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평점 :
1.5리터짜리 빈 생수병을 반으로 잘라 고운 흙을 담고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눈 뒤, 그 위에 선생님이 나눠주신 씨앗 4종류를 심는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간이 화분을 놓아두고, 물을 주면서 관찰한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가 숙제로 주어졌다. 둘째의 <발아 관찰 수업>이다.
손으로 만지는 모든 물건이 금으로 바뀌어 버린 미다스의 저주처럼, 내 손만 닿으면 쉽게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식물이 가득한 우리 집에서, 둘째 아이의 씨앗들은 그렇게 새 삶을 시작했다. 이틀이나 지났을까. 작디작은 씨앗 어디에 그런 힘이 숨겨져 있었을까. 딱딱한 씨앗 어디에 그런 생명이 감춰져 있었을까. 어기 영차. 친구들과 동생들과 어깨를 걸고 흙을 박차고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작은 새싹들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함과 식물의 위대함을 동시에 느꼈다.
『지구 끝의 온실』은 그토록 놀랍고 신기한 식물, 모스바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헤데라 트리피두스Hedera trifidus. 보편적으로 알려진 영어 명칭은 모스바나로, 송악속의 상록성 덩굴식물인 모스바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상용 담쟁이의 일종이다. 엄청난 양의 모스바나가 폐허 도시 해월을 점령하게 되어 실태 조사를 위해 나섰던 더스트 생태학 연구소의 아영은 출장 가는 길에 밤에만 보인다는 신비한 푸른빛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어린 시절 우연히 보았던 동네 노인 이희수의 푸른빛 정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2058년, 거대한 더스트가 온 세상을 덮어버려 ‘돔 시티’ 안으로 대피한 생명체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더스트 시대. 생존을 위해 ‘돔 시티’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돔 시티’ 내부의 사람들 사이에는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다. 실험 도구로 붙잡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한 아마라, 나오미 자매는 위험한 여정 중에 더스트에 대한 ‘내성’을 갖지 않은 인간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은신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고, 깊은 숲속을 방황하던 중, 더스트 시대의 유일한 피난처를 발견한다. 그곳이 바로 프림 빌리지다. 지구 끝에 위치한 인간의 마지막 희망. 밤낮 환히 빛나는 비밀의 온실이 바깥세상의 해악에서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곳. 성실히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는 이 공동체에서 자유의 시간을 누리는 것도 잠시. 프림 빌리지를 위협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의 리더 지수는 어린 나오미에게 분해제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고, 결국 비극의 날이 찾아왔을 때, 나오미를 비롯한 공동체의 모든 일원에게 씨앗 자루를 나누어 주며 부탁한다.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퍼즐처럼 흩어진 조각을 맞추어 낸 아영의 노력과 나오미의 회상을 통해 비밀 속 온실에서 모스바나를 만들어낸 레이첼의 정체도 서서히 밝혀진다. 인간이었다가 사이보그였다가 결국 기계가 되어버린 레이첼이 모스바나를 ‘설계’함으로써 인간의 구원자가 되는 과정은 인간의 삶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던 레이첼의 속마음을 감히 짐작하게 한다. 유기체의 범주를 넘어서서 이제 완벽한 기계가 되어버린 레이첼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식물이다. 식물로 뒤덮인 세상을 꿈꿨던 기계 인간 레이첼.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인간적 감정에 흔들렸던 그녀는 기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었으며, 스스로 분해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기계가 아닌 식물에 가까운 존재였다.
지구 끝의 온실은 폐허로 변했지만, 레이첼과 지수, 프림 빌리지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지구는 다시 생명이 약동하는 행성이 될 수 있었다. 자연에서 시작해 인간의 손을 거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모스바나처럼, 세상에서 버려졌지만 폐허의 지구를 재건한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지구 끝의 온실은 만들어진다. 새롭게, 다시 또 새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