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쪽이 되지 않는 작은 책입니다.
2017년 출판된 책으로 재야사학자이신 이이화 선생께서 쓰셨습니다.

몇해전 돌아가셨으니 선생의 후기저작이고 연구서라기보다 입문서에 해당됩니다.

19세기 조선말부터 을사조약 당시까지 조선의 하층민들과 농민들이 지배 세력인 양반 유림 (儒林)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 일별할 수 있습니다.

정조사후 1800년대부터 집권한 문벌(門閥)세력, 다른 용어로 세도정치( 勢道政治)가문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그리고 고종이후 신흥 문벌인 여흥 민씨 세력들이 조선의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을 수탈해온 것이 민란 발생의 원인입니다.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은 생산을 하지 않고 군역도 지지 않는 양반층이 과중한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하층민들애게 부담시켰고 살기 힘든 이들이 봉기한 겁니다.

따라서 이들 세도정치가문들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데 직접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 문벌가문들이 국가의 부를 사사로이 독점하고, 국방의 의무를 지지않은 체 국가를 사유화한 농단(隴斷)을 일으킨 것이 조선 멸망의 직접적 원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소위 세도가 출신 명문가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명문가라고 치켜세우는 건 그래서 시대착오적입니다.

조선의 서북지역 차별은 이책의 초반부에서 설명되고 1812년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이후 발생하는 여러 농민봉기들과 동학농민전쟁의 출발점으로 거론됩니다.

홍경래난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하버드대 김선주 교수의 ‘조선 변방과 반란,1812년 홍경래난(푸른역사,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문벌이 기호지방과 영남지방 위주라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양반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출사의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황당한 사회가 바로 조선사회였습니다. 양반끼리도 적서(嫡庶)차별은 물론이고 지역(地域) 차별을 두는 마당에 농민이나 천민들 그리고 노비들이 얼마나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대한 조세의 부과가 너무 가혹하여 농민들과 하층민들이 먹고 살수가 없게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특히 현재 한반도 정세와 연계해 봤을 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자세한 복기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외세의 동향에 무지한 반면 아주 좁은 시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만을 탐해 나라를 나락으로 끌고 간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만을 심봉하고 화이론 (華夷論)의 덫에 걸려 구한말 청에게 주권침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그 수하인 원세개(袁世凱)는 조선이 전통적인 중국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노골적으로 유린했습니다.

유생들이 주장하던 화이론과 사대주의에 대한 역풍이 분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 것도 만국공법이 아시아에 적용되고 있었던 상황도 조선의 양반인 노론 지배층도 세도정치세력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는 청의 세력을 청일전쟁으로 물리쳤고, 19세기 내내 동진(東進)을 계속하며 해양세력인 영국과의 Great Game을 지속해 오던 러시아는 영국을 대신한 일본과 러일전쟁을 치룹니다.

이 두번의 전쟁을 이긴 후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정조이후 19세기 조선의 역사를 보면 도무지 노론 양반세력과 새도정치세력이 허울뿐인 명분말고 나라를 위해 한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털어 사리사욕을 채웠을 뿐입니다.

고종이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어 참담하기도 하지만 나름 없는 군사력과 터무니없는 외교력을 가지고 노력을 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한계가 있었지만 노력조차 안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외세지향적이었던 이유는 무력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고종은 러일전쟁 이전 일본이 두려워하던 러시아 세력에 의지를 해보려고도 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일제의 조선 침탈에 제동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 경인문화사,2012)’를 참조 바랍니다. 러시아측이 사료를 바탕으로 고종시기 조선의 정권과 이권을 둘러싼 친러파들과 친일파 그리고 각국의 동향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친일)개화파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정한 교정이 필요한데 이는 주로 일본측 사료에 의거한 상황 설명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부질없는 것이 조선은 군사력이 없는 국가였고 군사력이 없어서 고종은 러시아와 청에 군사력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이 판단이 상황을 그르치게 한 것입니다.

