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의 큰딸이 썼다는 것,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는 제목, 박완서 작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편집자 서문으로 볼 때 ‘엄마 박완서’에 대한 기억이 중심이 되는 책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본문을 읽으니 이 책이 ‘엄마 박완서의 부엌’ 이야기라기보다 ‘엄마 박완서와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로 느껴졌다. 이 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엄마 박완서’가 아니라 ‘나 호원숙’이다. ‘박완서 문학의 코멘터리’도 종종 등장하지만 박완서 작가가 없는 ‘나 호원숙’만의 이야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듣고 싶었던 독자라면 아쉬워할 수 있겠지만,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에도 박완서 작가와 그 윗세대가 남겨준 유산이 스며들어 있다. 그들의 유산과 작가 자신이 꾸려온 것들로 이루어진 음식 세계는 정갈하면서도 따뜻하다. 매일 정성을 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 나 자신과 가족,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 늘 반복되는 고된 일이지만, 그 일을 매일 쉬지 않고 하기에 더 품위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일의 밥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근면함과 정성,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그 근면함과 정성, 사랑은 엄마와 할머니, 그 윗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작가는 내 부모님과 같은 세대이니, 작가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조부모님 세대, 작가의 할머니는 증조부모님 세대인 셈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접해 보지 못한 옛 세대들의 일상, 지금은 사라져 가거나 이미 사라져 작가의 기억과 기록에만 남아 있는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이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음력 10월에는 하얀 쌀가루를 체에 걸러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고사떡을 만들고, 시골에 가서 첫 손주에게 첫 미역국을 지어줄 ‘해산 바가지’를 구해 왔다는 할머니. 만두 꺼풀을 얇게 밀어 직접 만두피를 빚고, 만두소도 직접 만들어 식구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던 어머니. 어머니가 만들던 방식대로 만두를 빚는 작가. 이런 정겨운 풍경들을 책으로나마 만난다. 앞서 외국 음식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다 이 책을 읽으니 여행을 하다 우리나라, 친척들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로 돌아온 기분이다. '해걸이', '엽엽하다', '꾸리살', '수굿하다', '배틀하다'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그 시절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기보다 ‘나 호원숙의 부엌’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부제는 책 내용과 딱 맞아떨어진다. 할머니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작가 자신으로 이어져 온 사랑의 기억이 있다. 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도넛이나 고로케를 안겨주던 아버지의 사랑과 그런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의 사랑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들 가족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험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어진 사랑이 있기에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P. S. 이 책의 부제가 된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은 작가의 아버지가 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가족들에게 돌아오던 시기에 느꼈던 사랑과 행복감을 말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단편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일 멋있어졌다. 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할 적도 있었다. 일찍이 연애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아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찾아보니,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남편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병들고 노쇠해져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어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