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발간 당시 이전의 전통적 시각과는 다른 접근법 (approach)로 주목을 받았던 책입니다.

1980년대에 출생한 저자들이 한국은 더이상 선진국을 롤모델로 발전을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지난 60여년의 경제발전 전략과 지난 40여년 간 축적된 민주화 경험으로 신흥 선진국으로 들어섰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일본의 설비와 기술을 들여오고 미국의 원조와 정책조언을 받고 시작한 산업화와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시작한 민주화운동이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1997년 김대중 정권의 시작으로 정치적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산업화 세력’과 196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이 사실상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이책은 ‘586세대’를 현재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고착시킨 세대로 인식하고 이들이 권력을 장기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한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를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책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가 서로 반목하고 서로의 공울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양국화된 양당정치가 고착되어 이 두 세대 이후 후속세대들이 목소리를 낼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진단합니다.

이책의 p85-86에는 출생연도별 인구통계가 나와 있는데 산업화세대 인수가 약 15백만, 베이비부머 약 9백만, 민주화 세대 중 대졸자가 약 7백만, X세대 9백만, N세대(1980년대생)약 7백 2십만, 그리고 민주화 2세대 (1990년대생). 6백 8십만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업화세대의 경우 이미 은퇴를 했고 생물학적 사망 등으로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퇴장하였는데도 다른 젊은 세대들보다 인구수에서 압도적입니다.

반면 지난 1970년대 이후 지속된 가족계획정책의 영향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1990년대 생의 경우 7백만이 체 되지 않을정도입니다.

1990년대까지 가족계획정책을 너무 오래 지속해서 현재와 같은 고령화된 인구구조를 한국사회가 가지게 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선망국’으로 보는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의 주장( 선망국의 시간, 사이행성,2018)에서 빌어온 7장은 한국 제조업의 자동화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자동화와 AI의 위험에 현재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이유는 ‘선망’, 즉 미리 망한다는 의미인데 풀면’한국이 매를 먼저 맞았다’는 의미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1987년이후 대기업의 자동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미 공장들이 자동화 될만큼 다 되어 위험이 적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한국의 정규직 노조들과 대기업간의 ‘적대적 노사관계’가 원인이라고 하는데 기업가들이 전투적 노조들과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일찍부터 자동화 투자를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소위 기득권으로 불리는 이들 정규직 노조원들이 정년퇴직으로 퇴사할 시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장의 아쉬운 점은 회사측의 정규직 노조 대응전략을 주로 다루었지만 상대적으로 기업가들과 전문경영자들의 생산성에 대해 언급을 전혀 안한 점입니다. 결정권자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이론적으로 최종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이니 리스크가 큰걸로 봐서 고액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차이가 약 100배정도나 되는 건 맞는 것인지, 그게 공정한 것인지 말입니다.

이책에서 기득권으로 지칭되는 정규직 노조원들은 잔업수당까지 포함해서 연봉 1억정도 받는 이들을 말하는데, 최고경영자들 중에 최소 이들 연봉의 10배 이상을 받고 삼성의 경우 이보다 연봉이 더 클것으로 보이는데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아 의아했습니다.

다음 관심을 끈 주장은 9장 ‘기적의 재구성’입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소수의 독재자와 엘리트들의 공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한국의 우파에서 이승만을 국부로 박정희를 한국을 빈곤에서 탈출시킨 위인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실시했던 경제개발정책과 도시화 정책은 그가 1930-40년대 만주국에서 보고 체험한 정책을 한국에서 그대로 다시 진행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급속한 근대화의 기원이 만주국이라는 주장으로 한석정교구의 ‘만주모던(문학과지성사,2016)’에 상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 시장주의적 경제정책을 주도한 김재익 논쟁을 언급하면서 1997년 IMF사태이후 주류가 된 줄 알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원이 사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서 실시한 ‘경제안정화 정책’이라는 몰랐던 사실을 소환합니다.

1979년 10.26이후의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 대처와 ‘안정화정책’은 전 국무총리 신현확의 회고록에도 일부 언급됩니다.

IMF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씨가 당시 김재익씨와 시장주의 경제를 추진하던 신흥관료였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가 주장한 ‘벼농사협업체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집단주의, 협업속의 경쟁, 비교와 질시의 문화의 요소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한 훌륭한 설명방식이 될 수 있다고 긍정합니다.