세도정치가들이 100년가까이 나라의 부를 다 해먹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나라와 다르게 지배계층이 국방의 의무도 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조선의 지배계층의 국정농단이 결국 조선의 마지막 100년간 농민과 하층계급의 저항을 불러와 ‘민란’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한말의 지사라고 알려진 황현(黃玹)이나 의병장으로 알려진 유인석(柳麟錫) 등 양반 유생들의 행동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가당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인석 의병장은 일본과 외세에 대항해 의병을 알으켰다는 분이 평민출신 의병장을 무시하고 깔보던 황당한 행동을 한 분입니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국에 양반이라고 같은 의병장을 평민이라고 무시하다니. 조선이라는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신분사회가 결국 사회전체의 역동성을 억눌렀고 이것이 결국엔 망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80년대 민중사관이 활개를 펴던 시기도 아니고 2021년에 ‘민란’에 대한 책을 읽어 무엇하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란이나 혁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되짚어 복기하는 것이 민란에 대한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과연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갈등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지나친 부의 편중과 박탈감이 200년 전처럼 하층민들을 자극하게 되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20년간 지속된 부의 편중이 사회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책도 그렇고 이전에 읽은 ‘홍경래의 난’에 대한 책도 그렇고 읽으면서 기시감 (déjà vu)을 느꼈습니다. 저만 이렇게 느낀 것인지 궁금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으로 결론 포함 총 5장으로 이루어진 학술서입니다.

연구에 해당하는 시기는 무신정권 붕괴이후 몽골이 고려의 국왕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하기 시작한 원종이후 공민왕 통치기까지입니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이후 고려의 정치사에 대한 책은 사실 처음 본 셈입니다.

이책의 핵심주장은 고려의 국왕 통치권이 몽골에 복속하고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국왕권의 위상이 복합적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전제주의 왕권국가에서 절대적이던 고려의 왕권이 약간 변용된 동아시아적 화이론 (華夷論)에 따라 몽골을 중국의 황제으로, 고려를 몽골의 한 제후(諸侯)국으로서 상정해 사대하고, 몽골은 몽골이 지배하던 다른 울루스 (ulus,칸국; 汗國)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대하면서 실질적으로 고려의 왕을 정하는데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게 됩니다.

고려의 신료들은 고려의 절대왕권이 몽골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자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변화한 정치환경과 구조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책봉(冊封)관계에 더해 유목민족 특유의 부족간의 결합 혹은 가문과의 결합이 중요해집니다.
외교적으로만 의미가 있고 내치에 관여하지 않는 일반적 책봉관계에서 몽골-고려의 책봉관계는 사실상 몽골이 고려의 국내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 책봉 관계로 변화합니다.

아마 한국의 역사에서 외부의 세력이 직접 국내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정권을 가졌던 시기는 이책에서 설명하는 고려의 몽골 복속기 그리고 19세기 고종 연간 청의 원세계(袁世凱)와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 (李鴻章)이 조선에 내정간섭을 한 시기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충열왕은 무신정권기 약화된 왕권이 몽골 복속이후 사실상 몽골황실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고 그 자신 몽골에서 숙위(宿衛)생활을 통해 몽골의 관습을 경험하고 몽골의 황제권에 기대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 몽골 황제이던 쿠빌라이 칸의 부마(駙馬)가 되기를 요청합니다.

이에 더해 충렬왕은 몽골이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몽골의 관청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승상(丞相)직을 겸임합니다. 고려의 왕이 고려 지역을 총괄하는 몽골관청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왕권을 몽골의 황제권력에 의지해 강화하다보니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몽골의 황제는 자신의 책봉권을 사용해 고려의 왕을 폐위시키고 복위시킵니다.

충렬왕 다음의 왕인 충선왕은 몽골황실 공주 출신 부인과의 불화로 몽골로부터 고려왕으로 책봉 받은 지 7개월만에 폐위를 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됩니다.
충선왕은 충렬왕 사망 이후 다시 복위되어 친몽골적인 통혼제도를 받아들인후 제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중조 (重祚)라고 하는데 두번째 왕위를 나아간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왕을 폐위시키고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몽골 황실의 힘을 체감한 고려의 신료들은 고려의 국왕권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간언(諫言)이외에 몽골황실에 직접 고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신료들은 유목국가애서 가문간의 통혼관계가 중요하다는 걸깨닫자 직접 몽골 황실에 줄을 대기 시작합니다.

