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쪽이 되지 않는 작은 책입니다.
2017년 출판된 책으로 재야사학자이신 이이화 선생께서 쓰셨습니다.

몇해전 돌아가셨으니 선생의 후기저작이고 연구서라기보다 입문서에 해당됩니다.

19세기 조선말부터 을사조약 당시까지 조선의 하층민들과 농민들이 지배 세력인 양반 유림 (儒林)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 일별할 수 있습니다.

정조사후 1800년대부터 집권한 문벌(門閥)세력, 다른 용어로 세도정치( 勢道政治)가문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그리고 고종이후 신흥 문벌인 여흥 민씨 세력들이 조선의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을 수탈해온 것이 민란 발생의 원인입니다.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은 생산을 하지 않고 군역도 지지 않는 양반층이 과중한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하층민들애게 부담시켰고 살기 힘든 이들이 봉기한 겁니다.

따라서 이들 세도정치가문들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데 직접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 문벌가문들이 국가의 부를 사사로이 독점하고, 국방의 의무를 지지않은 체 국가를 사유화한 농단(隴斷)을 일으킨 것이 조선 멸망의 직접적 원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소위 세도가 출신 명문가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명문가라고 치켜세우는 건 그래서 시대착오적입니다.

조선의 서북지역 차별은 이책의 초반부에서 설명되고 1812년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이후 발생하는 여러 농민봉기들과 동학농민전쟁의 출발점으로 거론됩니다.

홍경래난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하버드대 김선주 교수의 ‘조선 변방과 반란,1812년 홍경래난(푸른역사,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문벌이 기호지방과 영남지방 위주라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양반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출사의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황당한 사회가 바로 조선사회였습니다. 양반끼리도 적서(嫡庶)차별은 물론이고 지역(地域) 차별을 두는 마당에 농민이나 천민들 그리고 노비들이 얼마나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대한 조세의 부과가 너무 가혹하여 농민들과 하층민들이 먹고 살수가 없게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특히 현재 한반도 정세와 연계해 봤을 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자세한 복기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외세의 동향에 무지한 반면 아주 좁은 시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만을 탐해 나라를 나락으로 끌고 간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만을 심봉하고 화이론 (華夷論)의 덫에 걸려 구한말 청에게 주권침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그 수하인 원세개(袁世凱)는 조선이 전통적인 중국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노골적으로 유린했습니다.

유생들이 주장하던 화이론과 사대주의에 대한 역풍이 분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 것도 만국공법이 아시아에 적용되고 있었던 상황도 조선의 양반인 노론 지배층도 세도정치세력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는 청의 세력을 청일전쟁으로 물리쳤고, 19세기 내내 동진(東進)을 계속하며 해양세력인 영국과의 Great Game을 지속해 오던 러시아는 영국을 대신한 일본과 러일전쟁을 치룹니다.

이 두번의 전쟁을 이긴 후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정조이후 19세기 조선의 역사를 보면 도무지 노론 양반세력과 새도정치세력이 허울뿐인 명분말고 나라를 위해 한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털어 사리사욕을 채웠을 뿐입니다.

고종이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어 참담하기도 하지만 나름 없는 군사력과 터무니없는 외교력을 가지고 노력을 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한계가 있었지만 노력조차 안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외세지향적이었던 이유는 무력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고종은 러일전쟁 이전 일본이 두려워하던 러시아 세력에 의지를 해보려고도 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일제의 조선 침탈에 제동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 경인문화사,2012)’를 참조 바랍니다. 러시아측이 사료를 바탕으로 고종시기 조선의 정권과 이권을 둘러싼 친러파들과 친일파 그리고 각국의 동향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친일)개화파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정한 교정이 필요한데 이는 주로 일본측 사료에 의거한 상황 설명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부질없는 것이 조선은 군사력이 없는 국가였고 군사력이 없어서 고종은 러시아와 청에 군사력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이 판단이 상황을 그르치게 한 것입니다.

세도정치가들이 100년가까이 나라의 부를 다 해먹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나라와 다르게 지배계층이 국방의 의무도 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조선의 지배계층의 국정농단이 결국 조선의 마지막 100년간 농민과 하층계급의 저항을 불러와 ‘민란’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한말의 지사라고 알려진 황현(黃玹)이나 의병장으로 알려진 유인석(柳麟錫) 등 양반 유생들의 행동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가당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인석 의병장은 일본과 외세에 대항해 의병을 알으켰다는 분이 평민출신 의병장을 무시하고 깔보던 황당한 행동을 한 분입니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국에 양반이라고 같은 의병장을 평민이라고 무시하다니. 조선이라는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신분사회가 결국 사회전체의 역동성을 억눌렀고 이것이 결국엔 망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80년대 민중사관이 활개를 펴던 시기도 아니고 2021년에 ‘민란’에 대한 책을 읽어 무엇하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란이나 혁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되짚어 복기하는 것이 민란에 대한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과연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갈등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지나친 부의 편중과 박탈감이 200년 전처럼 하층민들을 자극하게 되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20년간 지속된 부의 편중이 사회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책도 그렇고 이전에 읽은 ‘홍경래의 난’에 대한 책도 그렇고 읽으면서 기시감 (déjà vu)을 느꼈습니다. 저만 이렇게 느낀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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