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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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좌표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어디든 신ㆍ구간, 좌ㆍ우간의 자생적으로 피어나는 계층 간의 알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릴 적 기억으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좌로 치우친 사상이나 표현은 이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 시절 목 놓아 자유를 갈구하던 민주열사도 518 학살에 희생된 영혼도 모두 붉었다. 그러했기에 난 붉은 색은 뭐든지 다 삐딱하게 보았고 우리 편이 아닌 반대의 세력으로 인식했는지 모른다.




실제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린 많은 것을 잃고 얻었다. 보수와 진보의 기치 아래 다양한 세력의 물밀듯 터지는 출현을 맛보았다. 바야흐로 이념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해서 현재의 시류를 논하기에는 상당히 예민하고 민감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해서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을 담았고 무엇을 보았는지 고민하기 전에 그 저자가 바로 장정일 작가란 데 있다.




평소 그의 철학이나 신념을 흠모했던 이유도 있겠거니와 차별화된 시각적 통찰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작품의 전반을 관통하는 담론과 통찰은 신선한 충격에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10년 만에 쇳물에서 막 달군 쇠막대기처럼 뜨거운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러한 관계로 이 책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가 떠안은 숙명적인 과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감히 꺼내기 힘들었던 현실의 문제를 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마치 황야를 개척하던 프론티어처럼 말이다.




책은 10대 후반의 거침없는 젊은 영혼, 금과 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장소설이다. 금은 민주화의 온기가 숭고하게 흐르는 호남에서 성장하였으며 은은 전통보수 세력이 득세한 영남에서 자랐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자리를 메워 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동성 간의 연인으로 발전할 만큼 각별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자웅동체와 같았다. 여기서 그들을 묶은 커밍아웃은 작가의 의도된 삽입처럼 변형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금과 은의 기질과 성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진보를 상징하는 금은 이상과 열정을 신봉하고 반면 은은 보수에 입각한 현실과 냉정을 열망했다. 그러하기에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은 마치 현재의 우리 사회가 다다른 좌표로 순항하는 도구 내지는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했다. 연상의 추상화가 반고경과 금과의 은밀한 사랑은 끝끝내 이루어 질 수없는 현실도 명분과 실리에 따라 움직이고 모이고 흩어지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대상만 바꾸었지 동일한 모습 그대로의 형국이다.




우린 지난 10년을 민주화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잃어버린 세월이라고도 한다. 양 극단의 이념체의 렌즈를 통해서 본다면 그 미립자는 분명 태양態樣을 바꾸는 변형체임은 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이념을 신봉하는 것은 자유의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 토양은 공정하지 못하다. 좌우를 나누는 경계선도 그렇고 이념을 인식하는 출발부터 불공정한 현실이다. 작중 금과 은이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만나 대립을 청산하고 각자의 이념을 찾아 가는 모습에서 나는 불공정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를 보았다.




제 아무리 은이 보수를 아우르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유주의를 주창할지라도, 또한 금이 잃어버린 진보의 균형을 바로 세우고 모두를 위한 이념으로 무장할지라도 현실은 터무니없이 텁텁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던적스럽고 비루하다고 말하는 김훈작가의 말처럼 현실과 이념 속에 우리가 가진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말 그대로 거추장스러운 일인지 모를 일이다.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느 쪽으로 치우침은 더 더욱 위험하다. 그렇지만 작가는 새로운 우파의 출현에 기댔다.




장정일 작가는 구월의 이틀이란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도 부단히 고민했다. 류시화님의 동명 시에서 그대로 따 온 제목이란다. 굳이 구월의 이틀을 시간의 개념 속에 가두어 둘 필요는 없겠으나 결핍된 현재를 향한 갈망의 흔적이다. 돌이켜 보면 젊음도 이념도 부질없는 인간의 행위와 몸부림에 다르지 않다. 헌데 구월의 이틀 속에 매몰된 우리의 현실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대안으로 역설스럽게도 영라이트(Young Right)의 출현을 반겼다.




세상의 이치가 양과 음을 나누듯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당연지사다. 읽어 내는 자에 따라 그 의미와 해석을 달리 하겠으나 조금은 아쉽다. 독재와 압권에 깨지고 넘어질지언정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고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세상이었음 했다. 난 붉은 것은 모두 빨갱이로 보던 무지몽매했던 그 수치심보다 현재의 방관자의 태도가 더 부끄럽다. 앞서 작가의 희망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현실을 바로보고 이상에만 빠지지 말라는 의미로 들린다. 무릇 조화란 균형과 견제를 통한 서로를 인정하고 소임을 다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뼈아픈 진통은 시간의 층위 속에 기억된 유전자적 기록처럼 끝없이 되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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