고려의 왕실이 몽골 황실과의 통혼을 통해 권력을 얻었다면 신료들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이는 고려 국내정치에서 고려 왕실과 경쟁하는 집안들이 많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민왕 당시 몽골의 황후였던 고려 출신 기황후( 奇皇后)를 배출한 기씨집안이 고려 왕실인 왕씨 집안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떠오른 것도 몽골제국- 제후국간의 특수한 관계, 즉 가문사이의 관계에 기인한 것입니다.

몽골황실이 고려왕실의 후계자인 세자를 몽골에 인질로 잡고 사실상 후계를 정하고 고려의 왕들은 몽골에 상주하며 고려의 내정을 통치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합니다.

고려왕이 고려를 비운상태에서 중요한 정치관련 문제를 몽골 현지에서 전결하는 특유의 방식인데 국정운영에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려 공민왕과 기황후의 경우 사극을 통해 알려진 인물들인데 특히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기씨 출신으로 고려왕위를 이으려 했던 인물로 특히 고려 출신 몽골 황족이 미천한 신분으로 몽골 황위를 잇기 어렵다고 생각하자 자신들의 배경을 위해 고려왕위를 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민왕 당시가 중요한 이유는 몽골제국이 해체되어가고 명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몽골의 쇠퇴를 감지하고 실제 그렇게 양상이 전개되자 몽골황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며 기황후 일족인 기철(奇轍)을 왕권에 도전한 역모세력으로 처단했습니다.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공민왕은 신진세력인 명나라와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어 몽골복속기를 끝냅니다.

공민왕의 후사문제는 이후 조선왕조를 일으킨 신흥세력의 역모에 대한 한 원인이 됩니다.


소략하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에 기반한 책이기 때문에 딱딱하리란 선입견과 달리 술술 읽힙니다.

다만 같은 내용이 자주 반복되는 건 흠입니다.

사료의 경우도 전통적인 한문사료인 <고려사>,<고려사절요>,<원사> 뿐만 아니라 <몽골비사 >,<부족지>등 몽골, 이슬람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 내지는 대외저항을 강조하는 호국적 입장보다 당시 정치권의 권력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실제 무슨일이 일어났을지 검증해나가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에 관심을 가지다가 당시 한반도에 어떤 왕조가 있었나 매치하다 보면 고려를 만나게 됩니다.

몽골을 서술한 다른 역사서도 간략하게나마 고려에 대한 서술이 나오지만 몽골과 관련된 여러 국가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한번은 고려에 대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3세기 유럽인들의 몽골선교여행에 대한 기록으로 ‘몽골제국기행(까치, 2015)’를 소개합니다. 서구에 몽골을 소개한 대표적인 사료로 알려진 기록입니다.

시간순서로 따진다면 이책보다 이전세대의 이야기로 주로 몽골이 러시아와 폴란드 그리고 흑해지역과 서아시아로 확장하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시기적으로 몽골은 서쪽(유럽과 러시아)과 남쪽(남송)경략이 마무리 된 후 동쪽의 고려와 일본을 침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인정하기 싫지만 고려는 사실상 몽골제국의 속국으로 독립국가로 보이지 않습니다.

전제국가인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후계자를 자신의 뜻대로 정하지 못하는 건 사실 주권이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몽골과 오랜 항몽전쟁을 한 것으로 배웠는데 배운 것과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좀 충격입니다. 고려에 대한 대중 역사서가 좀더 많이 출판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애국’을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보수 사학계에서는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병탄(倂呑)까지는 아니어도 옛 소련처럼 하나의 정치연합체로 몽골과 고려가 100여년간 서로 얽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몽골관련 책에서 한문으로 표기된 명칭과 몽골 고유의 명칭을 병기해서 표시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1-09-23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해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1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원국 작가의 역작인 ‘춘추전국이야기’11권 중 첫번째 권을 완독했습니다.