전근대 한국의 사회가 소농위주로 만들어진 사회였고 꼭 해양세력( 일본과 미국)의 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내재적인 경제발전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뉴라이트와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한국이 열등한 비문명국이라는 믿음을 기본전제로 하고 미국과 일본 등 해양의 서구세력들만이 ‘문명’이라고 본 자학적 사관과는 정반대의 주장인데 아직도 이런 서구중심적 생각을 하고 계신 소위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데 놀랐습니다.
여러모로 이승만학당의 이영훈 교수와 그 학파들이 초심을 잃고 망상적 주장을 하는 건 안타깝습니다.

이 벼농사협업체계에 대해 얼마전 이철승 교수께서 신간(쌀,재난,국가,문학과지성사, 2021)을 내셨는데 읽어볼 후 리뷰를 남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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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10-05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정희와 만주국 관련으로는, 강상중의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라는 책도 읽아볼 만합니다

Dennis Kim 2021-10-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소개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되면 읽어보겠습니다.
 
춘추전국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2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태항산 (太行山) 에 자리잡은 산악극가 진(晉)이 관중의 제(齊)나라에 이어 어떻게 두번째로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는지를 설명한 책입니다.

1편과 마찬가지로 춘추시대의 배경이 되는 자연지리의 영향력과 고대 중국의 전쟁과 정치의 변화양상을 추적합니다.

어려운 중국역사서와 여러 경서를 인용하는 점도 1권과 동일합니다.

제환공(齊桓公)과 관중(管仲)의 정치와 진문공(晉文公) 정치의 차이는 진문공이 첫번째 패자보다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의 면모가 강해 경제적 이득과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관중은 준비가 되지 않고 명분이 없으면 절대 전쟁을 하지 않았고 패권을 잡는 목적이 침략이 아니라 영향력 확대였습니다.

하지만 진문공은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진나라의 경제적 역량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중원(中原)에 진출해 비옥한 농토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성안의 국인(國人)으로 한정되던 전쟁 참여인원도 당시 태항산 근처에 중국인들과 섞여 살던 융(戎)인의 참여로 양상이 변해갔고 점차 도성 밖의 야인(野人)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쪽으로 바뀌어 갑니다.

야인(농부)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던 양상이 점점 전쟁이 격화되어 전쟁참여의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진헌공(晉獻公)사후 19년간이니 외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던 중이(重耳)는 초(楚)나라를 거쳐 관중평원을 장악한 서쪽의 맹주 진(秦)나라의 진목공(秦穆公)의 도움으로 진나라의 통치자가 됩니다.

아직 무지막지한 전국시대가 도래하기 전이라 무자비한 살육은 없었지만 진문공은 초기 군국주의적 절대군주로서 신하들에 대한 신상필벌 (信賞必罰)에 무척 엄격한 면모를 보입니다.

또 자신이 오랜 망명생활과 고난을 겪어 인재의 중요함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통치자입니다.

자신의 모자람과 부적합으로 끊임없이 반성하는 동시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졌든 상관없이 등용했습니다.

첫번째 춘추의 패자인 제환공이 전적으로 관중의 정치에 의존해 국가를 통치했다면 진문공은 훌륭한 인재들의 인력풀을 가지고 적절하게 리더쉽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중국에서 전통적인 전제주의적 봉건적 정치체제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항산에 자리잡은 진(晉)은 서쪽의 진(秦)과 연합하여 남쪽의 강자인 초(楚)의 중원진출을 저지합니다.
초나라는 진문공 이전부터 중원으로 세력을 넓히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만 춘추 초기 진진초제 (秦 晉 楚 齊 ) 4국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후 더이상 북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와 서쪽의 진과 동쪽의 진이 맞서 싸운 이 전투를 성복대전(城濮大戰)이라고 합니다.

진문공은 이 전투 이후 중국 남부의 강자 초나라를 제압하고 서쪽의 진나라와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중원을 장악하는 패권국이 된 것입니다.

서쪽의 진과 동쪽의 진은 동쪽의 진이 춘추의 패권을 잡은 이후 다시한번 전투를 벌입니다.

