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발표된 『피로 물든 방』은 고전 ‘다시 쓰기’를 넘어 고전적 동화에 숨어있는 내용을 파헤쳐 내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요정 대모(fairy Godmother)”라 부른 바 있는 재능 있고 독특한 작가 앤절라 카터가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해설, 252쪽)
「피로 물든 방」은 ‘푸른 수염’ 이야기다.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기괴한 동화는 ‘열일곱 신부’의 눈으로 다시 그려지는데,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읽는 내내 초조함과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할 것이라는 그녀의 예언은 적중해서 나는 세 문단을 읽고 곧바로 앤절라 카터를 ‘단발머리 선정, 2019년 올해의 소설가’로 정했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옷을 정리하고, 간식을 챙겨 주고, 서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떠드는 그 정신 없는 와중에, 거실 정중앙에서 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피 묻은 방」을 마치지 못 했다. 누군가 내 독서를 방해 해서가 아니라,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너무 무섭고 너무 좋아서 더 읽는 것이 불가능했다. 읽던 책을 덮고 그 옆에 있는 책을 펼쳤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장난을 치고 있되 많이는 귀엽지 않은 원숭이 무리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침, 이번엔 혼자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는 나와 엄마를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에 데려갔다. 그런데 글쎄 <사랑의 죽음>을 들으며 마음이 너무 울컥하고 아파서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맞아, 그랬다. (16쪽)
나는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를 역겨워했다. (36쪽)
열일곱 순진한 처녀가 자신의 남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일거라 짐작하는 장면에서 나는, 여러 번 멈췄다. 자신을 지독한 가난에서 구해줄 남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자신에게 청혼하는 남자, 자신에게 온갖 선물 공세를 하는 남자. 열일곱 소녀는 이 남자가, 자신을 원하는 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오페라 속, 절정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그를 사랑한다고, 그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많은 순간, 그녀는 그와 연관된 모든 것에 혐오와 공포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너비가 5센티미터인 루비 목걸이를 했을 때 자신의 목이 굉장히 값나가는 잘린 목(16쪽)처럼 보인다는 것을, 자신이 결혼 곧 귀양살이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18쪽), 남편의 허연 살집을 꼭 닮은 백합에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을(24쪽).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는 사랑과 공포 사이에 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 때문에, 이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은 몇 개의 보석 알과 죽은 짐승의 털가죽으로 사들인 아이일 뿐이고(30쪽), 그가 정해준 음식, 그가 정해준 옷, 그가 정해준 침실에서 생활해야 하는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왕자님, 아빠, 오빠, 남동생, 옆집 아저씨가 아닌 엄마가 그녀를 구하러 왔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열일곱살의 신부가 아니라, 이 저택의 주인인 후작이다. 그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서 있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수습해 그 명예로운 칼을 휘둘렀음에도 비참한 최후를 피하지 못했다. 흠잡을 데 없는 단 한 방의 총알. 엄마는 완벽했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었던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지적 문화적 영향을 받았던 작가는 작품 곳곳에 다른 작가들의 시와 작품을 펼쳐 두었다. 「피로 물든 방」에서는 보들레르의 시가, 세번째 단편 「타이거의 신부」에는 걸리버여행기의 ‘휴이넘’ 왕국, ‘오셀로’의 탄식도 등장한다. 두 번이나 언급된 보들레르의 시집이 집에 딱 한 권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 남은 시간은 보들레르와 함께 보내야할지, 저자가 특히 좋아했다는 초서와 함께 해야할지 생각 중이다.
영혼을 건 최고의 명승부. 불멸의 삼파전.
셰익스피어냐, 보들레르냐 아니면 초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