워낙 잘 알려진 책이고 이책에 대해서는 작가가 직접 출연한 팟캐스트도 유튜브에 있으니 읽기 전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이 방대한 책을 읽는 한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제가 언론에서 읽은 공원국 작가의 글은 대체로 유목사회에 관련된 글이거나 북방지역에 관련된 글들이었는데, 이 책은 철저하게 서술을 ‘어떻게 중국의 중원(中原)지역에 국가가 성립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원지역은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중국인들은 화이론(華夷論)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지역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고대 중국은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중국문명이 생겨났고, 이후 끊임없이 침략을 해오는 북쪽과 서쪽의 오랑캐(융적,戎狄)와 남쪽의 오랑캐(남만,南蠻)를 막아 중국 고유의 역사를 지켜 중국이 만들었다는 철저히 중국 중심적(Sino-centric) 관점의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 (秦)나라도 서쪽에 살던 융족 (戎族)과 문화적 영향을 받고 융족과 전쟁을 하며 군사력을 키워서 중국을 통일했고, 춘추시대 당시만 해도 사실상 유묵민족인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는 역사적 시실을 보여줍니다. 저자에 따르면 진나라는 중국의 사서와 여러 문헌에 진융(秦戎)으로 불렸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설명을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최초의 중국통일 왕조가 오랑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춘추시대 당시 중원에 살던 중국인들의 인식입니다.

잘 알려진 남쪽의 초(楚)나라도 중원의 중국인들은 이질적인 민족으로 생각했습니다. 남쪽의 오랑캐로 생각했고 춘추시대의 예법이 통하지 않는 지역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동쪽지역에 살던 한국인의 조상은 그저 동쪽의 오랑캐일 뿐입니다.

다만 한반도뿐만 아니라 산동반도와 요동지역을 포괄하는 동북지역에 사는 이들을 지칭하지만 말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춘추시대가 시작되기 전 중국의 전설시대와 겹치는 초기국가들인 하상주 (夏商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특히 상(商)나라에 대한 서술이 인상적입니다. 제사를 위해 사람을 제물(祭物)로 삼는 관습이 있고 왕이 죽으면 노예와 여인들을 같이 매장하는 순장(殉葬)이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서쪽의 유목민족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내용으로 봐서 상나라가 제대로 체계를 갖춘 국가라기 보다는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호전적이고 군사력으로 운영되는 군국주의 국가 상나라는 무력 이외에 다른 통치수단이 없었으나 이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는 무력이외 종법 (宗法)에 의해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영지領地)를 내리는 봉건제를 통해 통치체계를 확립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중시해 인간을 희생으로 쓰는 제사관스블 폐지라고 통치원리로서 예법을 중시하는 전통이 주나라 이후 생겨났고, 중국의 사서는 주나라의 통치모델을 수천년간 이상향으로 지목해왔습니다.

주의 동천(東遷)이후 주나라의 제후국 통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는데도, 종법에 근거한 봉건적 전제정치제도는 지속되었습니다.

오랜기간 중국과 그 주변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관계, 중국의 천자가 주변의 제후를 인정하고 책봉( 冊封)을 해주고 제후국이 책봉국에 조공(朝貢)이 확립된 시기가 바로 춘추시대입니다.

엄밀하게 시작이 된 시기는 서주(西周)시대이지만 주나라의 동천이후에도 이 조공-책봉의 관계는 지속됩니다.


이러한 체제를 수호하는 첫번째 춘추시대의 패자(霸者)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과 그가 기용한 재상 관중(管仲)이 등장합니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관중의 경제정책, 정치/외교정책, 군사정책, 제환공의 군사정벌 그리고 춘추시대 초기 4강자 ( 齊, 楚, 晉, 秦)들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쩌면 세계최초의 경제학자로서 농업을 기반으로 상업과 국제무역에 대한 최초의 논설을 낸 관중의 정책에 대한 소개가흥미롭습나다.