진문공 사후 진목공(秦穆公)은 중국의 서쪽의 관중평원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원을 향해 동진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관중평원 동쪽 끝에서 진(晉)과 일전을 벌이고 패하게 됩니다. 효산(殽山)에서 맞붙은 두나라는 진(秦)의 대패로 끝나고 진나라 병사들은 이 전투에서 거의 몰살을 당했습니다.
적을 섬멸시키는 목적의 전투로 중국사에 최초로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책에 공감되는 문장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의 절반은 사실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의 이면을 들추다 보면 고대사를 결정하는 요인, 심지어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까지 볼 수 있다.” (제15장 문공이 패자의 길을 보이다,p251)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역사를 읽게 되면 필연적으로 정치를 만나게 되고 정치는 필연적으로 전쟁과 연결됩니다.

국제관계도 국내정치도 모두 먹고 사는 것과 관계되고 리더가 사회를 또는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와 관계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었던 고대에는 전쟁에 대한 기술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경우 전쟁의 역사가 곧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서주(西周)시대 이후 정립되어 주나라의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들의 관계를 말하는 사대(事大)-책봉(冊封)관계는 춘추전국시대와 중국의 통일왕조시대를 거치며 조선과 일본 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관계의 기본을 이룬 것입니다.

근세이후 조선이 제후국으로 중국에 사대하고 중국은 화이론(華夷論)애 입각해 본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외교관계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19세기 제국주의 서양열강들이 동아시아에 조약체계를 강요하기 전까지 중국문화권은 천자-제후를 중심으로 하는 고유의 외교관계를 이어왔고, 중국이 유목제국인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서도 이 체제는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춘추 초기 중원의 중국인들은 정주농경과 유목을 병행했던 서북쪽의 융(戎), 그리고 북쪽의 적(狄)과 상당한 교류와 함께 전쟁도 있었고 춘추의 또다른 강자 진(秦)은 춘추이전 시대 사실상 서쪽의 융의 한일파로 알려졌다는 점입니다. 진은 중국의 사서에 진융(秦戎)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秦)이 오랜기간 서쪽의 유목민족들과 전쟁으로 단련되어 춘추의 패자를 노리고 결국 그들의 군사력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된것이 중국사에 끼친 유목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랑캐라고 멸시를 받아왔고 이들의 흔적을 찿기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지만 문화가 없다고 그냥 무시하는 건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漢)이 통일 왕조를 이루었을 당시 북쪽의 흉노(匈奴)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기마궁수이자 유목민족인 흉노와 위에서 언급한 진(秦)나라 주변에 살던 서융 (西戎)의 무리들은 동일한 종족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기록을 보면 오해할 소지가 상당하기 때문에 저자가 갈조했고 더구나 융(戎)과 적(狄)이라는 말이 특정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합니다.

고대의 유목민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아 오해를 줄이는 것이 역사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아무튼 책이 기원전 7세기를 이야기하고 있고 아직도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21세기 한국에서 이책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마치 무협지를 읽는 듯 하면서도 철저히 사서의 기록과 다른 기록들을 모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하는 건 분명 보통의 내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책 시리즈를 다 읽으면 이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춘추좌전>,<사기>,<국어> 등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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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쪽이 되지 않는 작은 책입니다.
2017년 출판된 책으로 재야사학자이신 이이화 선생께서 쓰셨습니다.

몇해전 돌아가셨으니 선생의 후기저작이고 연구서라기보다 입문서에 해당됩니다.

19세기 조선말부터 을사조약 당시까지 조선의 하층민들과 농민들이 지배 세력인 양반 유림 (儒林)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 일별할 수 있습니다.

정조사후 1800년대부터 집권한 문벌(門閥)세력, 다른 용어로 세도정치( 勢道政治)가문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그리고 고종이후 신흥 문벌인 여흥 민씨 세력들이 조선의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을 수탈해온 것이 민란 발생의 원인입니다.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은 생산을 하지 않고 군역도 지지 않는 양반층이 과중한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하층민들애게 부담시켰고 살기 힘든 이들이 봉기한 겁니다.

따라서 이들 세도정치가문들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데 직접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 문벌가문들이 국가의 부를 사사로이 독점하고, 국방의 의무를 지지않은 체 국가를 사유화한 농단(隴斷)을 일으킨 것이 조선 멸망의 직접적 원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소위 세도가 출신 명문가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 명문가라고 치켜세우는 건 그래서 시대착오적입니다.

