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로 알려진 철학자 군주 정조(正祖)의 치세를 1797년 발생한 ‘강이천 사건’을 중심으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독일에서 공부하시고 가르치셨던 백승종 교수의 2011년 저작으로 18세기 후반 정조 통치기의 조선에서 일어난 역모사건을 당시 정권을 공유했던 노론 벽파와의 정치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조는 무시못할 정치세력이었던 노론 벽파의 견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의 척사파 거두인 청음 김상헌의 후예이자 노론 벽파의 중심 족벌이던 안동김씨 가문의 종손인 천주교도 김건순이 연루된 ‘강이천 사건’을 단순 사기사건으로 축소시켜 종결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모에 가담했지만 정조의 왕권으로 안동김씨에 정면 도전하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습니다. 대신 정조는 강력한 신권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성리학(性理學)과 고문체만을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인정하고 당시 유행하던 패관소품체의 자유분방함을 모두 금지하는 문화투쟁을 전개합니다.

최상층 양반 가문 자제들의 역모였던 ‘강이천 사건’을 원칙대로 처벌하지 못한 정조는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해 김건순을 사건에서 빼는 대신 당시 노론 양반들도 즐겨했던 소품문학을 근절하는 역공을 편 것입니다.

정치적 위험을 문화적 방식으로 대응한 것으로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정조의 문체반정은 기존의 성리학 유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조치로서 ‘개혁’과는 전혀 상반된 ‘수구반동적’ 조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개혁군주’로서의 정조 이미지와 상반된 해석으로 정조는 사실 기존 조선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기존 체제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의 여러군주 중 주자 성리학에 정통한 철학자 군주로 유학경전에 관한 한 자신의 그 어떤 신하보다 박식한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총명함은 기존 성리학적 정치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조의 이런 수구반동적 태도는 결국 정조 사후 조선이 19세기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두번째, 정통 성리학적 관점에서 패륜아였던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왕권이 강하지 못한 상태로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 상황으로 성리학적 윤리에서도 절대 우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보수 반동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철인 군주였던 정조 사후 19세기 조선이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정치기를 맞게되는 필연이 결국 개인적 역량이 뛰어나던 정조의 사후에 일어난 것은 정조가 만들어 놓은 정치 체제 자체를 국왕 개인이 감당할 만하지 못하면 신하들에게 왕이 휘둘릴 수 밖에 없다는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게 됩니다. 정조는 신하들의 성학론에 맞서 ‘성왕론’을 주장했지만 정조의 아들 순조는 아버지만큼의 능력도 없었거니와 너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외척세력들로 정권이 넘어가게 되는 수모를 당합니다.

정감록을 비롯한 조선의 예언문화를 연구해온 저자는 18세기 서양학문의 관점에서 조선에 들어오게 된 천주교가 당시의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양반 지식층사이에서 정감록의 예언문화와 서로 교류되고 있지 않았나 하는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성리학 이외에도 노장 사상과 양명학과 불교까지 섭렵한 젊은 선비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새로운 서학의 교리 역시 별 부담없이 받아들여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경직된 근본주의적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조선 사회를 좀더 사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를 꿈꾸었고 이런 이상적 사회를 꿈꾼 대가는 바로 목숨이었습니다.

정조 사후 아무도 이들의 목숨을 보전해 줄 수 없었고 1797년 조사에서부터 의심을 하던 집권 세력들은 정조 사후 대대적 종교박해를 시작해 1801년 강이천 사건의 주모자인 강이천과 김건순 등을 죽이게 됩니다.

이 책은 저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작성한 연구노트를 기반으로 나온 책으로 아무래도 일목요연하다고 보기 어려운 단점은 있습니다.

같은 주장이 반복적으로 나온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봅니다.

하지만 논문을 쓰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상상력을 발휘해 추론을 정립해가며 사료를 검토하는 실제의 케이스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어떻게 추적해가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줍니다.

역사서술에 있어 사료가 중요하지만 사료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공감이 갑니다.

단지 기록을 너무 절대시하기 보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 가며 가장 진실에 가까운 목소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수사관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연구를 위해 모든 자료를 읽어야 한다는 연구 방식은 그 자체로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은 너무나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은 그 자체 학자의 주장으로서 주장의 오리지널리티가 더 중요하지 모든 증거를 다 인용으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증거가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한 것이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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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정조(正祖)의 국가통치 방식에 대해 고찰한 정치학 서적에 가깝습니다.