스코틀랜드의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통상 알려졌지만 약 2000년 전인 청동기 시대에 아담 스미스보다 정교한 경제정책과 부국강병책의 체계를 세운 고대 중국의 재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습니다.

진한대에 중국이 세계최고의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권짜리 춘추전국시대 전체를 조망하는 대중역사서의 첫책이고 따라서 책은 전체 시리즈의 윤곽을 잡고 춘추시대 이전 시기도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지리에도 상당 부분 서술을 해서 수많은 낯선 이름과 지명에도 각 제후국들의 판세를 읽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역사를 읽는 데 지리의 중요성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2000년도 더 지난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데는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감되는 것 중 하나는 정치라는 것도 세력 다툼이라는 것도 주어진 자연환경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 역사를 이야기하는데도 중요한 물길인 황하(黃河), 장강(長江), 위수(渭水), 한수 (漢水), 회수(淮水)이 장벽으로서 또 물길로서의 역할이 설명됩니다.

역사를 인문학으로만 알고 있어 자연환경을 역할은 자주 간과되어 왔는데 적절하고 이후 진행되는 전개에도 필요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식으로 보면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고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춘추좌전>, <관자>,<논어>,<맹자>,<손자병법> 등을 적재적소에 인용하고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재구성합니다. 믿을 수 없는 자료나 후대에 가필된 자료들은 배제하고 가급적 사실에 근거한 사료를 인용했습니다.

사실 <춘추좌전>이라는 책을 언젠가 읽어보려 마음먹고 있었지만 기약을 할 수가 없어서 일단 입문서로 이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춘추시대와 관중이라는 인물이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국역사에 대해 상당히 내공이 있으신 분이 쓰신 글이고 생각보다 중국 역사에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목민족의 영향이 상당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고대 정주문명에 미친 유목민족의 영향은 알려지지 않아서 더 확인해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세기라는 시간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중세의 역사를 더구나 유목제국이었던 몽골제국(Mongol)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쉬운일이 아닐겁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김호동 교수님이 2015년 최초 한국어로 번역한 이 중세 수도사들의 몽골여행기는 형식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나 2021년 현재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책에는 생소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수도사들과 그리스정교 수도사들이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당시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같이 살며 몽골제국의 황제인 구육 칸에게 어떻게 복종하고 사는지 어떤 풍습을 지니고 사는지 자세하게 서술됩니다.

또한 서구유럽에서 선교를 위해 몽골에 온 이방인들이 몽솔인들과 서기를 통해 어떻게 서로다른 언어를 이해했는지의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라틴어가 생소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의사전달을 위해 몽골어의 라틴어 번역 뿐만 아니라 아랍어 또는 패르시아어 그리고 러시아어와 위구르어 등 여러 번역본을 서기로 하여금 적성하게 하고 아를 유럽에 전달했습니다.

꼼곰한 번역과정이 놀랍습니다.

몽골제국의 초기인 1260년대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내용을 서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당대의 역사기술 ( contemporary history)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몽골은 칭기스 칸이후 2대 우구데이 칸 그리고 3대 구육 칸이 러시아와 폴란드 등 동부 유럽지역을 침략하고 복속하고 있었던 시기이고,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치루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몽골은 동쪽으로 남송과 전쟁을 일으켰고, 고려를 복속시켜 제후국으로 만들었던 시기이면서, 고려를 동맹으로 끌어들여 일본을 침범하려 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사실상 두권의 몽골기행문이 합쳐진 책으로 첫번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인 플라노 드 카르피니라는 이탈리아인의 몽골기행이고 두번째가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의 루브룩 출신 수도사 윌리엄의 몽골기행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사신(使臣)은 아니었기에 이 기행이 사행기록(使行 記錄)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리를 몽골제국에 전하려 했다는 덤에서 일종의 선교여행으로 볼 수 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윌리엄) 과 교황 인노켄티우스4세( 카르피니) 를 대신해 그들의 서한을 몽골의 3대 대칸 구육 칸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같이 수행했습니다.