조선의 서북지역 차별은 이책의 초반부에서 설명되고 1812년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이후 발생하는 여러 농민봉기들과 동학농민전쟁의 출발점으로 거론됩니다.

홍경래난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하버드대 김선주 교수의 ‘조선 변방과 반란,1812년 홍경래난(푸른역사,2020)’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문벌이 기호지방과 영남지방 위주라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양반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출사의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황당한 사회가 바로 조선사회였습니다. 양반끼리도 적서(嫡庶)차별은 물론이고 지역(地域) 차별을 두는 마당에 농민이나 천민들 그리고 노비들이 얼마나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대한 조세의 부과가 너무 가혹하여 농민들과 하층민들이 먹고 살수가 없게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특히 현재 한반도 정세와 연계해 봤을 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자세한 복기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외세의 동향에 무지한 반면 아주 좁은 시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만을 탐해 나라를 나락으로 끌고 간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만을 심봉하고 화이론 (華夷論)의 덫에 걸려 구한말 청에게 주권침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그 수하인 원세개(袁世凱)는 조선이 전통적인 중국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노골적으로 유린했습니다.

유생들이 주장하던 화이론과 사대주의에 대한 역풍이 분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 것도 만국공법이 아시아에 적용되고 있었던 상황도 조선의 양반인 노론 지배층도 세도정치세력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는 청의 세력을 청일전쟁으로 물리쳤고, 19세기 내내 동진(東進)을 계속하며 해양세력인 영국과의 Great Game을 지속해 오던 러시아는 영국을 대신한 일본과 러일전쟁을 치룹니다.

이 두번의 전쟁을 이긴 후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정조이후 19세기 조선의 역사를 보면 도무지 노론 양반세력과 새도정치세력이 허울뿐인 명분말고 나라를 위해 한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털어 사리사욕을 채웠을 뿐입니다.

고종이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어 참담하기도 하지만 나름 없는 군사력과 터무니없는 외교력을 가지고 노력을 했습니다.

고종 자신이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한계가 있었지만 노력조차 안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외세지향적이었던 이유는 무력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고종은 러일전쟁 이전 일본이 두려워하던 러시아 세력에 의지를 해보려고도 하고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일제의 조선 침탈에 제동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수 교수의 ‘미쩰의 시기( 경인문화사,2012)’를 참조 바랍니다. 러시아측이 사료를 바탕으로 고종시기 조선의 정권과 이권을 둘러싼 친러파들과 친일파 그리고 각국의 동향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친일)개화파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정한 교정이 필요한데 이는 주로 일본측 사료에 의거한 상황 설명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부질없는 것이 조선은 군사력이 없는 국가였고 군사력이 없어서 고종은 러시아와 청에 군사력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이 판단이 상황을 그르치게 한 것입니다.

세도정치가들이 100년가까이 나라의 부를 다 해먹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나라와 다르게 지배계층이 국방의 의무도 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조선의 지배계층의 국정농단이 결국 조선의 마지막 100년간 농민과 하층계급의 저항을 불러와 ‘민란’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한말의 지사라고 알려진 황현(黃玹)이나 의병장으로 알려진 유인석(柳麟錫) 등 양반 유생들의 행동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가당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인석 의병장은 일본과 외세에 대항해 의병을 알으켰다는 분이 평민출신 의병장을 무시하고 깔보던 황당한 행동을 한 분입니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국에 양반이라고 같은 의병장을 평민이라고 무시하다니. 조선이라는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신분사회가 결국 사회전체의 역동성을 억눌렀고 이것이 결국엔 망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80년대 민중사관이 활개를 펴던 시기도 아니고 2021년에 ‘민란’에 대한 책을 읽어 무엇하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란이나 혁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되짚어 복기하는 것이 민란에 대한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과연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갈등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지나친 부의 편중과 박탈감이 200년 전처럼 하층민들을 자극하게 되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20년간 지속된 부의 편중이 사회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책도 그렇고 이전에 읽은 ‘홍경래의 난’에 대한 책도 그렇고 읽으면서 기시감 (déjà vu)을 느꼈습니다. 저만 이렇게 느낀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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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으로 결론 포함 총 5장으로 이루어진 학술서입니다.

