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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ㅣ 춘추전국이야기 2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태항산 (太行山) 에 자리잡은 산악극가 진(晉)이 관중의 제(齊)나라에 이어 어떻게 두번째로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는지를 설명한 책입니다.
1편과 마찬가지로 춘추시대의 배경이 되는 자연지리의 영향력과 고대 중국의 전쟁과 정치의 변화양상을 추적합니다.
어려운 중국역사서와 여러 경서를 인용하는 점도 1권과 동일합니다.
제환공(齊桓公)과 관중(管仲)의 정치와 진문공(晉文公) 정치의 차이는 진문공이 첫번째 패자보다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의 면모가 강해 경제적 이득과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관중은 준비가 되지 않고 명분이 없으면 절대 전쟁을 하지 않았고 패권을 잡는 목적이 침략이 아니라 영향력 확대였습니다.
하지만 진문공은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진나라의 경제적 역량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중원(中原)에 진출해 비옥한 농토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성안의 국인(國人)으로 한정되던 전쟁 참여인원도 당시 태항산 근처에 중국인들과 섞여 살던 융(戎)인의 참여로 양상이 변해갔고 점차 도성 밖의 야인(野人)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쪽으로 바뀌어 갑니다.
야인(농부)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던 양상이 점점 전쟁이 격화되어 전쟁참여의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진헌공(晉獻公)사후 19년간이니 외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던 중이(重耳)는 초(楚)나라를 거쳐 관중평원을 장악한 서쪽의 맹주 진(秦)나라의 진목공(秦穆公)의 도움으로 진나라의 통치자가 됩니다.
아직 무지막지한 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이라 무자비한 살육은 없었지만 진문공은 초기 군국주의적 절대군주로서 신하들에 대한 신상필벌 (信賞必罰)에 무척 엄격한 면모를 보입니다.
또 자신이 오랜 망명생활과 고난을 겪어 인재의 중요함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통치자입니다.
자신의 모자람과 부적합으로 끊임없이 반성하는 동시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졌든 상관없이 등용했습니다.
첫번째 춘추의 패자인 제환공이 전적으로 관중의 정치에 의존해 국가를 통치했다면 진문공은 훌륭한 인재들의 인력풀을 가지고 적절하게 리더쉽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중국에서 전통적인 전제주의적 봉건적 정치체제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항산에 자리잡은 진(晉)은 서쪽의 진(秦)과 연합하여 남쪽의 강자인 초(楚)의 중원진출을 저지합니다.
초나라는 진문공 이전부터 중원으로 세력을 넓히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만 춘추 초기 진진초제 (秦 晉 楚 齊 ) 4국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후 더이상 북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와 서쪽의 진과 동쪽의 진이 맞서 싸운 이 전투를 성복대전(城濮大戰)이라고 합니다.
진문공은 이 전투 이후 중국 남부의 강자 초나라를 제압하고 서쪽의 진나라와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중원을 장악하는 패권국이 된 것입니다.
서쪽의 진과 동쪽의 진은 동쪽의 진이 춘추의 패권을 잡은 이후 다시한번 전투를 벌입니다.
진문공 사후 진목공(秦穆公)은 중국의 서쪽의 관중평원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원을 향해 동진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관중평원 동쪽 끝에서 진(晉)과 일전을 벌이고 패하게 됩니다. 효산(殽山)에서 맞붙은 두나라는 진(秦)의 대패로 끝나고 진나라 병사들은 이 전투에서 거의 몰살을 당했습니다.
적을 섬멸시키는 목적의 전투로 중국사에 최초로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책에 공감되는 문장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의 절반은 사실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의 이면을 들추다 보면 고대사를 결정하는 요인, 심지어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까지 볼 수 있다.” (제15장 문공이 패자의 길을 보이다,p251)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역사를 읽게 되면 필연적으로 정치를 만나게 되고 정치는 필연적으로 전쟁과 연결됩니다.
국제관계도 국내정치도 모두 먹고 사는 것과 관계되고 리더가 사회를 또는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와 관계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었던 고대에는 전쟁에 대한 기술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경우 전쟁의 역사가 곧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서주(西周)시대 이후 정립되어 주나라의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들의 관계를 말하는 사대(事大)-책봉(冊封)관계는 춘추전국시대와 중국의 통일왕조시대를 거치며 조선과 일본 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관계의 기본을 이룬 것입니다.
근세이후 조선이 제후국으로 중국에 사대하고 중국은 화이론(華夷論)애 입각해 본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외교관계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19세기 제국주의 서양열강들이 동아시아에 조약체계를 강요하기 전까지 중국문화권은 천자-제후를 중심으로 하는 고유의 외교관계를 이어왔고, 중국이 유목제국인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서도 이 체제는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춘추 초기 중원의 중국인들은 정주농경과 유목을 병행했던 서북쪽의 융(戎), 그리고 북쪽의 적(狄)과 상당한 교류와 함께 전쟁도 있었고 춘추의 또다른 강자 진(秦)은 춘추이전 시대 사실상 서쪽의 융의 한일파로 알려졌다는 점입니다. 진은 중국의 사서에 진융(秦戎)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秦)이 오랜기간 서쪽의 유목민족들과 전쟁으로 단련되어 춘추의 패자를 노리고 결국 그들의 군사력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된것이 중국사에 끼친 유목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랑캐라고 멸시를 받아왔고 이들의 흔적을 찿기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지만 문화가 없다고 그냥 무시하는 건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漢)이 통일 왕조를 이루었을 당시 북쪽의 흉노(匈奴)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기마궁수이자 유목민족인 흉노와 위에서 언급한 진(秦)나라 주변에 살던 서융 (西戎)의 무리들은 동일한 종족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기록을 보면 오해할 소지가 상당하기 때문에 저자가 갈조했고 더구나 융(戎)과 적(狄)이라는 말이 특정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합니다.
고대의 유목민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아 오해를 줄이는 것이 역사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아무튼 책이 기원전 7세기를 이야기하고 있고 아직도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21세기 한국에서 이책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마치 무협지를 읽는 듯 하면서도 철저히 사서의 기록과 다른 기록들을 모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하는 건 분명 보통의 내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책 시리즈를 다 읽으면 이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춘추좌전>,<사기>,<국어> 등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