13세기 몽골의 기마병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서유럽 지배자들이 몽골과의 평화를 구하기 위해 대신 이들 수도사를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유목민족의 역사를 읽을 때 항상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장벽입니다.

대표적인 유목민족인 몽골의 경우만 봐도 몽골어와 중국어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면 이해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으로 국경분쟁과 교역 등으로 교류가 많았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마찬가지로 포용적인 종교정책과 교류로 서아시아의 이슬람과도 융합되어 상당한 사료들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이란어)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더해 몽골과 만주족( 여진족) 과도 오랜기간 밀접하게 지내 만주어로 된 기록도 존재할 것이라고 봅니다.

중세 유럽을 침략한 역사가 있어 몽골에 대한 기록은 유럽의 언어들 뿐만 아니라 중세의 상용 언어였던 라틴어로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책의 각주에도 같은 지역의 지명을 각국의 언어로 다양하게 불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특정 지역의 지명이 중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위구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에서 달리 불려져 지역을 비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잡함때문에 정주 농경사회와 전혀 다른 유목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인 것은 몽골의 경우 몽골을 몽골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한화(漢化)된 제국인 대원(大元)으로 이해하던 중국 중심적인 과거의 접근방식이 몽골을 그 고유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오랫동안 농경 정주문명( settled civilization)이 유목문명( nomadic civilization)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과연 농경정주분명이 더 진보된 문명인지에 대한 회의가 일고 그에 대한 비판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책도 유럽의 중세 수도사들이 쓴 글들이라 몽골인들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이 가감없이 드러납니다.

살고 경험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글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책의 영역본인 ‘Mission to Asia ( Univesity of Toronto Press,1980)’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김호동 교수는 이책을 저본으로 삼지 않으셨지만 현재 아마존에서는 위의 언급한 영역본이 그래도 가장 일반적으로 팔리는 책 같습니다.

몽골의 세계정복이후 몽골의 후대국가에 대한 책으로는 토론토대학의 이주엽 교수가 최근 출판한 ‘몽골제국의 후예들(책과함께,2020)’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방대한 내용이 축약적으로 들어가 있어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중앙아시아 전반에 대한 기행서도 입문시 유용한 데 저는 연호탁 교수님의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글항아리,2016)’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두꺼운 착이지만 컬러사진 도판과 지도가 상당히 잘 들어가 있고 2016년 시점에서 각각 방문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이 유목문명/ 이슬람 문명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목지역 중 특히 연해주 환동해 지역과 북극권 그리고 만주지역과 일본의 동해안 지역 홋카이도와 사할린 등 지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정짓는다면 훌륭한 레퍼런스로 주강현 교수님의 ‘환동해문명사( 돌베개 ,2015)’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찮게 생각하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오히려 조직적으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야민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시베리아 툰드라 벌판과 연해주 극동지역 그리고 여전히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주 요동지역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식하게 미국과 일본 위주로만 한국을 둘러싼 상황을 판간하는 건 따라서 위험이 너무 큰 도박으로 생각합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가 전체주의 국가이고 민주주의를 탄압한다고 ‘낙인’을 찍은 건 서유럽과 미국 등 영미권 국가들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단순하게 봐서 영미권에서 전쟁에 관련 책들이 많다는 건 이들이 그만큼 수많은 전쟁과 연관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들이 비유럽지역을 가장 많이 수탈한 국가들입니다. 영국과 미국때문에 중동지역이 화약고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공인된 정설입니다. 러시아가 동진을 계속해 연해주까지 온 것은 영국이 계속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막아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본인들만 문명국가인척 하는 건 대단히 위선적입니다.

특히 중국의 영향력이 날로 확장되는 최근 미국의 지식인층의 중국혐오( yellow peril)는 도를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미국이 전략 상품으로 생각하는 반도체 생산이 아시아지역 ( 특히 대만과 한국)에 몰려있어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놓기도 합니다.