연구에 해당하는 시기는 무신정권 붕괴이후 몽골이 고려의 국왕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하기 시작한 원종이후 공민왕 통치기까지입니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이후 고려의 정치사에 대한 책은 사실 처음 본 셈입니다.

이책의 핵심주장은 고려의 국왕 통치권이 몽골에 복속하고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국왕권의 위상이 복합적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전제주의 왕권국가에서 절대적이던 고려의 왕권이 약간 변용된 동아시아적 화이론 (華夷論)에 따라 몽골을 중국의 황제으로, 고려를 몽골의 한 제후(諸侯)국으로서 상정해 사대하고, 몽골은 몽골이 지배하던 다른 울루스 (ulus,칸국; 汗國)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대하면서 실질적으로 고려의 왕을 정하는데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게 됩니다.

고려의 신료들은 고려의 절대왕권이 몽골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자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변화한 정치환경과 구조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책봉(冊封)관계에 더해 유목민족 특유의 부족간의 결합 혹은 가문과의 결합이 중요해집니다.
외교적으로만 의미가 있고 내치에 관여하지 않는 일반적 책봉관계에서 몽골-고려의 책봉관계는 사실상 몽골이 고려의 국내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 책봉 관계로 변화합니다.

아마 한국의 역사에서 외부의 세력이 직접 국내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정권을 가졌던 시기는 이책에서 설명하는 고려의 몽골 복속기 그리고 19세기 고종 연간 청의 원세계(袁世凱)와 북양대신 (北洋大臣) 이홍장 (李鴻章)이 조선에 내정간섭을 한 시기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충열왕은 무신정권기 약화된 왕권이 몽골 복속이후 사실상 몽골황실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고 그 자신 몽골에서 숙위(宿衛)생활을 통해 몽골의 관습을 경험하고 몽골의 황제권에 기대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 몽골 황제이던 쿠빌라이 칸의 부마(駙馬)가 되기를 요청합니다.

이에 더해 충렬왕은 몽골이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몽골의 관청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승상(丞相)직을 겸임합니다. 고려의 왕이 고려 지역을 총괄하는 몽골관청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왕권을 몽골의 황제권력에 의지해 강화하다보니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몽골의 황제는 자신의 책봉권을 사용해 고려의 왕을 폐위시키고 복위시킵니다.

충렬왕 다음의 왕인 충선왕은 몽골황실 공주 출신 부인과의 불화로 몽골로부터 고려왕으로 책봉 받은 지 7개월만에 폐위를 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됩니다.
충선왕은 충렬왕 사망 이후 다시 복위되어 친몽골적인 통혼제도를 받아들인후 제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중조 (重祚)라고 하는데 두번째 왕위를 나아간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왕을 폐위시키고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몽골 황실의 힘을 체감한 고려의 신료들은 고려의 국왕권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간언(諫言)이외에 몽골황실에 직접 고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신료들은 유목국가애서 가문간의 통혼관계가 중요하다는 걸깨닫자 직접 몽골 황실에 줄을 대기 시작합니다.

고려의 왕실이 몽골 황실과의 통혼을 통해 권력을 얻었다면 신료들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이는 고려 국내정치에서 고려 왕실과 경쟁하는 집안들이 많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민왕 당시 몽골의 황후였던 고려 출신 기황후( 奇皇后)를 배출한 기씨집안이 고려 왕실인 왕씨 집안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떠오른 것도 몽골제국- 제후국간의 특수한 관계, 즉 가문사이의 관계에 기인한 것입니다.

몽골황실이 고려왕실의 후계자인 세자를 몽골에 인질로 잡고 사실상 후계를 정하고 고려의 왕들은 몽골에 상주하며 고려의 내정을 통치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합니다.

고려왕이 고려를 비운상태에서 중요한 정치관련 문제를 몽골 현지에서 전결하는 특유의 방식인데 국정운영에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려 공민왕과 기황후의 경우 사극을 통해 알려진 인물들인데 특히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기씨 출신으로 고려왕위를 이으려 했던 인물로 특히 고려 출신 몽골 황족이 미천한 신분으로 몽골 황위를 잇기 어렵다고 생각하자 자신들의 배경을 위해 고려왕위를 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민왕 당시가 중요한 이유는 몽골제국이 해체되어가고 명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몽골의 쇠퇴를 감지하고 실제 그렇게 양상이 전개되자 몽골황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고려의 왕권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며 기황후 일족인 기철(奇轍)을 왕권에 도전한 역모세력으로 처단했습니다.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공민왕은 신진세력인 명나라와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어 몽골복속기를 끝냅니다.

