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말로는 툴툴거리면서 좋아하는 마음에 은근슬쩍 챙겨주는 그런 캐릭터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 차도남이었나, 그건 아니고. 시크남이었나.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응팔의 류준열이 연기했던 정팔이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 츤데레, 그래 츤데레. 나는 츤데레 캐릭터를 싫어한다. 맘으로는 좋아하면서 실제로는 툴툴거리고 짜증내고 은근 뒤에서 챙겨주고 배려하는 스타일을 딱 싫어한다. 곰곰 생각하지 않고 대충 생각해봐도 내 인생에 그런 식으로 애정을 내비친 사람이 1도 없었는데, 아, 나는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봤던가. 아무튼 츤데레 남주는 사양한다. 사양합니다, 츤데레.
『빌레뜨 2』를 읽으며 츤데레 남주에 대한 나의 적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어차피 여주는 제인에어이고, 남주는 로체스터일테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지만,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 츤데레 남주에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예상되는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평생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 깊이 존경하고 심히 애정해 마지 않는 샬롯 브론테 선생님의 손길을 몇 번 거치고 나니, 나는 츤데레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
누렇게 바랜 사전과 다 낡은 문법책 사이에 참신하고 흥미로운 신간이나 달콤하게 무르익은 고전이 마법처럼 끼어 있었다. 바느질감을 담은 바구니 밖으로 로맨스 소설이 웃으며 내다보고 있고, 그 밑에는 소책자나 잡지가 숨어 있었다. (149쪽)
이 츤데레의 치명적 약점에 대해 열거하자면 시간이 부족하다. 이 밤이 짧다. 나는 이런 츤데레 캐릭터가 싫다. 실제도 싫고, 상상도 싫다. 그런데! 참신하고 흥미로운 신간을 골라주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좀 흔들릴 것 같다. 달콤하게 무르익은 고전을 살짝 놓고 가는 사람이라면, 로맨스 소설을, 소책자나 잡지를 내 자리에 무심하게 남겨놓고 가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츤데레이지만 참신하고 흥미로운 신간을 고르는 안목에, 살뜰히 신간을 전해주는 그런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다.
츤데레 남주라도 용서하게 만드는 참신하고 흥미로운 신간으로는 이렇게 세 권을 꼽아본다.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김연수의 장편소설이다. 두 번째는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1,300쪽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딱 한 권만 고르라고 하면 고르게 될 것 같은 책. 신간 아닌 고전. 고전인데 리커버 개정판이라 신간,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우리가 아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끝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 샬롯 브론테님의 흉내를 내보자면.
독자여, 결국 난 이 책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으면서도 이 페이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 소설이 주는 모든 즐거움은 이제 오롯이 그대의 것이다. 내가 누렸던 기쁨과 안타까움을, 분노와 좌절을,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그대도 누릴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