한 수 아래라고 반도체 생산을 중국과 아시아 지역에 맡겨 놓았다가 뒤늦게 후회를 하는 중입니다.
그나마 영미권 지식인층은 아니 혐오하지만 일반인들은 바깥세계에 관심이 아예 없습니다.

아무튼 상황이 어떠하든 중국인들은 그냥 그들의 길을 갈 것이고 그러면 미국은 더 한 혐오발언울 내놓을 것입니다.

당장 스탠포드 후버연구소( the Hoover Institute)유투브를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확인이 됩니다.

한국인들이 여기 부화뇌동 (附和雷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1-09-14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감사합니다. 13-14세기 유라시아사에 관심이 있던 차였습니다. 김호동 교수의 역작들도 좀 더 접하고 싶어지네요. 마르코폴로 여행기가 감옥에서 구술한 내용이라 정확한 내용도 있지만 기억에 의존하는 만큼 온전히 믿기는 어려운 점이 아쉬웠어요. 수도사들의 기록은 좀 더 신뢰감이 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제게 아직은 어려워서 읽다가 미루어둔 책이네요 ㅜㅜ

Dennis Kim 2021-09-14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작은 책이지만 내용이 밀도가 있고 저자께서 강의록을 출판하신것이라고 하시니 다른 입문서를 먼저 보시고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속학자이자 해양사 전문이신 주강현 교수의 역작을 소개드립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환동해 연구시리즈 1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본문만 711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입니다.
이책에 실려있는 각주의 문헌들이 추가적 정보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완독 시도를 여러번 했으나 오늘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책의 세부내용을 전하기 앞서 총평을 하자면 지역의 해역교류사와 제국주의의 원주민 침탈사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환동해를 둘러싼 역사를 조망한 책으로 충분히 이분야에 대해 더 연구를 하거나 더 깊이 있는 독서를 원하신다면 두고 읽을 기본 참고서(reference)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그동안 별 주목을 받지 않아 온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의 연해주 점령, 연해주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 간의 세력 다툼, 러시아와 일본이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 쿠릴열도의 영유권과 어장을 가지고 어떻게 이권다툼을 벌였는지 보여줍니다.

북극권에 영토가 몰려있는 러시아에게 부동항 확보는 후발제국인 러시아로서 사횔이 걸린 문제였고, 19세기 중반 크림반도를 면한 흑해(black sea) 를 통해 해양에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시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의 저지로 무산된 이후 (크림전쟁, Crimean War1853-1856) 이후 러시아는 재차 부동항을 얻기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진을 계속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마침내 항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남진을 시도합니다.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인 태국 말레이반도 싱가폴 홍콩을 통해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은 일본과 협력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합니다.

그 사건이 한국 근대사에서는 ‘거문도 사건 (1885)’으로 알려진 사건입니다. 대한해협에서 환동해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거문도를 영국 해군이 불법적으로 2년 동안이나 점령하고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철수한 사건입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Trans -Siberian railway )을 건설해서 시베리아의 영토와 자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당시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그리고 몽골지역의 원주민들을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고 러시아 문자를 쓰게 하는 등 소위 ‘문명화 ‘전략을 시도합니다.

또한 환동해 주변의 연해주 지역과 환동해 주변에 나타난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미국의 상인들은 고래 바다사자 수달 등 돈이 될만한 야생동물들을 마구 남획해 상당수의 생물들이 멸종했고 더불어 캄차카 반도애 살던 이텔멘족이 멸종합니다.

일본은 막부시대 이미 북방의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살던 아니누족의 문화를 파괴하고 이들을 일본화 시킨 뒤 복속시켰습니다. 아이누족은 일본민족보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과 혈연적 연관성이 있는 이들이지만 후발 제국 일본의 ‘문명화’과정을 거치며 정체성이 해체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만들어진 일본 정체성’을 무기로 사할린과 쿠릴열도애 대해 일본의 영유권을 러시아에게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 가까운 일본의 시마네현 (島根県)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일제시기 독도애서 강치를 남획해 멸종시킨 것도 환동해를 둘러싼 교류의 맥락을 짚어야 이들 주장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련된 내용은 저자의 ‘독도강치멸종사(서해문집,2016)’를 보시면 됩니다. 이책에서 설명된 독도강치잡이 부분과 상당부분 내용이 겹칩니다.