공민왕의 후사문제는 이후 조선왕조를 일으킨 신흥세력의 역모에 대한 한 원인이 됩니다.


소략하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에 기반한 책이기 때문에 딱딱하리란 선입견과 달리 술술 읽힙니다.

다만 같은 내용이 자주 반복되는 건 흠입니다.

사료의 경우도 전통적인 한문사료인 <고려사>,<고려사절요>,<원사> 뿐만 아니라 <몽골비사 >,<부족지>등 몽골, 이슬람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 내지는 대외저항을 강조하는 호국적 입장보다 당시 정치권의 권력구조와 의사결정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실제 무슨일이 일어났을지 검증해나가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에 관심을 가지다가 당시 한반도에 어떤 왕조가 있었나 매치하다 보면 고려를 만나게 됩니다.

몽골을 서술한 다른 역사서도 간략하게나마 고려에 대한 서술이 나오지만 몽골과 관련된 여러 국가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한번은 고려에 대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3세기 유럽인들의 몽골선교여행에 대한 기록으로 ‘몽골제국기행(까치, 2015)’를 소개합니다. 서구에 몽골을 소개한 대표적인 사료로 알려진 기록입니다.

시간순서로 따진다면 이책보다 이전세대의 이야기로 주로 몽골이 러시아와 폴란드 그리고 흑해지역과 서아시아로 확장하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시기적으로 몽골은 서쪽(유럽과 러시아)과 남쪽(남송)경략이 마무리 된 후 동쪽의 고려와 일본을 침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인정하기 싫지만 고려는 사실상 몽골제국의 속국으로 독립국가로 보이지 않습니다.

전제국가인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후계자를 자신의 뜻대로 정하지 못하는 건 사실 주권이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몽골과 오랜 항몽전쟁을 한 것으로 배웠는데 배운 것과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좀 충격입니다. 고려에 대한 대중 역사서가 좀더 많이 출판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애국’을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보수 사학계에서는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병탄(倂呑)까지는 아니어도 옛 소련처럼 하나의 정치연합체로 몽골과 고려가 100여년간 서로 얽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몽골관련 책에서 한문으로 표기된 명칭과 몽골 고유의 명칭을 병기해서 표시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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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9-23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해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1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원국 작가의 역작인 ‘춘추전국이야기’11권 중 첫번째 권을 완독했습니다.

워낙 잘 알려진 책이고 이책에 대해서는 작가가 직접 출연한 팟캐스트도 유튜브에 있으니 읽기 전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이 방대한 책을 읽는 한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제가 언론에서 읽은 공원국 작가의 글은 대체로 유목사회에 관련된 글이거나 북방지역에 관련된 글들이었는데, 이 책은 철저하게 서술을 ‘어떻게 중국의 중원(中原)지역에 국가가 성립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원지역은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중국인들은 화이론(華夷論)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지역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고대 중국은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중국문명이 생겨났고, 이후 끊임없이 침략을 해오는 북쪽과 서쪽의 오랑캐(융적,戎狄)와 남쪽의 오랑캐(남만,南蠻)를 막아 중국 고유의 역사를 지켜 중국이 만들었다는 철저히 중국 중심적(Sino-centric) 관점의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 (秦)나라도 서쪽에 살던 융족 (戎族)과 문화적 영향을 받고 융족과 전쟁을 하며 군사력을 키워서 중국을 통일했고, 춘추시대 당시만 해도 사실상 유묵민족인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는 역사적 시실을 보여줍니다. 저자에 따르면 진나라는 중국의 사서와 여러 문헌에 진융(秦戎)으로 불렸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설명을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최초의 중국통일 왕조가 오랑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춘추시대 당시 중원에 살던 중국인들의 인식입니다.

