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되었든, 난 내 글이 ‘배부르고 한가한 소리’로 들리지 않아야 한다는데 강박이 있다. 항상 그게 신경 쓰인다. 전업주부. 이를테면 내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려고 해도 남편의 직장과 소득을 확인해 줘야 할 때 느끼는 감정과 그래도 혼자 벌어 먹고 살만한 정도 아니냐는 질문 아니 질문을 들었을 때의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큰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둔 후,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똑 떨어졌다. 처음에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다음해에도 떨어지고 보니, 그 쪽이 아니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원 입학에 실패하니 대학원 입학에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계획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이를, 예쁜 아이를 잘 키우자. 어차피 둘째도 낳아야 할 테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남편은 가정적이었고, 아이는 예뻤다. 순하디 순한 아이가 낮잠을 자고 있을 때는 그전에 읽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읽지 못했던 책을 차분히 읽었다. 고요하고 조용한 나날이었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고 그려본다면 딱 우리집 같은 모습이었을거라 생각했고, 나 스스로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청바지를 입은 23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불만을 느끼는지 스스로 물어봐요. 내겐 건강하고 착한 아이들이 있고, 새 집은 아름답고 재산도 충분해요. 남편은 전자기술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에요. 남편은 전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요. (71쪽)
텍사스 휴스턴의 한 주부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 혼자만 이 문제를 느낀다는 것이 저를 더욱 힘들게 했어요. 가정을 돌보고 가족들을 뒷바라지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내 인생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어요. 내가 별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내가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일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답니다.” (93쪽)
그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하고 조용했던 나날들, 나만 아는 일기장에, 나는 저 위의 문장들을 적고 있었다. 그 때는 일기장과 기도일기장이 병행되던 시기라, 그대로는 옮길 수 없는데 그 내용은 똑같다. 난 가진 게 많은데, 행복한데. 왜 나는 또 다른 것을 원하는 걸까. 오늘은 뭘 할까. 오늘은 뭘 해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하지. 오늘, 오늘을 어떡하지.
그간 읽었던 아름답고 훌륭하며 완벽한 여성주의 책들 중에 이 책을 넘버 3 중 하나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유.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 나만 겪는 문제라고 내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그 문장들을 이 책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물론 한계도 있다. 남성과의 법적 제도적 ‘평등’의 성취가 아직까지 요원한 것은 물론이고, 여성의 ‘일할 권리’가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 내의 부불노동을 비롯해 각종 돌봄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여성은 이중, 삼중 노동에 시달린다. 백인 중산층 전업주부가 ‘나 자신’을 찾겠다고 집을 나설 때, 그녀가 남겨놓고 간 일들은 흑인, 유색인종, 제3세계 이민 여성들의 몫이 된다. 저임금, 불안한 처우, 불안정한 법적 지위가 그녀들을 더욱 옭아맨다.
이 부분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데, 여성주의 운동의 전개와 조직화 과정에서 백인 여성들은 흑인 여성들에게는 자매애를 강요하면서도 ‘여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발언권이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다. 앨리스 위커는 <나의 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백인 여성 학자들에게 흑인 여성을 여성으로 여기는 일은 정신적 압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불편한 일입니다. 백인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름이 (백인 남성 사이에서의 “남성”이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분노와 애정』, <나의 아이> 앨리스 위커, 200쪽)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에서는 이렇게 썼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두 가지, 즉 열쇠와 자물쇠가 있는 자기만의 방과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돈을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한다고 썼다. 그러면 자신조차도 소유하지 못했던 노예인 필리스 휘틀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약하고 병이든 흑인 소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때때로 자신조차도 하인이 필요한 상태였다. … 버지니아 울프는 물론 우리의 필리스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다음과 같이 썼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적 맥락들』 속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45쪽)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책상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흑인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이런 언설이 불편하다. 당연하다. 백인 여성, 그것도 일부 백인 여성의 경험이 페미니즘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인종, 계급과 절묘하게 이루어지는 성차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고한 남성 연대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배제의 페미니즘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페미니즘의 ‘당사자성’에 대해 말할 때, 이런 이유로 백인 여성을 ‘버리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제일 먼저 성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여성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더 고통 당한 사람만이, 더 괴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만이 그 일에 대해 말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당당한 여성, 권력 분점을 요구하는 여성, 자신을 존중하는 여성, 남성의 보호나 네트워크에 저항하는 여성보다 ‘피해 여성’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젠더 사회에서 남성은 성공을, 여성은 불행을 ‘경쟁’하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된다. 여성은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과 유혹을 느낀다. ‘피해자다움’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중요한 성 역할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145쪽)
강간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내 얼굴은 무자비한 인터넷세상에 떠돌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성폭력에 대해, 아내 폭력을 비롯한 가정 폭력에 대해, 여성을 노예처럼 사고파는 n번방의 잔인함에 대해, 여성혐오와 페미사이드에 대해, 스토킹 범죄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나는 피해자가 아니므로, 그 모든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침묵해야 하는가.
아프리카의 음핵절제, 인도의 결혼지참금 살해, 여아살해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침묵해야 하는가. 이런 끔찍한 일들의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해야 하는가. 피해자만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나는 피해자가 아니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우리 모두 답을 알고 있다. 아니다.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말할 수 있다. 말해야 한다.
최근 이런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 여성에게는 여성해방이 필요 없다는 말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이 여성은 이미 해방되었거나,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주장은 중산층 사이에서도, 제3세계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실을 무시한 경우이다. 이는 해방과 부를 경제주의적으로 동일시하는 한 예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과 다르게, 나는 저개발 국가에서건 과개발 국가에서건, 페미니스트 중산층운동은 절대적이고 역사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21쪽)
4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도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마리아 미즈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페미니스트 중산층운동은 절대적이고 역사적으로 꼭 필요하다.(421쪽) 가장 강력한 이슈인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 즉 강간과 여성구타, 음핵절제, 결혼지참금 살해, 성희롱’에 대한 반대 운동을 통해 계급과 인종, 국가를 초월한 여성 연대를 이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소녀에 대한 음핵절제 반대 운동과 조혼 반대 운동이 그 시작점일 수 있겠지만, 그 후에는 소녀들에 대한 교육 기회 확대, 직업 선택의 자유와 경제적 독립 지원으로까지 페미니즘 반경이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디쯤,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책상 그리고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요구도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자진을 강요해 열녀문을 세우고, 신여성이라 동경하면서도 전통적인 성윤리를 강요하고, 아들은 집안의 대를 잇는 귀한 존재로 평생을 떠받들었던 문화의 나라가 이 나라다. 우리도 이렇게 빨리 많이 바뀌었다. 아직 멀었지만 더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 그리고 자기만의 책상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