중산층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결해 가면서, 자신의 추론을 결론으로 이끌어 가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미친 게 아닐까.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조울증 환자이기도 한 저자가 고통을 외면하고 증상의 치료만을 목표로 하는 진료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고통과 증상과 인생을 정당하게 해석하기 위해 썼다. 남성 중심 사회의 맥락을 거부하려는 사람, 그가 <프롤로그>에서 말한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책 말미에 필리스 체슬러는 여성이 인간 행위의 본류에 진입하기 위해 심리적으로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묻는다. 오로지 생물학적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역할을 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가, 라고 묻는다. 무엇이 필요한가.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자아 정체성은 제한적이고 특정한 타인들을 위한 관심사와 몇몇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은 어떻게든 바뀌어야 하고 강인한 개인으로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것에 닻을 내려야 한다. 여성은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 많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어떻게든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아 초점을 그처럼 급격하게 옮긴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모든 ‘여성적인’ 신경과 감정이 날카롭게 자극되면서 심각한 대가가 따르게 된다. 어떤 여성은 그처럼 급격하게 초점을 이동시킬 때 ‘미쳐’ 버린다. (『여성과 광기』, 526쪽)
사고의 분산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여성의 자아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 것. 많은 일들, 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생각을 집중하는 것. 그래서, 결론은 버지니아 울프다. 가장 강력한 싸움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생각은 이 모든 싸움의 최종적 장소이며 또한 약자의 승리가 가능할 수도 있는 최후의 보루다.
Thinking is my figh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