잘 알려진 남쪽의 초(楚)나라도 중원의 중국인들은 이질적인 민족으로 생각했습니다. 남쪽의 오랑캐로 생각했고 춘추시대의 예법이 통하지 않는 지역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동쪽지역에 살던 한국인의 조상은 그저 동쪽의 오랑캐일 뿐입니다.

다만 한반도뿐만 아니라 산동반도와 요동지역을 포괄하는 동북지역에 사는 이들을 지칭하지만 말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춘추시대가 시작되기 전 중국의 전설시대와 겹치는 초기국가들인 하상주 (夏商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특히 상(商)나라에 대한 서술이 인상적입니다. 제사를 위해 사람을 제물(祭物)로 삼는 관습이 있고 왕이 죽으면 노예와 여인들을 같이 매장하는 순장(殉葬)이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서쪽의 유목민족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내용으로 봐서 상나라가 제대로 체계를 갖춘 국가라기 보다는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호전적이고 군사력으로 운영되는 군국주의 국가 상나라는 무력 이외에 다른 통치수단이 없었으나 이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는 무력이외 종법 (宗法)에 의해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영지領地)를 내리는 봉건제를 통해 통치체계를 확립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중시해 인간을 희생으로 쓰는 제사관스블 폐지라고 통치원리로서 예법을 중시하는 전통이 주나라 이후 생겨났고, 중국의 사서는 주나라의 통치모델을 수천년간 이상향으로 지목해왔습니다.

주의 동천(東遷)이후 주나라의 제후국 통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는데도, 종법에 근거한 봉건적 전제정치제도는 지속되었습니다.

오랜기간 중국과 그 주변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관계, 중국의 천자가 주변의 제후를 인정하고 책봉( 冊封)을 해주고 제후국이 책봉국에 조공(朝貢)이 확립된 시기가 바로 춘추시대입니다.

엄밀하게 시작이 된 시기는 서주(西周)시대이지만 주나라의 동천이후에도 이 조공-책봉의 관계는 지속됩니다.


이러한 체제를 수호하는 첫번째 춘추시대의 패자(霸者)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과 그가 기용한 재상 관중(管仲)이 등장합니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관중의 경제정책, 정치/외교정책, 군사정책, 제환공의 군사정벌 그리고 춘추시대 초기 4강자 ( 齊, 楚, 晉, 秦)들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쩌면 세계최초의 경제학자로서 농업을 기반으로 상업과 국제무역에 대한 최초의 논설을 낸 관중의 정책에 대한 소개가흥미롭습나다.

스코틀랜드의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통상 알려졌지만 약 2000년 전인 청동기 시대에 아담 스미스보다 정교한 경제정책과 부국강병책의 체계를 세운 고대 중국의 재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습니다.

진한대에 중국이 세계최고의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권짜리 춘추전국시대 전체를 조망하는 대중역사서의 첫책이고 따라서 책은 전체 시리즈의 윤곽을 잡고 춘추시대 이전 시기도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지리에도 상당 부분 서술을 해서 수많은 낯선 이름과 지명에도 각 제후국들의 판세를 읽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역사를 읽는 데 지리의 중요성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2000년도 더 지난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데는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감되는 것 중 하나는 정치라는 것도 세력 다툼이라는 것도 주어진 자연환경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 역사를 이야기하는데도 중요한 물길인 황하(黃河), 장강(長江), 위수(渭水), 한수 (漢水), 회수(淮水)이 장벽으로서 또 물길로서의 역할이 설명됩니다.

역사를 인문학으로만 알고 있어 자연환경을 역할은 자주 간과되어 왔는데 적절하고 이후 진행되는 전개에도 필요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식으로 보면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고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춘추좌전>, <관자>,<논어>,<맹자>,<손자병법> 등을 적재적소에 인용하고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재구성합니다. 믿을 수 없는 자료나 후대에 가필된 자료들은 배제하고 가급적 사실에 근거한 사료를 인용했습니다.

사실 <춘추좌전>이라는 책을 언젠가 읽어보려 마음먹고 있었지만 기약을 할 수가 없어서 일단 입문서로 이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춘추시대와 관중이라는 인물이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국역사에 대해 상당히 내공이 있으신 분이 쓰신 글이고 생각보다 중국 역사에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목민족의 영향이 상당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고대 정주문명에 미친 유목민족의 영향은 알려지지 않아서 더 확인해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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