정조 개인의 일생에 대해서는 책 제1장에서만 간략하게 서술되어 평전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총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정조 당시의 대외관계를 다루지 않고 정조이후 세도정치기를 주로 다루었지만 저자가 밝혔듯 저자의 또 다른 저작 ‘정조사후 63년’의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책의 구성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차라리’정조사후 63년’을 일독하길 권합니다.
이책은 정조 통치기 당쟁을 막기 위해 언관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정조의 정책이 그의 사후 19세기 내내 김조순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 등 외척 세력에 의해 조선 말기 정치가 어떻게 피폐해졌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 시각과 내용은 이 책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책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밀도 있는 연구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몇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 짚어 봅니다.

정조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군주로서 정통성리학에 자신의 식견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붕당정치를 대처하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정치가 조선 중기 이후 우암 송시열을 숭상하는 근본주의 성리학자들이 정권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했고 당시 정권을 잡았던 노론 벽파 (老論 僻派)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 당시까지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南人)세력을 고위직에 기용하는 인재등용술을 썼습니다.

남인들을 비롯해 능력있늠 서얼, 중인들을 국책 연구기관인 규장각(奎章閣) 검서관으로 기용해 학문연구와 국책자문을 맡겼고 규장각 각신들을 정승으로 기용하는 수완을 보였습니다.

채제공 (蔡濟恭)으로 대표되는 남인 출신 고위 정치인들은 정조가 함께 기용한 노론출신 관료들과 함께 정조의 국책사업이던 사도세자의 능 이전과 추존사업, 그리고 수원의 화성건설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정통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노론 세력을 상대로 남인세력을 기용하고 또 그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은 정조 자신이 노론 정치가들 못지 않은 정통 성리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보수적 노론 정치가들이 경전을 인용해 국왕의 정책에 반대를 해도 정조는 다른 경전을 인용해 이들의 논리를 반박했습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정조 자신의 개인적 역량에 따른 것으로 사실 그의 엄청난 역량을 바탕으로 한 성왕론 (聖王論)을 주장하며 임금은 도덕적 모범자로 남고 사대부들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노론의 성학론 (聖學 論)을 거부하였습니다.

조선 말 정조만큼 역량이 뛰어나지 못한 국왕이 집권하는 동안 정조대에서 이루어 넣은 제도적 성과는 허물어질 수 있는 리스크가 존재한 것이지요.

정조는 견제와 균형에 상당히 능한 노련한 보수 정치가로 남인을 기용하면서 노론이 공격한 남인의 서학수용을 학자의 관점에서 관대히 처리하여 남인을 보호했으며 노론 세력들이 전통 성리학 이외에 청으로 들어온 패관문학에 심취해 있을 때 이들의 문체가 정통 성리학의 관점에 맞지 않는 것이라며 당시 유행하던 소설 등의 양식의 글을 금지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노론을 공격합니다.

정조는 개혁군주였으나 보수적 성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노론과 남인의 약점을 두루 이용해서 정조대는 확실히 능력있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당색과 상관없이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남인들의 스스로 공부하던 서학은 탄압 받고 정약용 형제들은 귀양을 가고 외척들이 세력을 잡아 조선이 망할 때까지 거의 60여년을 세도정치로 일관하고 서세동점의 시대를 잘못 읽어 대처하지 못하게 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더 진한 법인가 봅니다.

영정조 대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으나 학술서와 대중서의 중간을 채워주는 그런 책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평전분야는 한국 출판계가 특히 약한 분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평전은 쓰기 쉽지 않은 책이지만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보수주의 러시아학자 로버트 서비스 옥스퍼드대 교수가 스탈린, 레닌, 트로츠키 세사람의 평전을 낸 것은 유명합니다.

한국사 분야에서도 이들 못지 않은 멋진 평전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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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lbilly Elegy: A Memoir of a Family and Culture in Crisis (Paperback) - 넷플릭스 '힐빌리의 노래' 원작
J. D. Vance / HarperCollins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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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오하이호주 미들타운(Middletown)의 백인 노동자 가정(White Working Class Family)에서 자란 지은이가 겪은 가정사를 통해 이들 백인 노동자 계층이 왜 주류사회와 동떨어진 체 ‘열패감’ 에 시달리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대학을 진학한 적 없는 가정에서 처음 주립대학 (Ohio State)에 진학하고 또 처음으로 미 해병대 (US Marine)에 입대해서 이라크 전쟁에 파견되고 최종적으로 예일대 법대 ( Yale Law School)에 진학하고 Yale Law Review의 편집장까지 지낸 지은이의 이력은 분명 눈길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저 가난한 백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를 거쳐 변호사가 되는 이야기라면 그저 그런 성공담의 하나로 그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전체성인 Hillbilly 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왜 자신이 속한 가족과 공동체가 패배의식에 물들어 인생을 스스로 구렁텅이로 밀어넣는지 진지하게 되묻습니다.

