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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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평점 :
생경하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만약 고독의 층위가 분절되고 나뉘어져 있다면 누구든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고독은 누구나 공감하고 부정할 수 없는 교집합의 공통분모다. 소외든 고립이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깊은 나락으로 빨려 들어 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흔히 고독한 섬에 붙들어 매곤 한다. 대중 속의 고독,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완강히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또한 누구나 소통에 목말라 하며 해갈되지 못하는 공감의 목마름에 허덕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인용 식탁>은 고독을 노래한다. 옴니버스로 단락과 장을 구분 짓지만 공통된 메타포는 고독이다. 고독을 이토록 보기 좋게 버무려 낸 젊은 작가 윤고은의 글발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디서 이런 고소한 팝콘처럼 아삭하게 톡톡 튀겨 볶아진 글이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총 9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나름의 아우라를 뽐내며 사뿐사뿐 도도한 시선을 내 지르는 힘에 금세 압도당하고 매료된다. 여태껏 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가 만든 상상력은 현란하다. 하지만 글과 글 사이에 들어앉은 행간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다. 건조하게 엮어진 문장만이 스미듯 여미듯 관통한다. 이것이 그미의 필력일까?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라간 그곳에는 텅 빈 허무만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긴 일탈 후 무겁게 짓누르는 허무함이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일인용 식탁>은 도시적 삶의 코드를 통해 매몰되고 소실된 인간을 그린다. 그 자장의 범위 내에서는 혼자서 당당히 식사하는 법을 터득하고, 꿈도 대신 꾸어 주며, 달콤한 휴가 내내 빈대에 굴복당하고, 퍼즐을 맞추듯 인베이더 그래픽을 찾으며 일탈을 꿈꾸는 누군가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녀는 주인공들의 성 정체성을 체계적이며 의도적으로 뭉개 버린다. 이를 통해 중성적 대상, 즉 모두를 향해 누구나 그러하리라는 내밀한 공감을 이끌어 내며 원하는 종착점으로의 유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결국 소설 속 화자들이 곧 당신일수도 아니면 작가 자신일수도 있으리라는 든든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오롯이 만끽해 보자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에 더해 저자의 발칙한 상상력은 당신 안에 잠자던 감성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의 문화코드 짚어 내기는 터를 제대로 잡았으며 주춧돌이 튼실하다. 정이현 작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며 거울에 비쳐 퍼진 영상을 복기하는 것과 같다면 저자의 글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스트가 황금비율로 첨가되어 숙성되고 부풀려진 빵처럼 입체적이다. 하지만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공갈빵처럼 쉽게 오그라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의 박홍도가 베어 문 솜사탕의 자괴감과 허무함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입 안 가득 퍼지는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고독은 현실 속을 점령한 빈대처럼 상상만으로도 불쾌해 진다. 불쾌감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벗어나고 이성은 빠르게 부유물처럼 떠내려가 버린다. 비단 이러한 현상은 도무지 믿기 어렵지만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러니 그녀의 상상이 허무맹랑한 가십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텁텁함에 거북스럽다. 아픔으로 뱉어 내기에는 사소하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광범위하게 퍼진 삶에 무게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배이고 아프기 마련이다. 상처는 시간이 보듬고 무뎌지게 하지만 고독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피어싱의 날카로운 단말마처럼 차가운 냉소가 자리 잡는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 삶에 치이고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성인용품 플라토닉 러브 자판기 판매상의 이야기는 상상과 공상의 어느 경계에서 솟아 난 것처럼 가뭇없어 보인다. 냉소 가득한 현실의 절규에 비례해 짜부라지는 화자의 모습과 현실 속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동일시되는 것은 치열한 경쟁이 낳은 산물이리라. 고립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된 삶의 그늘처럼 야생의 거친 숨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절규하는 것인지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혼자서 폼 나게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원이 등장하고 메트로놈에 맞춰 음식을 주문하고 부지런히 먹는 법을 습득하는지 모른다. “나 홀로식사“의 지존은 뭐니 뭐니 해도 삼겹살 공략이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립된 쇼 윈도우에 갇힌 존재처럼 쏟아지듯 내리 꽂히는 눈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뎌야 하는 살벌한 영역이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멀지 않게 존재한다.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의 경계는 우리를 필요 이상 긴장하게 만든다. 연결된 장면이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상황을 건너뛰고 고립된 상황의 재현이라면 우리는 쉽게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와 함께 라는 심리적 담보에 의해 무탈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혼자는 여전히 민망하다.
상상이 이처럼 지독하게 현실을 외면한다면 기대한 바와 다르다. 상상은 그저 꿈처럼 말랑말랑하고 블링블링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몽상가의 설렘처럼 조금은 허무하지만 도탑게 다독여주고 위무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작가의 상상은 현실 비틀기를 통해 날것 보다 더 생생하게 버무렸다. 오히려 무게에 눌려 분출된 억압의 잔재를 두텁게 덮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생경한 상상은 현실과 유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과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희망을 읊조렸다면 더욱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결국 상상은 현실을 담보로 시작된 형체 없는 바람에 불과하며 소멸을 예정한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