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견만리 시리즈>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휴가책으로 크게 유명세를 탔다. 먼저는 KBS 의 특별기획 방송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책으로 묶여 나왔다. 특별한 할일없이 시간부자인 아롱이를 위해 남편이 시청을 권유했는데, 아롱이는 누나를 제외하고 온 가족이 함께 <명견만리>를 시청해야 한다고 강력주장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빠를 독차지하는 건 어떨까. 엄마한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을 주는 건 어떨까. 아무리 달래고 꼬셔도 요지부동이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명견만리>를 꼭 같이 봐야하는가.
중국편(중국의 IT 기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인구편(일본의 인구 절벽을 교훈 삼아 한국도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해야한다), 착한 소비편(착한 소비를 실천하자)을 넘어 유전자 혁명편을 시청하고 난 뒤였다. 신의 언어 DNA, 이런 표현이 자주 나와서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롱아, 신의 언어가 뭐야, DNA. 저기 책 있지? 저기. 『신의 언어』. 아롱이는 책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고 되려 묻는다. 엄마, 그럼 신의 입자는 뭐야? 인생이란 자고로 질문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질문 받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의 입자? 신의 입자가 뭐야?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대답한다. 원자? 원자! 켁! 절로 조심스러워진다. 핵? 핵이라고! 캬햐! 힉스야, 힉스. 신의 입자, 힉스. 단언컨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래 처음 듣는 단어다.
<세계미래보고서>는 전 세계 64개 지부, 각 분야 3,500여 명의 학자 및 전문가를 이사로 두고 과학적 미래예측을 제안, 보고하는 ‘글로벌 미래연구 싱크탱크’에서 매년 발간하는 책이다. 올해는 코로나 기획으로 조금 더 두껍게 발간되었다. ‘최근 10년간 가장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 5가지’ 중에서 첫번째로 ‘힉스’를 꼽았다.
힉스 입자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델에 의해 예측된 최종 소립자로 다른 소립자들에 질량을 주는데, 과학자들은 거의 50년 동안 이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 2012년에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과학자들이 강입자충돌기에서 마침내 힉스 입자의 예측된 특성과 일치하는 입자를 발견했다. (24쪽)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이렇게까지 제한하는 걸 지켜보면서 반년을 보냈으니 힉스의 발견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거부감 없이 믿게 된다. 빅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는 상상 속의 물질이었는데 그 존재가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힉스는 다른 입자가 힉스 메커니즘을 통해 질량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입자로서 표준모형의 이론적 구조를 완성하는데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신의 입자, 힉스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2020년 2월 마지막 주. 나는 막 터키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증가하는 추세여서 대면 예배가 중단되었다. 다음주부터 개학인데 아이들이 학교를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 조금 나아졌다가 나빠지고, 많이 좋아졌다가 급격하게 나빠진 상황이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 오늘도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 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일주일 연장으로 오프라인 개학이 일주일 연장됐다. 2020년 2월 마지막주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7월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학생 바우처 꾸러미>를 보내주었고, 농협몰에 학생 1인당 4만원씩의 포인트를 지급해주었다. 좋아하지만 평소에 자주 구입하지 않는 식자재를 선택했는데 막상 물건들이 배송되고 나니 비상식량을 갖게 된 것 같아 좋았다. 큰아이는 ‘밥친구’를 작은 아이는 ‘치킨너겟’을 좋아했는데, 나라에서 주는 거라며 감동받는 사람은 나 뿐인가 하노라.
우리는 우리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익숙하게 대하던 일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며, 늘 위협에 시달리는 훨씬 더 취약한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대는 태도, 다른 생명체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 실존을 대하는 태도 전부를 바꿔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이 우리 삶의 기본적 지향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철학 혁명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팬데믹 패닉』, 100쪽)
이런 생활이 얼마큼,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의미없다고 하지만, 사실 궁금한 건 그것뿐이다. 이런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백신은 언제쯤 상용화될 것인가. 언제쯤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 것인가. 바꾸라, 바꿔야한다는 이 모든 설득 앞에서도 나는 자꾸 뒤로 돌아간다. 예전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마스크 쓰지 않은 얼굴을 보는 것. 표정으로 말하는 것. 마주 선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
최근 한 방송에서 홍기빈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가 그런 비유를 들었다. 애인이 서너 달 외국여행 간다고 하면 잘 다녀와라 그러겠지만, 오 년 정도 갔다 오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좀 다르지 않겠는가.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5년이라면 ‘우리들은 1학년’ 노래하던 아이에게 2차 성징이 나타날 정도의 시간이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성인 키의 고등학생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5년 동안 해외에 나가 헤어져 있어야 하는 애인이라면 결혼 아니면 이별인데. 나는 자꾸 그 애인과 결혼을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미래학자들은 이별하라고 하는데. 그 사람과 이제 그만 헤어지라고 하는데. 나는 결혼을 생각한다. 자꾸 그 사람과의 결혼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