왜 자신의 주위에는 알콜중독인 어버지나 어머니가 있는 가정이 있으며 가족간 서로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항상 있는지 왜 항상 주위에 이른 결혼의 실패와 잦은 이혼으로 불안정한 가정이 생겨나는지 그리고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어떤 트라우마를 가질 수 밖에 없는지를 기존 연구를 인용해 담담히 기술합니다.

저자도 친부가 누구인지 모른체 자라났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어머니는 간호사로 일했지만 약물 중독으로 여러차례 재활센터(Rehabilitation center)에서 치료를 받은 아픈 개인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 고등학교 시절까지 공부와는 관계없는 생활을 한 저자는 조부모의 보살핌으로 안정을 되찿아 대학도 가고 해병대 입대도 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실패를 답습할 수 없다고 결심하고 밤잠을 안자고 공부와 일에 매진하는 모습에선 짠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 중부에 자리잡은 이 백인 노동자 계급은 오하이호, 인기애나, 미시건을 포함한 러스트 밸트 (Rust Belt)의 노동자 층을 이루는 근간으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 세력이었으나 지난 미국 대선에선 공화당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이었습니다.

본인이 속한 계층의 이익과는 전혀 다르게 부자들만을 위한 정당에 투표를 헌다는 점에서 한국의 극우 세력, 태극기 부대와 정서적으로 유사한 면이 보입니다.

저자도 20대에 이라크 전쟁에 파견되었던 해병대 예비역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미국의 애국주의, 영웅주의에 별 반감이 없고 이라크 파병으로 자신이 그래도 위대한 미국에서 태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빛이 바랜 현재 상황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히는 것도 공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런 정치적인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책의 인상적인 부분은 지은이가 묘사한 예일대 법대의 로펌 면접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미국의 상위 파워엘리트들이 어떻게 인맥을 통해 자리를 잡는지 리얼하게 보여줍니다. 백인이지만 그리고 똑똑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정서를 가진 저자는 이 자리에서 심한 이질감을 경험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합니다.

미국인인데도 이런 이질감을 느낀다면 다른 외국출신 학생들은 이보다 더한 이질감을 느낄 것으로 보이고 아마 그 자리에 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서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상당히 무겁고 기본적으로 슬픈 정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국사회의 깊은 내면을 몰래 들여다 본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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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도시연구자 조이담씨가 새롭게 해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구보(仇甫) 박태원 선생의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에 대한 책입니다.

1부는 조이담씨가 소설로 재구성한 박태원 선생의 전기로 이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라는 소설이 탄생하게 되는 전사를 기록합니다.

2부는 저자가 1920-30년대 경성에 대한 도시공간 연구와 여러 근대 문헌을 기반으로 해제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입니다.

이 책은 이후 2009년에 다시 한번 개정된 것으로 압니다만 저는 2005년 초판으로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지만 소설 자체보다 사실 저는 이 시대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1부의 시작도 1919년으로 박태원 선생이 초등학교 입학 전 일어났던 3.1운동의 영향과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언급, 그리고 조선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운동이 박태원 선생의 집안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꽤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상해임시정부 관련 인사들이나 박태원 선생 주위의 일본 유학생들의 이야기도 같이 나오게 됩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약 1930년대 중반 정도를 커버하는 이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는 경성 한복판인 육조거리를 광화문통으로 변모시키면서 광화문을 동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올렸으며 경성역을 새로 지었고 경성부청과 조선은행 그리고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을 세워서 경성의 경관을 근대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창경궁은 창경원이 되어 조선인들의 놀이공원이 되었고 장충단에도 공원을 세웠습니다.

구보 박태원은 일본 호세이 대학 (法政大學) 영문과에 다니다 신경쇠약 증세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고 친구 이상과 함께 매일 경성 도심을 산책합니다. 그러면서 상념에 빠지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심리를 포착하여 기술해서 소설을 씁니다. 이 소설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로 읽다보면 작가 자신의 경험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에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거의 첫번째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에는 아예 직접적으로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의 율리시즈 (Ulysses, 1922) 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당시로서는 최신의 영문 소설로서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된 경성의 도심 한 귀퉁이 카페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주인공들이 먼 아일랜드 소설가의 이야기를 하는 건 웬지 현실감이 떨어지게 느껴집니다.