일본의 문호개방의 시작이 된 미국 동인도 함대의 페리제독의 개항요구 (1853)는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같은 시기 러시아도 일본에 같은 요구를 했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853년 러시아의 해군증장 푸타틴이 팔라다호와 4척의 군함을 가지고 내항해 일본과 통상협정을 맺었습니다.

푸타틴은 같은 함대로 1884년 조선 근해에 나타나고 거문고와 동해안 일대를 관측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와 조선은 수교상테도 아니었고 이 와중에 세도정치로 인한 압박을 피해 백성들이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국경에 대한 합의도 이루지 못하던 답답한 상태가 이어지고 두만강이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일방적으로 국경으로 결정됩니다.

국내에 관련서가 전혀 없는 것 같은 분야 중 하나가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와중에 연합국 ( 미국 영국 프랑스) 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역사입니다.

일본이 막부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에 대만( 臺灣), 류큐( 琉球) 즉 현재의 오키나와(沖繩)를 복속하고 이후 어이누족을 몰아내고 에조치(蝦夷地) 즉 현재의 홋카이도(北海道)를 복속시킵니다.

조선반도 침략은 그 다음입니다. 러일전쟁이후 영국과 미국의 묵인 아래 조선반도 침략을 단행해 한일합병(1910)을 이루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꿈꾸던 대륙진출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을 세웁니다.

아마 여기까지는 많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일본이 괴뢰국으로 세웠던 만주국 출신 엘리트들이 1945년 일본 패망이후 한국 현대정치사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이를 고찰한 연구서도 꽤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발전주의적 국가모델에 만주군 관동군 출신 인사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이들이 한국사회에 행한 정책들이 만주국애서 일제가 행한 정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한석정, 만주모던 ( 문학과지성사, 2016)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내전 (1917-1922) 시기에 연합군 ( 영국 미국 프랑스)와 함께 군대를 보내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혁명 세력인 러시아 백군과 연합해 러시아 혁명군( 적군)과 전투를 벌였고 더구나 만주국과 같은 괴뢰국을 시베리아에도 세우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저도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이미 전문가들은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고 제가 이분야를 잘 몰라서 그럴 수 있지만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애서 일본이 패전하고 미국의 사실상의 기지국가가 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 승전국으로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 이외에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말로 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서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국가들은 보수적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쉐비키들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기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이 당시 1950년대 이후 벌어질 극단적 냉전(the Cold War) 의 기원이 싹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시베리아 출병 역시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보입니다. 유튜브애서 미국의 전쟁사 교수가 이 주제에 대해 강연을 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관련서가 영어로는 존재합니다 ( Wolfhounds and Polar Bears, University of Alabama Press,2019)

확실한 것은 1910년대 영국과 미국은 당시 조선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해양세력으로서 일본과 동아시아에서의 이권을 나누고 이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당시 태평양으로 팽창을 하던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승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얻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미국의 루즈벨트는 철저한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해 포츠머츠 조약(1905)를 성사시켰습니다.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국제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냉정합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권에 따라 행동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전략적 동맹관계라고 해도 이들이 한국을 시혜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특히 한국은 주한미군에 대해 돈계산 철저히 하고 각처에 있는 미군부대 정화비용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미국의 이익이 한반도에 있는 한 미군은 철수 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이 초기 인류학이 발달하던 19세기 말 , 20 세기 초 ‘원시사회’의 대상으로 관찰되었고, 소위 문명국의 박람회에서 ‘희귀한 볼거리’로서 전시되었던 불편한 역사가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문명인으로 스스로 생걱했던 일본인들도 애조치의 아이누족을 전시하는 작태를 서구인들과 똑같이 행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서구 백인종들이 더 우월하다는 인식은 아직도 우리 무의식에 남아 있어 한국에 정착한 백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에게 차별행위로 일어납니다.

항상 의식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