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man, animalized; the animal, sexualized. That’s the sexual politics of meat. (Preface to the 20 Anniversary Edition)
사회화 과정을 통해 배우기는 하지만, 육식은 명백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192쪽)
채식주의 단어를 낳는 마지막 형태는 개인들이 채식주의 관련 텍스트들을 읽은 일이 계기가 돼 육식을 중단한다고 말할 때 발견된다. (212쪽)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육식을 중단하거나 육식을 계속하거나.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식의 성정치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고기’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육식을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동물권을 위해 육식을 거부할 수 있고, 건강을 위해 육식을 거부할 수도 있다. 다만, 이렇게 맛있고 고소한 ‘남의 살’을 거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필요하다. 한국의 식단은, 특별히 전통 식단은 이런 결심을 이어 나가는데 완벽한 완충지대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곳에서 먹는 것을 살펴줘야 하는 1인이 ‘육식’을 거부했을 때, 나는 그 애 손을 꼭 잡고 한참을 중얼거렸다. 학교 성적 말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인권 사각지대인 대한민국 10대인 네가,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성적 대상화’된 한국의 10대 여자 청소년으로 사는 네가, 채식주의자까지 된다면. 네 앞에는 얼마나 많은 난관이 존재하겠느냐. 너는 왜, 왜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불러일으키는 이 모든 소란스러움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려 하느냐. 난 결국 그 애를 말리지 못했고, 2가지 식단을 준비했다. 엉망진창 식단이 매일 그렇게 이어졌고, 난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만나 밥을 먹을 때 사람들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묻는다. 그건 너무 중요한 문제지만,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질문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이지만, 대답은 질문한 사람이 하고 만다. 참, 이상한 애구나. 참, 까다롭네. 물론 속으로 말이다. 그 애가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모른 척할 뿐이다.
채식주의를 실천할 때의 갖은 어려움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나로서는, 그 결정이 쉽지 않다. 사실 피하고 싶다. 채식주의 선배님과의 통화에서 위로를 얻는다. 탄수화물 좀 많이 먹어도 괜찮아. 빵까지 채식 빵으로 먹는 건 쉽지 않아. 고깃국물, 멸칫국물까지 적용하는 건 사실 좀 어려워. 고깃덩어리, 고기 그 자체를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아.
식재료를 사는 사람은 나니까 고기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줄여나갈지 생각한다. 먼저는 양을 줄이고 그다음으로는 종류를 줄여 보기로 한다. 소고기를 넣지 않은 미역국, 돼지고기를 넣지 않은 카레, 참치를 넣지 않은 김치볶음밥을 좀 더 자주 만들기로 한다. 우유, 생크림, 크림치즈를 줄인다. 달걀을 줄인다. 치킨을 줄인다. 연어 초밥을. 흑, 연어 초밥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