흔히 알려진 폐병쟁이 문인들의 초상도 쉽게 엿볼 수 있는데 박태원이 사사했던 소설가 이광수도 건축가 출신 천재 시인인 이상도 모두 결핵을 앓았습니다. 해방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한국에서 문인들의 모습은 박태원 선생이 소설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폐병에 걸려 있거나 마음이 심약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로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구보씨가 돌아다니던 산책구간은 저 역시도 한때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던 곳으로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그리고 한국은행을 지나 소공동을 끼고 조선호텔을 지나 종로로 그리고 종로3가에서 을지로를 통과해 충무로를 거쳐 명동으로 가던 코스였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겹치는 코스가 많아 놀라웠습니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역사적 흔적과 더불어 도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동선으로 1930년대 당시 경성의 이 지역은 경성의 근대경관을 대표하는 곳으로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의 총본산이었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간적으로도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미국의 세계지배가 최초로 공식화 되었던 시기로 20세기의 국제관계를 규정한 파리강화회의 (1919)가 제1차세계대전 (1914-1918)이후 개최됩니다. 한국의 3.1운동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알리고자 고종의 장례식을 맞아 조직되었던 저항운동이었고,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와 사회주의 무장조직들이 상해와 연해주 러시아 등지에 나타나게 됩니다.
1917년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2 세를 폐위시키고 소비에트 공산 정권을 수립했지만 러시아의 내전으로 1922년까지 이 지역은 안정화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에 가담하고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조선인들도 상당했습니다.

이책에 나오는 사회주의 운동가 한위건도 그중 한사람으로 일본 유학후 신문 기자를 하다가 상해로 망명한 이로 이후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는 인물입니다. 일본에서부터 알던 의사인 이덕요와 결혼했지만 잠깐의 신혼생활이후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이후 중국에서 만난 부부는 중국 북경에서 보건 교사로 일하던 아내가 출산 도중 사망하는 불운을 경험합니다. 잠깐의 신혼생활과 망명 그리고 출산도중 사망이라니. 정말 기막힌 삶입니다. 이후 한위건의 자식은 박태원의 집에서 자라게 되고 한위건은 혁명을 위해 가정의 행복을 포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뜻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상황인데 납득이 쉽게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1930년대 많이 배운 일본 유학생들 중에는 조선 독립 투쟁을 위해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많았는데 이는 일본 당국에서도 인지했던 상황으로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대체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혁명가의 길을 가거나 반대로 철저하게 일본제국주의의 협력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3.1운동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해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 어릴적 당시의 이야기로만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기 전 평안도에서 피난 오기전 집안의 살림이 어떠했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래 시간이 지난후 역사적으로 평안도 땅이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지역이라는 걸 안 이후에는 아버지께서 생전 언급하셨던 말씀이 조금 수긍이 갑니다.

근래에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설명하는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 시기가 지금 21세기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문물에 직접적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입이다.

한국의 현재는 가깝게 보면 1945년 해방이후의 정치사와 직접 연관이 있겠지만 당시 의사결정권자들의 개인사는 제2차세계대전은 물론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혁명,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과도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준 세 명의 열강 정상들은 모두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 러시아 혁명을 겪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를 다시 들여다 보는 이유는 현재의 기원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케이스를 찿을 수 있다는 장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래룰 대비하기 위해 과거를 복기하는 것만큼 유용한 대비책은 없겠지요.

이책을 보고 나서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책은 구보 박태원의 소설들입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입니다.
이전에 문학과지성사판으로 보려 했으나 끝내 읽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Ulysses’ 입니다. 어릴적부터 난해한 소설로 영어 선생님들마다 언급하셨던 책입니다. 요새 영문 소설을 거의 읽지 않지만 기회가 되면 보려 합니다. 영미권에서는 이 책은 수많은 독자들이 읽고 또 읽는 그리고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런지 눈으로 보고 싶네요. 과욕일수도 있지만 도전은 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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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대유행 (COVID 19 Pandemic)과 미증유의 경제불황을 겪고 있는 시점에 다시 2008년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책을 읽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지난 1월이후 심화된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이전까지 누구도 실물경제의 공급사슬(Supply Chain) 의 붕괴와 이동제한에 따른 영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이 터지기 전 1929년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는 2008년 미국에서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 The Great Recession)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19 대유행과 동반된 경기 침체와 그로 인한 공황의 여파는 이미 여러 경제학자들이 2008년 위기의 규모를 뛰어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이해하던 경제, 정치체제 자체가 이미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2008년 미증유의 위기를 겪고도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연명하던 경제체제가 사실상의 종언을 고했다고 섣부르지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2008년의 위기가 지난 1990년대 이후 약 30여년간 경제철학을 지배해온 근본주의적 신자유주의 ( fundamental neoliberalism)에 따른 정부개입 최소화에 따른 결과입니다.

