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정확히 하자면 좀 지나치다.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책이라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없다. 지나칠 수가 없다. 가볍게든, 자세히든 한 번은 훑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다고 내가 진중하게 공부하는 외국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가을, 일본 여행을 앞두고서 식당 가면 주문은 내가 하겠다며 일본어 기초편을 딱 펼쳐서는, 가타카나와의 슬픈 추억에 2장을 넘기지 못 하고 금세 포기. 아, 구몬. 구몬중국어를 신청해서 아롱이와 1책 2인 공부의 신기원을 마련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단 한 쪽도, 단 한 장도 시작하지 않은 채 배송된 책들을 고이 모셔 놓은 지 이제 6개월째다. 연장은 없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만약 하나의 외국어를 공부하게 된다면 어떤 외국어가 좋을까, 이런 뜬구름 잡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우아한 느낌은 역시 프랑스어가 최고지. 봉주르~ 스페인어가 배우기 쉽다고들 하던데, 스페인어가 나을까. 아니야,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엘레나 페란테를 원서로? 그래, 줌파 라히리가 선택한 언어도 이탈리아어잖아. 그럼, 이탈리아어로! 가자! 이탈리아! 가자! 페란테! 대꾸 없는 혼잣말 대잔치에 난데없는 선택 장애. 질병에 가깝다.
이 책이 전하는 노하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와 표현만을 외운다, 그리고 실제로 사용한다. 오직 이것뿐입니다. (17쪽)
여기 어디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까.
<Part 1> 초급 단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200단어와 30표현(생존 단어 및 표현)을 외운다
<Part 2> 생존 단어 및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기초를 다지고, 필요에 따라 어휘량을 늘려간다
여기 어디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까.
예문은 소리 내어 읽으면서 암기합시다. 그래야죠. 비즈니스 레벨에 도달하고자 할 때 ‘시험’은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됩니다. 물론이죠. 평범한 환경에서 자라 단 한 번의 유학 경험도 없이 혼자 공부해서 10개 국어를 말하고,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비즈니스 레벨로 구사한다는 저자의 말씀을 여기까지 잘 들었다.
옆에 꽂힌 책도 펼쳐 본다. 『그래서 오늘 나는 외국어를 시작했다』.
한 번도 외국에 가본 적 없는 미국인이 어떻게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랍어를 능숙한 수준으로 습득할 수 있었을까? 그는 말했다.
“그 63주 동안 우리는 철저히 폐쇄된 환경에서 생활했어. 아랍어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 나중에는 꿈도 아랍어로 꿀 지경이었다니까!” (156쪽)
역시 모르는 바 아니나, 실제로는 실행이 매우 어렵다. 외국어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두 달 만에 외국어를 배우는 모르몬교 선교사들이나, 국제 NGO의 현지 활동가들이 한 달 만에 소수민족의 방언을 습득한다는 이야기도 그렇다.(143쪽) 가능하다는 예시가 차고 넘친다. 하지만 가능한가, 어떻게?
시원스쿨 대표의 유투브 광고를 우연히 보았다. ‘영어공부 조금씩 꾸준히가 될까요?’가 영상의 제목이다. “제가 진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잖아요. 제일 결과가 좋은 사람들은 누군지 아세요? 밤낮없이 영어공부한 사람이에요.”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읽은 영어/외국어 학습법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그렇다. 거북이의 ‘꾸준함’ 보다는 치타의 ‘미친 폭주’가 적어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는 훨씬 낫다는 것. 문제는 달리고 싶은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달릴 자세가 안 되었다는 것.
『그래서 오늘 나는 외국어를 시작했다』의 저자는 캘리포니아대학 언어학과 스티븐 크라센 교수가 다언어를 습득한 사람의 예로 제시한 롬브 카토를 말한다. 크라센은 『크라센의 읽기 혁명』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읽기’를 꼽았고, 롬브 카토는 『언어 공부』라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이 16개 국어를 구사하는 방법을 공개한바 있다. 배우고 싶은 언어로 된 두꺼운 사전을 하나 구입하고, 거기서 글자 읽는 법을 익힌 후, 나라 도시 이름들을 보면서 글자-음소 관계를 추측한다. 연습문제 정답이 달려 있는 교재로 공부한 후, 그 언어로 된 희곡이나 단편소설을 읽는다. 해당 언어의 뉴스 방송을 듣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을 녹음하고, 여러차례 반복해서 듣는다. 선생님을 구하러 다니고 원어민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게 전부다.
여기 어디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까. 그녀보다 훨씬 나은, 비교도 안 되는 디지털 환경을 사는 내게 부족한 것은, 하려는 마음. 바로 그거다.
나온 김에 잭 리처를 하나 구입했다. 하나라도 잘 하자,로 다른 외국어를 시작하지 못하는 핑계로 삼았으나,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웃픈 스스로를 달래며. 잭 리처니까. 일단 이 남자랑 이야기 좀 잠깐 나눠보고. 잭 리처도 나같은 고민이 있나 함 물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