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변명한다. 정도의 문제다. 우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속한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책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얼굴도 모르는 이 미국인 교수는 ‘유대인’일거라고 추측했다. 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에 대한 해석. 동양에 대한 해석. 가진 정보 없이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미국인 교수의 동양에 대한 해석. 미국 교수의 아시아 이해.
예상이 전부 틀렸다는 건 책날개에서부터 확인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인이다. 재외국 팔레스타인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평생 미국의 중동정책과 이스라엘 무력 행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유럽에 단지 인접되어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였고, 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원천이었으며, 유럽문화의 호적수였고, 또 유럽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 이미지이기도 했다. (15쪽)
여기가 두번째 놀람 포인트였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으로서, 그가 말하는 동양은 내가 살고 있는 동양이 아니었다는 점. 그가 말하는 ‘동양’이란 유럽에 인접한 동양, 유럽 문명과 언어의 원천이 되는 동양, 유럽의 호적수로 오랫동안 경쟁관계를 이루었던 동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그가 말하는 ‘동양’은 내가 속한 동북 아시아가 아니라, 중동 아시아 정확히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점으로서 ‘동양’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이해한 건가. 의미가 명확해지는 지점은 141쪽.
동양이라는 말이 단순히 아시아 동양 전체의 동의어가 아니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이국적인 것을 막연히 지시하는 것도 아닌 경우, 그것은 이슬람 동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지극히 엄격하게 이해되었다. (141쪽)
그래서 이렇게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정의로 정리하려는 순간,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이 이렇게 당부한다.
초기에 국내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랍세계에만 관련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5년 사이드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이어 일본교포학자인 강상중 교수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가 번역되면서 관련 분야 연구와 번역이 활성화되었다. (김성곤) [네이버 지식백과] ‘오리엔탈리즘’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참 중국에서 맹위를 떨치며, 한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수십 명 단위였을 때, 터키 여행을 갔다. 100번도 넘게 들었던 이야기가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터키’였다. 이스탄불 공항 직원들을 마주했을 때부터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생각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터키가 왜 아시아에 속하지? 이스탄불의 어느 지점이 ‘아시아적’이지?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김승섭은 인종 개념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구성물이라고 지적했다. 유전자 변이에 따라 인류를 6개 집단으로 나누는 경우, 6개의 인구집단 구분과 오늘날의 피부색이나 국적에 따른 인종 구분이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인종 구분은 인간을 구별하는 편리한 판별법이 될 수는 있지만, 많은 경우(사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실제로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대면했을 때, 나와 다르게 생긴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에 대해서라면,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얼굴 모양, 키, 체형, 머리카락, 눈동자 색. 그리고 그들의 식습관을 관찰했을 때, 그들은 다르다. 우리와는 다르다.
나는 패키지 여행객이어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터키의 사람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관광버스 기사님, 현지 가이드님, 편의점 직원들, 관광지역 상인들, 블루모스크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동양적’인 느낌을 받지 않았다. 동양은 내게 속한 범주다. 내가 바로 동양인이다. 노란 피부에 크지 않은 코.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중간 체형의 동양인. 내가 확실히 동양인인 것만큼 그들은 서양인이 확실하다. 터키는 서양에 속한다.
물론 나의 이런 판단 역시 ‘동양은 어떠하다’는 혹은 ‘동양적 외모’가 어떠해야 한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동양적’인 모습은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인들의 모습이다.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
그렇다면 터키를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혹은 동양과 서양의 만남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서양인들, 유럽인들이다. 터키를 서양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진정한’ 서양의 범주에서 터키를 배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서양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그리스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며, 비잔티움 제국의 1000년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 바로 터키다. 그럼에도 터키는 서양이 아니다. 터키인들이 몽골 초원과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제국의 후예이기 때문일까.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었기 때문일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단순히 한 도시의 함락이 아니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지 1000년 만에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기독교의 상징으로 유럽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천 년의 수도는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족의 차지가 되었다. 유럽의 동쪽을 지키면서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아 주던 방파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128쪽)
오리엔탈리즘. 타자에 대한 인식, 강력하고 명석한 유럽과 늙고 무력한 아시아,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서구와 서구의 해석에 의해 규정되었던 동양. 탐구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었던 동양.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과 명백한 오리엔탈리즘. 이 모든 것은 아직도 너무 멀리 있다. 멀다. 너무 멀다. 멀다 멀어. 너무 멀리 있구나.
심려치 마소서. 신에게는 아직도 『오리엔탈리즘』 532쪽이 남아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