시장의 참가자는 이성적이고 시장은 저절로 균형점에 ‘스스로’ 복귀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주류경제학자들은 현실 경제에 대한 정책처방보다 수학적 모델링에 매달렸고 대기업 CEO들을 포함한 기업인들은 정부의 규제가 풀린 틈을 타 단기적 이익을 추구해 주가를 올리는데 올인했습니다. 기업의 장기적 성장과 무관하게 단기적 이익을 추구한 이들은 일반 노동자들보다 많게는 300배 이상의 보너스를 챙겼습니다.
심지어 2008년 경제위기로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최고경영자조차 상상할 수 없는 보너스를 챙겨 이들의 도덕적해이(Moral Hazard)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신자유주의 추종자들의 맹신과는 정반대로 미국의 중앙은행과 미 재무부는 미국의 세금을 동원해 스스로 위험자산에 배팅해온 거대은행들을 구제(bail out)하였습니다.

전례가 없었던 미 정부의 개입을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통화정책(monetary policy)는 물론이고 중앙은행이 직접 은행의 부실자산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반으로 한 자산담보부 채권)을 인수하고 돈을 푸는 양적완화 (Quantitative Easing)을 실시하였습니다.

2008년 미 중앙은행과 재무부로 대표되는 정부의 대규모 시장개입( Intervention)으로 사실상 시장이 스스로 균형점에 도달하기 때문에 정부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믿음에 대한 신화는 이미 깨졌습니다.

기업은 이전에도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성장해왔고 지금도 그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실제로 입증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여년 후 2008년을 능가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은 투자 은행들과 당국에서 GDP가 이번 사태로 약 30%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지난 30여년을 관통해오던 세계화(Globalization)는 더이상 따라야 할 기조가 아니고 코로나 19를 확신시키는 요인으로 세계화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불가피해졌습니다.


현재 세계경제는 저금리 상태로 인해 더이상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의 효과가 먹혀들지 않는 상태이고 각국 정부의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부양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08년의 위기를 통해 그리고 현재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촉발된 경제위기 상황에서 소환된 두명의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한명은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학자로 알려진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이고 다른 한명은 케인즈주의자로서 경제의 불안정성(instability)를 주장한 민스키 (Hyman Minsky) 입니다.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파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등장해 약 40여년간 주류 경제학을 지배해 왔습이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s)은 전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 이전 대공황 시기에 등장해 20세기 경제질서를 확립한 케인즈는 고전파 경제학자들과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고전파 학자들은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면 소비자가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해서 상품 소비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시장가격을 수요 공급이 따라 결정되고 항상 균형점으로 수렴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케인즈는 기업이 상품을 생산해도 소비자가 구매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높이게 되면 경제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대공황이후 침체에 빠졌던 미국이 뉴딜정책을 시행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고 이후 경제위기가 생길때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즉 이론적으로도 순수하게 민간기업들만으로 경제를 운용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장근본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 경제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허구적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스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제학자이지만 신자유주의자들과 정반대로 경제는 늘 불안정하다(instable)고 주장했던 학자입니다.
그는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단점이 있다 (Instability is an inherent and inescapable flaw of capitalism)’ 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매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위기는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이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블랙스완 (black swan) 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늘 함께해 왔던 화이트 스완(white swan) 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도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직장생활하는 동안만 해도 약 6번의 경제위기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IMF 구제금융)
1998년 아시아 통화위기
2000년 닷컴 버블
2001년 9/11 사태
2007-2009년 세계경제위기
2020년 코로나 19 대유행과 경제위기

이렇게 경제위기가 자주 닥치고 직장 생활하는 동안 경기침체( recession) 상태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 경제가 균형점으로 수렴하고 정상적인 경우가 경제가 안정적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의견은 현실에 비추어 비판의 여지가 아주 많아 보입니다.

앞서 소개드린 케인즈와 민스키의 주장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책의 본론은 1-7 장까지가 본문으로 그 뒤 정책개혁 부문이나 향후 경제전망은 현상황과 달라 선택적으로 읽어도 될 듯 합니다. 2010년 경제위기 직후 나온 책인 것은 감안해야 할 듯 합니다.

참고로 같이 읽으면 좋은 책들을 좀더 뽑았습니다.

케인즈와 민스키 교수의 글은 저도 향후 읽을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한번 리뷰할 예정이며 나머지 책들은 제가 이전 소개했던 책들입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uncontrolled risk 가 리먼브러더스에 촛점을 맞춘 책이라면 How Markets Fails 는 사무엘슨 이후 미국의 주류경제학이 어떤 이론적 논의를 통해 발전되어 왔는지 추적한 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책입니다.
아마 주류경제학에 대해 이 책처럼 간결하고 재미있게 서술된 책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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