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아이가 어렸을 때 일이다. 목욕을 하다가 오빠와 남동생이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머! 저건 뭐야? 배꼽 아래 저거 뭐야? 나한테 없는 저건 도대체 뭐야? 나도 갖고 싶어! 나도 저걸 갖고 싶어! 엄마는 나처럼 그게 없는데, 아빠는 그걸 갖고 있네. 나도 갖고 싶어. 나도 아빠랑 오빠가 갖고 있는 저걸 갖고 싶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는 여자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순수하게 어이가 없었다.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부러워하는 시점은 배꼽 아래 그 무엇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남자들은 생리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을 때다. 생리하지 않음을, 한 달에 5일 이상 붙잡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다. 여자 아이라면 그걸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꿈의 해석을 읽다』의 양자오는 “프로이트를 부정하는 것은 프로이트를 긍정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짓을 해 버려도, 그가 지닌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로이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여자 아이가 두 번 좌절한다는 해석에는 왠지 모르게 수긍이 된다. 어머니를 차지하려던 남자 아이가 좌절하고, 아버지에 대해 적의를 품게 되지만 거세 공포로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와의 동일시로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 것과는 달리, 어머니를 욕망하던 여자 아이는 남근을 가지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실망과 남근 선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사랑의 대상을 다른 남자로 바꾸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로 시작해 어머니를 대체할 다른 여성을 찾아야 하는 남성보다, 어머니로 시작해 아버지를 거쳐 다른 남성에게로 욕망의 대상을 바꾸어야 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성취가 훨씬 더 어렵다고 주장했다(274-5쪽).
여성의 타자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원하는 건 남근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남근 소유자들에게 부여하는 물적, 심리적 특권이라고 주장한다(413쪽). (그녀의 말이 맞다). 또한, 남성이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순간, 타자 개념이 생겨났고, 이 세상에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타자’로서 ‘여성’이 위치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역시 그녀의 말이 맞다). 세계 인구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이질적인 존재. 그대 이름은 여성. 남성의 상대가 아닌, 인간의 상대. 그대 이름은 여성.
결혼은 노예제도의 형태라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다. 그것은 여성(적어도 프랑스의 부르주아 여성)에게 “야망과 열정이 결핍되어 있는 번지르르한 평범함, 무한히 반복되는 목적 없는 나날들, 삶의 목적을 한 번도 의문시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향해 유연하게 흘러가는 인생살이” 정도를 줄 뿐이다. 결혼은 여성에게 만족감, 평온함, 안정감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또한 여성에게서 위대해질 기회를 박탈한다. 여성은 자유를 상실하는 대가로 “행복”을 얻는다. 여성은 점차 더 적은 것을 위해서 정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415쪽)
결혼했고, 이혼할 생각이 없는 기혼여성으로서, 결혼에 대한 보부아르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결혼 생활에 대한 감상은 사노 요코의 에세이 『문제가 있습니다』를 읽은 후에 <말을 타고 멀리 나가는 남편>이라는 글에서 정리한 적이 있어 크게 더할 말은 없다.
말을 타고 나갔다 금방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가 읽기에는 불편한 글을 읽는다. 어디로 가는지, 가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